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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멘타 하인학교

[도서] 벤야멘타 하인학교

로베르트 발저 저/홍길표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4점

성장소설을 좋아했던 건 불운으로 점철된 현재를 사는 소년이 열정적으로 사는 모습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내게 삶은 전진하는 것이었고, 정지된 삶은 패배자의 삶이었다. 나는 삶에서 패배하고 싶지 않았다.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훗날 아주 미미한 존재, 누군가에게 예속된 존재로 살아갈 거라는 뜻이다.(7쪽)

 

로베르트 발저의 『벤야멘타 하인학교』의 긴 첫 문단 중 나오는 문장이자 주인공이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하는 말이다. 온 힘을 다하다 보면 행복한 미래가 올 거라는 믿음을 갖고 사는 사람에게 인간은 결국 미미한 존재로 살아갈 거라는 말은 당혹스럽다. 그것이 설령 진실일지라도. 로베르트 발저는 말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 외면하고 싶었던 진실을 꺼내 환기하게 했다.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이.

 

벤야멘타 학원의 유일한 수업은 ‘소년이라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이다. 생도들은 벤야멘타 학원 원장의 동생이자 유일한 선생님인 리자 벤야멘타에게 같은 수업을 반복적으로 들었다. 소년은 무릇 야망을 품어야 하거늘 생도들의 꿈은 아주 소소했다. 실린스키는 말을 보살핀 후 가끔 말을 타고 나가는 삶을 원했고, 어린 나이에 중노동을 했던 크라우스의 꿈은 주인을 제대로 섬기는 하인이 되는 것이었다. 지금은 많은 것들이 가능한 시대지만, 이들과 같은 삶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 적어도 돈은 벌 수 있을 테니까. 어쩌면 그 꿈들은 그들이 꿀 수 있는 최고의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금줄을 걸고 태어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당장 먹고 살 일이 다급한 사람들에게 꿈은 헛된 욕망 아니던가.

 

야콥에게 성공은 ‘신경쇠약과 천박한 세계관을 필연적으로 수반’(92쪽)하는 것이었다. 뛰어난 아버지의 그늘에서 질식할까 두려웠던 ‘나’ 야콥이 선택한 곳은 벤야멘타 학원이었다. 야콥은 칼에 찔려 피범벅이 된 노동자와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엄마의 발밑에 엎드려 용서를 비는 하인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경험이 있다. 갈망했던 자유를 행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밑바닥 인생들은 종속된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야콥은 사랑받지 않는 삶, 그리움의 대상이 되지 않는 삶을 원했다. 어차피 인생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 영(零)이 될 테니까. 그는 어차피 영이 될 존재라면 충실한 하인이 되어 돈을 벌며 사는 것이 최선의 삶이라고 생각했다.

 

야콥이 확실한 이성을 가진 척 행동했다면 그의 형이자 예술가인 요한은 인식의 혼란 속에 헤매고 있었다. 이 세상은 추구할 가치가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면서 노력은 해야 한다고 말하고, 여전히 돈은 가치가 있다고 하곤 부자들은 진정 굶주린 자라고 말했다. 요한의 혼란을 요한만의 것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야콥은 하인으로 살려면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서 끊임없이 주변인들을 관찰하고 생각했다. 그 역시 요한과 다르지 않은, 끊임없이 혼돈의 숲을 헤매는 사람이었다.

 

몰락한 벤야멘타 원장이 야콥을 동행자로 선택한 것은 규정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야콥이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야콥은 ‘호흡하고, 존재하고, 정직하게 선을 추구하며 살게 되지는 않을지 보고 싶다’(184쪽)며 벤야멘타 원장과 사막으로 떠났다. 나는 벤야멘타 원장을 믿지 않는다. 주종관계 혹은 상하관계가 아닌 인격 대 인격으로 동등하게 그를 대할지 의심이 간다. 그래서 많이 불안하다.

 

아무것도 없는 자연 본연의 상태로 돌아가 살고 싶다는 것은 퇴보일까? 전진일까? 답을 할 수 없지만 야콥이 새로운 삶에 자신을 던진 일은 죽은 삶을 살지 않겠다는, 아름다운 존재로서의 삶을 살겠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영(0)의 삶일지언정 영(靈)의 삶은 살지 않겠다는.

 

지금으로 말하면 중학교 졸업 정도의 학력이었던 로베르트 발저는 가난 때문에 밑바닥 삶을 전전했다. 누구와도 인연을 맺지 않았고, 오직 글쓰기와 걷기만을 사랑했다고 한다. 삶의 모호함은 그를 세상과의 부딪힘보단 내 안의 세계에 빠지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로베르트 발저가 야콥의 입을 빌려 하인이 되겠다고 말했던 것은 결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뜻은 아닐까. 내게 『벤야멘타 하인학교』는 몰락하고 싶지 않았던, 제대로 살고 싶었던 한 남자의 간절함이 담긴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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