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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도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마르코 폴로 저/김호동 역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2점

1. 저자에 대하여

마르코 폴로

1254년

o 이탈리아 베니스 출생 * 크로아티아 출생이라는 설도 있음

- 당시 아버지(니콜로)는 숙부(마페오)와 동방무역차 부재중

1269년(15세)

o 아버지를 처음 만남

- 어머니는 이전에 사망

1271년(17세)

o 아버지와 숙부를 따라 동방여행을 떠남(서편 : 여행을 떠난 이유, 책을 구술한 이유 설명)

* 지중해 동북연안(라이아스) → 터키 동부 → 이란 동남부 → 타브리즈 →야즈드 → 키르만 → 페르시아만 입구(호르무즈해협) → 이란사막 → 아프카니스탄(헤라트/발흐) → 파미르 산중(바닥샨 : 마르코폴로의 병으로 1년 요양) → 카슈가루 → 하미 → 감주 → 숙주 → 텐둑 → 상도(1편 서아시아, 2편 중앙아시아)

1274년(20세)

o 元나라(쿠빌라이 때)의 여름 수도 상도에 도착, 이후 17년간 元에서 머뭄

(3편 대카안의 수도, 4편 중국의 북부와 서남부, 5편 중국의 동남부)

* 쿠빌라이의 사신으로 4개월간 중국 서남부를 여행하기도 하고 양주에서 3년 동안 관리로 근무하기도 했다고 하나 관련 사료 無

1290년경

(37세)

o 아르군 왕비 감 코카틴 공주 일행 수행 명목으로 元을 떠남

* 천주港 → 남지나海 → 인도양 → 아르군 왕국(6편 인도양)

* 7편 대초원은 여정 밖의 지역에 대해 서술

1293년(40세)

o 아르군 왕국 도착, 쿠빌라이 사망소식을 듣고 귀향길에 오름

* 아르군 왕국 → 테헤란 서북방(아브하르) → 타브리즈(9개월간 체류) → 흑해 남안(트래비존드) → 콘스탄티노플 → 베니스

1295년(42세)

o 베니스 귀향

1298년(45세)

o 제노바 감옥에서 수감생활 중, 작가 루스티켈로를 만나 <세계의 서술(Divisament dou Monde)> 저술 시작

* 베니스와 제노바간의 전쟁에 휘말려 포로로 감옥에 가게 된 것으로 추정

1299년(46세)

o <세계의 서술(Divisament dou Monde)> 완성

* <동방견문록>이라는 제목은 일본에서 널리 사용되는 제목을 차용한 것임

1324년(71세)

o 사망

* 정확한 행적은 알 수 없으나, 유서에 따르면 결혼하여 세 딸이 있었으며 부유한 생활을 했던 것으로 추측됨


마르코 폴로는 1254년 베니스에서 태어나 1271년부터 1295년까지의 기간동안 유럽에서 아시아까지 여행했으며, 그 가운데 17년 동안 중국에 머물렀다. 무역상이던 아버지와 숙부는 중동교역으로 인해 몽골제국 쿠빌라이 카안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다. 폴로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의 서한을 받아 몽골제국으로 떠나는 아버지와 따라 동쪽 여행을 하게 된다. 육로로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 오아시스인 케르만, 발흐, 야르칸드, 호탄, 차르찬 등지를 지나 는 중에 병을 얻은 마르코 폴로는 요양차 파미르 산중의 바닥샨에서 1년간 머물렀다. 그 뒤 74년 상도(上都)에 도착하여 쿠빌라이 칸을 만나 성유(聖油)와 교황의 편지를 바쳤다. 이후 폴로는 상도에 그대로 머물며 원(元)왕조의 관직에 올라 17년 동안 살았다. 그 동안 중국 여러 곳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고, 90년 무렵 일한국의 아르곤왕에게 보내는 공주의 여행 안내자로 선발 되어 중국을 떠나 95년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고향 베니스로 돌아왔다. 98년 베니스-제노바 전쟁시 포로가 되어 제노바의 감옥에서 작가 루스티켈로에게 동방에서의 견문담을 받아 적게 하여 완성된 책이 <세계의 서술(Divisament dou Monde) : 동방견문록> 이다.

마르코 폴로가 <세계의 서술(Divisament dou Monde) : 동방견문록> 을 남긴 이유

마르코 폴로 일행이 고향땅을 떠난지 25년만에 돌아왔을 때 아무도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들은 고향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믿어주지 않자 사람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고 그 자리에서 각종 보석들을 보여주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그들을 믿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후대에 만들어진 전설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

