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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머리 앤

[도서] 빨강 머리 앤

루시 모드 몽고메리 저/박혜원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앤을 사랑하게 된 것은 서른을 조금 넘겼을 때였다.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 으로 시작하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벚꽃 휘날리는 배경에서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뜨며, 환하게 웃으며 빙글빙글 돌아가던 소녀를 기억한다.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빨강머리 앤'은 재밌었지만, 학생 때 읽었던 소설 앤은 큰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책 사는데 월급의 반은 쓸 때였다. 그렇게 내 손에 앤 시리즈가 들어왔다. 어른이 되어 읽은 앤은 왜 이렇게 즐겁던지, 전 시리즈 중에서 1권부터 3권까지는 읽고 또 읽었다. 1권은 언제나 최고였고, 2권은 내 직업때문에 떠오르는 게 많다. 그리고 내가 남편의 고백을 받았을 때가 3권 레드먼드의 앤을 읽은 직후가 아니었다면, 과연 나는 그에게 어떻게 대답했을지 가끔 궁금해진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고 했던가. 그 뒤로 나는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고, 길렀다. 그때마다 앤은 같이 나이를 먹으며 결혼을 했고, 아기를 낳았고, 아이들을 키웠다. 앤의 아이들이 다 자란 것까지 봤으니 앤의 세월은 나보다 훨씬 빠르지만, 앤의 삶이 단순히 스쳐지나가지 않는 것은 마치 내 삶을 미리보는 것 같다고 느끼는 착각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1권, 앤을 읽었다. 앤을 읽을 때마다 나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이성은 저 뒤에 내려놓고 휘몰아치는 여러 색깔의 감정들에 푹, 몸을 던지고 만다. 귓가에는 까르르 웃음소리가 맴돌고, 눈가는 촉촉해져서 한 번씩 눈물을 쏟고, 어떨 때는 저린 가슴에 주먹을 움켜쥐기도 하고, 책을 덮고 나서는 잔상과 여운으로 멍하니 자리에 앉아서 손가락만 두드린다. 그러나 오늘은 내가 왜 앤을 좋아하는지, 이 책을 사랑하는 이유에 대해, 내려놓은 이성을 억지로 머릿속에 구겨놓고 어떻게든 생각을 정리해본다.



1. 앤, 사랑받고 싶은 유년의 기억


 초록 지붕 집에 오기까지 앤의 인생은 비참하다. 기억도 못할 정도로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남의 집을 전전하며 그 집 애들을 돌보고, 그렇게 눈칫밥을 먹다가 결국은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아이. 앤은 누구도 원하지 않는 존재였다. 앤이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나 웃음이 많고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로 자랐다면 <빨강 머리 앤>이 그렇게 마음에 남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앤의 상상력은 외롭고 힘든 현실을 버티기 위한 수단이다. 앤은 이야기를 나눌 친구조차 없어서 유리에 비친 자식의 모습이나 골짜기의 메아리에 이름을 붙여 친구를 삼았다. 자신의 이름을 코딜리어라고 불러줄 수 있는지 묻거나, 아니면 끝에 e가 붙는 앤으로 불러달라고 엉뚱한 요청을 한다.


 나는 앤처럼 힘들게 살지는 않았다.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셨는데, 늘 바쁘셨고 말이나 포옹보다는 깨끗한 옷을 입히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이는 것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분들이었다. 어렸을 때, 앤과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다. 우리집에 내 자리는 없는 것 같은 불안, 나를 키우는 것이 부모님에게 짐이 되거나 그저 의무는 아닐까하는 부담과 죄책감. 나는 무력한 존재이고 내게는 선택권이 없으며, 언제나 불안한 손가락을 말아쥐고는 잠자코 누군가의 결정을 기다려야 했다. 나는 어렸고, 할 수 있는 것은 책 속 세계를 탐험하거나 잠들기 전 이불 위에서 상상하는 것이었다. 상상 속에서는 '내'가 선택하고 결정하며, 나는 '특별하다'. 앤을 읽다보며 자꾸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오른다.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존재하고 싶던 나. 앤이 슬픈 과거를 딛고, 초록 지붕 집에서 둠뿍 사랑을 받는 모습은 어린 시절의 나를 한 번 꼬옥 안아주는 것 같다.


