마시던 물컵을 떨어뜨려 주방에는 유리파편들이 자욱했다. 발을 한 번 잘못 디디자 날카로운 파편이 발바닥을 찔렀다. 도무지 어디로 걸어가야지 빗자루를 찾을 수 있을 지 난감했다. 그 때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나는 전화를 받으러 한 발자욱도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전화벨 소리를 듣고도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네다섯번 울리면 말 전화벨 소리가 계속 울어대었다. 전화벨 소리가 그치지 않자 그 소리는 119같은데 구급요청을 하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어떡하든 전화를 연결하려는 악착같음이 배어 있었다.
- 여보세요?
- 강청산씨 댁이죠, 청산씨 계세요?
- 저예요? 누구신지?
- 저예요, 민숙이 친구 명희!
- 아, 예 명희씨 그런데 웬 일이세요?
- 이제는 목소리도 다 까먹으셨군요!, 그동안 잘 지내셨죠!
- 아! 예 명희씨 그동안 잘 계시죠?
- 잘 못지냈는데요, 하하. 만나서 드릴 말씀이 좀 있구해서 한 번 뵙죠!
- 예, 그러시죠
명희는 학교 다닐 적 레인코트와는 단짝이었다. 레인코트가 칠색도시락을 싸다준 일과 내가 레인코트의 머리를 감겨 주던 일을 놀림감으로 삼아 나에게 장난을 쳐 대던 바로 그 명희였다. 명희는 얼마전 군인인 신랑과 결혼했는데 발령관계로 인해 잠시 각자 살림을 하고 있었다. 군인은 발령이 문제였다. 신랑의 잦은 발령으로 인해 전국 팔도를 떠돌다시피 해서 아직 아이 낳을 계획은 엄두도 못냈다고 했다. 누구보다도 명희는 레인코트와 내가 연애하던 시절부터 우리의 관계가 잘되기를 바랬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헤어진 것을 가장 마음 아파해 준 것도 바로 명희였다. 레인코트가 졸업을 하고 서울로 올라가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전해 준 것도 명희였다. 그것이 명희를 통해 들은 레인코트에 관한 마지막 소식이었다. 우리는 시내 커피숍에서 다시 만났다.
- 청산씨, 오랫만이예요. 내가 연락을 해서 놀랬죠?
- 아아, 이게 얼마만이예요?, 보기 좋으네요...
장난을 칠 말큼 쾌활하고 인상이 좋은 명희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변한 것이 없었다.
- 그런데 무슨 일이예요, 갑자기?
- 내가 민숙이 이야기 말고 따로 청산씨 만날 이유가 있나요?
- 민숙이야 시집가서 잘 살고 있을텐데 아닌가요?
- 잘 살면 제가 뭐하러 이러구 나왔겠어요
- 무슨 일이 있군요, 그렇죠?
- 말도 마세요, 결혼해서 처음에는 둘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죠. 깨를 볶았죠
- 그런대 무슨 문제가 있었나요? 남편이란 사람이 민숙이를 그렇게 아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나는 궁금했다. 레인코트는 웬만한 어려운 일들을 이것저것 다 겪어 모가 나게 처신을 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 민숙이 말로는 결혼 육개월 정도 지나면서 부터 남편의 의처증이 문제였나 봐요.
- 나이 차이가 문제였던 가요?
- 맞아요. 11살이나 차이가 났었잖아요? 남편은 비교적 자유롭게 행동하며 살아가는 민숙이를 의심하기 시작했죠
- 무슨 조선시대도 아니고... 애당초 결혼에 부모들이 끼이는게 아니었는데....
- 그래요. 결혼해서 얼마 지난 후 민숙이 남편은 민숙이가 처녀가 아니었다고 말하며 숨도 못 쉬게하며 감시했나봐요
- ... 그럼 나 한테도 책임이 있는건가
- 그렇기야 하겠어요?, 원래 병이 있었던 거겠죠. 민숙이가 집을 비우면 남편한테서 어떤 날은 하루에도 십여차례씩 전화를 해서 행선지를 따져 묻고는 했죠. 민숙이가 외출하다가 돌아오면 다른 남자와 놀아났는지 확인을 해 보아야 겠다며 불을 환하게 켠 상태에서 옷을 벗기고 음부와 속옷검사를 했대요.