실제로 귀향후 감옥에 갇히기 전까지 폴로의 생활은 어땠을까? 아버지 부재중에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 누구하나 돌봐주는 이 없이 고아처럼 지내던 그가 신비의 세계인 동방의 대제국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다양한 경험을 쌓고 돌아왔다. 보잘 것 없던 아이가 영웅이 되어 귀환한 것이다. 아마도 그는 누구라도 붙잡고 자신이 보고 들은 엄청난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고향사람들은 그를 허풍쟁이 취급했고 폴로는 답답한 마음을 가눌 길 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찌어찌한 연유로 감옥에 들어와 天運으로 루스티겔로를 만나게 되었다. 루스티겔로는 참회 왕 에드워드의 후원을 받아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십자군에 동행해 폴로 일가를 만나기도 했던, 당시 꽤 이름난 작가였다고 한다. 둘은 서로에게 오아시스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마르코 폴로는 책을 시작하며 자기가 보거나 진실되게 들은 갖가지 놀라운 것들을 글로 쓰게 하지 않음으로써 그러한 것을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게 내버려둔다면, 너무나 커다란 죄악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고 저술동기를 밝히고 있지만, 나는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내내 ‘자신이 보고 들은 실상을 믿어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원망’이 보였다. 폴로는 자신이 받는 오해의 원인을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탓으로 제대로 표현을 해 낼 수 없기 때문이라 진단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때 때마침 당대의 탁월한 문장가인 루스티겔로를 만나 자신의 모험을 생생히 복원하는데 성공하였으니, 당시 폴로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집필에 임하였을지 족히 짐작이 간다.

여행기라기보다는 편람처럼 느껴질 만큼 개인적인 감상을 의도적으로 자제하고 있는 것도 ‘허풍장이’라는 오해를 씻기 위한 일종의 장치였을지도 모르겠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표현하여 사실성을 높이고 싶었을테니 말이다.

<세계의 서술(Divisament dou Monde) : 동방견문록> 저술 이후 폴로의 삶

저술이 끝난 1299년부터 1934년 사망하기까지 25년간의 행적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 가운데 전해지는 일화가 있다. 마르코 폴로가 임종을 앞두고 누워 있을 때다. 그의 임종을 보기 위해 온 친구들은 마르코 폴로에게, 이제라도 <세계의 서술>에서 했던 엄청난 거짓들에 대해 참회하라고 권했다. 친구들조차도 그의 이야기를 믿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마르코 폴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었는지 충분히 짐작하게 해주는 일화다. 마르코 폴로는 단호하게 “나는 아직 내가 본 것의 절반도 이야기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는 결국 끝까지 오해를 풀지 못했다. 그가 전해주는 이야기는 지금 우리의 눈으로도 믿기 어려운 부분이 있으니, 다른 문명에 대해 거의 완전한 무지, 기독교적인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맹신이 관념의 세계를 지배하던 14세기 유럽인들에게 그의 기록은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자신도 모르게 체득하게 된 유연한 태도와 통찰 역시 그를 사회의 가장자리로 내 몰았을 것이다. 너무나 많은 것을 보고 들어버린 그는 어쩔 수 없는 또 한명의 부적응자였던 것이다.

그의 사후 <세계의 서술>은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미지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욕을 자극했을 뿐 아니라 7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꾸준히 읽힐 만큼 세계적인 고전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의문을 떨칠 수가 없다. 그는 행복했을까?


2. 작가 연습생의 시선

명실상부한 세계적 고전. 좋은 얘기는 충분히 들었을 게다. 아쉬운 부분을 중심으로 간단히 코멘트하겠다.

첫째, 다양한 문화와 관습에 대한 서술이 지나치게 흥미위주로 표피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 어떤 곳에서는 당연한 관습이 공간이동을 거치면 용납되지 않는 터부로 변신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자신도 모르게 취해있는 아집이 있지는 않은가 되돌아 볼 수 있어 참 좋긴 했다. 하지만 왜 그렇게 되었는가 생각해보면 현란한 차이의 스팩트럼을 관통하는 동질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렇다면 책의 품격이 '쇼킹 아시아'수준을 벗어나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할 수 있지 않았을까? 무리한 욕심인 것을 인정하나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둘째 역자는 생생한 현장감을 주는 장치라고 미화했지만 끊임없이 삽입된 ‘여러분은 알아야 할 것이다.’ 등의 대화체 표현은 뭔가를 무리하게 설득하려는 인상을 줌으로써 불필요한 거부감을 일으킨다. 그의 답답함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나 기술적인 측면에서 좀 다듬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표현의 방식이 지금과 달랐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아는데, 모르는 너희들에게 설명하려니 답답하다.’하는 그의 우월감이 여과없이 드러나고 있는 것 같아, 위대한 탐험가 ‘마르코 폴로’라는 브랜드 파워가 영향을 미치지 못한 당시 사람들 입장에서는 상당히 빈정상하는 글이 아니었을까? 걱정이 된다.

셋째, 편집자에게 바라는 글. 삽화․지도 등 시각적인 장치를 동원해 이해를 도우려는 시도를 읽을 수 있으나 흡족한 수준은 아니었다. 특히 지도가 아쉽다. 21세기의 독자들을 위해 현재의 지명을 함께 표시해주었더라면 좀 더 편하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조금 더 욕심내자면 쳅터가 시작하는 부분에 그 지역의 확대지도를 넣고, 지명옆에 장번호를 표시해주었더라면 이해가 훨씬 쉬웠을 것 같다. 현대의 지명과 정확히 매치시키기 어려워 오히려 혼란을 줄 수 있다는 생각도 있을 수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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