 앤이 자신의 외모를 눈 앞에서 흉보는 린드 부인 앞에서 발을 쿵, 쿵 구르며 화를 내는 모습이나, 존경받는 목사님과 집사님의 설교에 대해 거침없이 재미없다고 평하는 모습을 보면, 요즘 말로 사이다를 마신 것처럼 속이 다 시원하다. 내가 아이였을 때 마치 내가 투명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나를 화제로 어른들이 말씀을 나누시는 걸 가만히 듣고만 있어야 했던 게 떠올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제가 어른이 되면 여자아이들을 늘 어른처럼 대해줄 거예요. 아이들이 과장되게 말해도 절대 웃지 않을 거고요. 제가 슬픈 일을 겪어 보니 그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알겠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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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강 머리 앤> 속의 어른들은 하나같이 착하다. 현실 세계 속 어른들과 비슷한 인물들이 수두룩하면서도 아이가 바라는 어른의 모습을 보여준다. 할 말, 못할 말 가리지 않고 내뱉는 린드 부인은 상대가 어린아이지만, 자신이 잘못했다고 시인한다. 앨런 부인은 크게 실수한 앤을 토닥이며 자신을 생각하며 노력한 마음만으로도 고맙다고 토닥인다. 그리고 마릴라와 매슈.......


 마릴라와 매슈는 이상적인 부모의 모습이다. 매슈 아저씨는 아이의 모든 것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칭찬을 입에서 내려놓지 않는다. 아이가 좋아하는 초콜렛이나 예쁜 옷을 사주고, 언제나 네가 1등이라며 네가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매슈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아이가 앞으로 힘껏 나아갈 수 있도록 굳세게 지지하는 바탕이 된다. 마릴라 아주머니는 사랑을 잘 표현하지는 못한다고 하면서도 남들 앞에서 당당하게 내 아이 편을 들어주고, 널 데려온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아이의 눈물젖은 뺨에 입을 맞춘다.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내가 듣고 싶은 말들을 해주고, 내가 받고 싶던 사랑을 표현한다.



 둘은 가장 좋은 친구였다. 매슈는 앤의 교육을 맡지 않은 행운에 수없이 감사했다. 교육은 오로지 마릴라의 몫이었다. 만약 매슈가 앤의 교육을 맡았다면 앤의 바람을 들어주고 싶은 마음과 의무감 사이에서 매번 갈등하며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앤을 교육할 의무가 없으므로, 마릴라의 표현대로 하면 매슈는 마음껏 앤의 '버릇을 망쳐놨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게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작은 '칭찬'이 때로는 세상에서 가장 충실한 '교육'만큼이나 좋은 효과를 내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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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낭만을 다 버리진 마라, 앤. 낭만이 조금 있는 건 좋은 거란다. 물론 너무 많으면 곤란하지. 하지만 조금은 남겨두렴. 조금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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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다. 남자아이 열두 명을 준대도 너와 바꾸지 않을 게야, 앤. 잊지 마라. 남자아이 열둘보다 네가 나아. 에이버리 장학생이 남자아이는 아니었지, 아마 여자아이였는데, 우리 딸, 자랑스러운 내 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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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앤이 끝까지 지키고 싶어한 '초록 지붕 집' 역시 건물의 아름다움보다는 어린 시절 사랑받고 사랑했던 기억이 가득한 '집', 언제나 돌아가고 싶은 공간으로서 역할을 다한다. 애니메이션이 성공하여 '빨강 머리 앤(빨간 머리 앤)'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졌고, 국내 번역서들은 대체로 같은 제목으로 출판되었지만, 원래 이 책의 제목은 '초록 지붕의 앤(Anne of Green Gables)'이다.


 요즘 강조하는 '자존감'이라는 용어가 앤에게는 맞춤옷처럼 들어맞는다. 앤은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하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초록 지붕 집에서 앤은 마음껏 상상하고 하고 싶은 것들은 열정적으로 도전했으며, 엉망으로 실패하고 영광스럽게 성공했다. 그리고 칭찬하고 벌을 주든 언제나 앤의 곁에는 마릴라와 매슈가 함께 있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앤을 보며 나도 나 자신을 다시 한 번 다독인다.
 
 우린 부자야, 봐. 우린 열여섯 해를 잘 살아왔고, 여왕처럼 행복하잖아. 또 모두 많든 적든 상상력이 있잖아. 저 바다를 봐, 얘들아, 온통 은빛에 그림자와 보이지 않는 온갖 것들로 가득해. 우리에게 수백만 달러가 있고 다이아몬드로 휘감는다고 해도 지금 같은 이런 아름다움을 누릴 수 없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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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쎄. 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평생 다이아몬드로 위로받지 못한다 해도 말이야. 나는 진주 목걸이를 한 초록 지붕 집의 앤에 아주 만족해. 매슈 아저씨가 이 목걸이에 담아 주신 사랑이 분홍 드레스 아주머니의 보석 못지않다는 걸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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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마릴라, 부모가 되어가는 길


 매슈의 앤에 향한 사랑도 크고 따스하지만, 어른이 되어 읽은 <빨강 머리 앤>은 마릴라의 사랑에 더 가슴이 저릿하다. 아이를 바르게 키워야 한다는 의무감에 엄하게 키우면서도, 아이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커져서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은 우리 엄마가 떠오르고, 아기 엄마가 된 나처럼 느껴진다.