- 미친 놈, 아휴, 기가 막히네요. 얼마나 힘들었을까...
- 그 뿐만 아니에요. 심부름센터를 시켜 민숙이를 미행하고 승용차의 주행거리도 확인했고 그리고 최근에는 근거도 없이 옛날 애인을 다시 만나 바람을 피우는 것 같다고 말하며 의심을 하면서 사람을 잡았다죠. 돌아오면 허구한 날 핸드백과 소지품을 뒤지고 옷을 벗기고 몸수색을 했어요. 그러다가 자기 성에 차지 않으면 식탁의 국이고 반찬이고 다 뒤집어엎고 레인지고 뭐가 다 깨어 부셔서 도저히 살 수가 없었죠.
- 그래서 나이 차이가 너무 많아도 문제가 생기죠. 그래서 옛 어른들은 서너살 터울이 좋다고 그랬나봐요.
- 밤마다 난리가 벌어지니 민숙이도 무섭고 살 수가 없어 매일 지구대에 신고해서 경찰들이 출동을 하고 신변보호를 요청할 정도가 되었나 봐요. 결국은 살지 못하고 아이와 들쳐업고 집을 나온거죠. 별거해서 혼자 산지 벌써 일년이나 되었죠.
이야기를 다 듣고 있자니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내 책임도 있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레인코트가 내 아이를 임신했을 때 내 처지가 죽이 되건 밥이 되건 배짱 좋게 아이를 낳아 기르며 레인코트를 떠나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배짱도 없이 흔들리자 레인코트는 내 곁을 떠나갈 수밖에 없었었다. 레인코트가 집을 나와 별거를 하고 있었지만 아직 이혼한 것은 아니어서 엄연하게 법적으로는 그 의처증 환자의 아내였다. 하지만 별거 일년이면 벌써 이혼의 종착역이었다.
- 청산씨, 내일 남편을 만나러 서울 올라가야 하는데 가는 길에 함께 가서 명희를 한 번 만나 보시는게 어때요?
- 제가요?
- 민숙이한테는 지금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힘이 될 만한 사람이 필요해요
-.....
- 만일 마음에 있으시면 내일 아침 9시까지 경부고속도로 입구에 있는 구서동 전철역 앞으로 나오세요.
- 한 번 생각은 해 볼께요
오늘 명희를 만난 일이 난감했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어야 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여자의 마음만이 그런것이 아니라 남자의 마음도 흔들리는 갈대다. 달려가던 길에서 옆이나 뒤를 돌아보는 일이었다. 자꾸만 레인코트를 한 번 쯤은 만나야 한다는 일종의 자기 최면같은 것을 걸고 있었다. 만나지 말아야 하지만 이대로 끝을 낼 것이 아니라, 한 번쯤은 만나 관계에 관한 최종 입장을 정리해야 한다는 핑계. 그것이 핑계라는 것은 이미 끝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레인코트는 이제 유부녀였고 한 아이의 엄마였다. 하지만 명희를 만난 지금 레인코트와의 관계는 다시 되살아나 나를 구속하고 있었다. 내가 레인코트를 사랑했었고 어쩔 수 없이 헤어진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다시 못 만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이야기였다. 흘러가버린 과거는 과거로 잊어버려야만 했다. 그것을 되돌린다고 해서 다시 옛날 처럼 원상회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두 사람에게 더 큰 상처를 남길 수 도 있었다.
나는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도 만나 한 번 쯤은 어떤 형식으로든 레인코트와 만나 결말을 지어야 하지 않을까. 만리포로 여행을 갔다가 돌아와 우리는 한 마디 말도 없이 그렇게 헤어져 버렸다. 사명을 다한 사랑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하고 헤어졌지만 너무 아쉬움이 남는 헤어짐이었다. 내 속에서는 다시 레인코트를 만나서는 안된다는 외침이 있었다. 이제 곧 4월이면 초록바지와 결혼을 하게 된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 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상황에서 곁길로 들어서서는 안될 것이다. 하지만 내 안에서는 두 개의 서로다른 내가 싸우고 있었다. 레인코트를 만나 보아야 좋을 일이 없으므로 다시 만날 필요가 없다는 나와 그래도 만나서 레인코트의 어려운 처지를 보살펴야 한다는 또 다른 내가 또아리를 틀고 앉아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머리가 쪼개질 듯한 편두통에 시달리며 혼미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