 '아'를 연발하던 앤이 마릴라의 품에 뛰어들더니 뛸 듯이 기뻐하며 윤기 없는 마릴라의 뺨에 마구 입을 맞추었다. 어린아이가 먼저 다가와 마릴라의 얼굴에 입을 맞춘 것은 평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놀랍도록 따뜻한 기분이 마릴라의 가슴에 순식간에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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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리 씨가 양팔로 앤을 안은 모습과 앤이 배리 씨의 어깨에 힘없이 머리를 기댄 모습도 보였다
 그 순간 마릴라는 불현듯 깨달았다.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두려움 속에서 앤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앤을 좋아한다는 것은, 아니, 앤을 정말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비탈길을 정신없이 뛰어 내려가면서 마릴라는 앤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327~328

 


 아기를 낳고, 우리 아기가 나를 보고 웃어주던 날이 떠오른다. 내 둘째 손가락을 꼭 쥐던 그 작은 손도. 따뜻한 온기는 눈물이 나게 감격스러웠다. 너무도 작고 한없이 연약해서 너를 꼭 지켜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너는 어느새 걸음을 뗐고, 햇빛에 그을린 얼굴로 하하 웃고, 밖으로 나가자고 내 손을 잡아끈다. 아무리 지키려고 해도 네 무릎에는 작은 생채기가 끊이지 않는다. 작아진 신발을 바꿔야 하고, 그렇게 너는 내 작은 세상 밖으로 자꾸만 걸어나간다.  천방지축이던 앤이 어엿한 숙녀로 성장하고, 마릴라가 이를 아쉬워하는 모습은 아이를 떠나보내는 미래를 보는 것만 같아서 눈물을 펑펑 쏟고 말았다.



 


 어릴 적 모습이 생각났을 뿐이란다, 앤. 그렇게 엉뚱한 짓들을 벌여도 좋으니 어린아이로 남아 있으면 좋겠구나.
472

 


 반면 마릴라는 하지 않아도 될 일들에 무섭게 달려들어 하루 종일 몸을 혹사하며 더없이 쓰라린 가슴앓이를 했다. 가슴이 타들어가고 쥐어뜯기는 것 같은 고통이 꾹 참고 있던 눈물로도 달래지지 않았다. 그러다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 즈음, 복도 끝 작은 다락방에 생기발랄한 어린 주인도, 부드러운 숨결도 더는 없다는 사실이 절절하게 와 닿자 베개에 얼굴을 묻고 격한 울음을 터뜨렸다. 마음이 조금 가라앉자 죄 많은 같은 인간에게 이토록 집착하다니 얼마나 죄인가 하는 생각에 오싹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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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시에 나이든 엄마가 떠올라서 더 눈물이 났다. 예전에는 새치 머리를 하나씩 뽑아달라고 했는데, 어느날부터인가 염색을 시작한 우리 엄마. 손을 잡고 걸으면 거칠어진 딸의 손이 못내 아까워 연신 만지작거리는 우리 엄마. 엄마의 마음도 이랬을까. 미처 표현하지 못한 사랑들이 엄마 안에 더 묻어있겠지. 앤은 우리 '엄마'와 '엄마'가 된 나를 떠오르게한다.


 앞에서 매슈와 마릴라가 이상적인 부모라고 말한 것처럼 앤 역시 이상적인 자식의 모습을 보여준다. 앤은 실수투성이지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성장한다. 1등을 기대하는 부모에게 부담을 느끼기보다 기대에 부응하겠다는 강한 동기를 느끼며 열심히 노력하여 실제로 1등을 차지한다. 예쁘다 할 수 없던 얼굴은 점차 아름다워지고, 어떤 상황에서도 기죽지 않고 밝고 명랑한 모습으로 주변을 즐겁게 한다. 독립적인 인간으로 잘 자라 야망은 있지만 늘 집을 그리워한다. 아니, 이렇게 완벽하다니!


 그러나 내 자식이 앤처럼 자라지 않는다면 마릴라와 매슈처럼 대하지 못한 자신을 반성할 일이지, 아이를 잡지는 말아야겠다. 설령 그들처럼 키웠다고 해도 린드부인 말처럼 아이들은 모두 다 제각각이고 부모 마음대로 자라지 않는다. 내 아이가 커서 이렇게 말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 멋진 시간이었어요. 제 평생의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좋았던 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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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머니! 전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요. 정말이에요. 그저 불필요한 가지를 치고 새 가지를 뻗었을 뿐이에요. 진짜 제 모습은, 제 안의 저는 똑같아요. 제가 어디를 가든, 겉모습이 어떻게 바뀌든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마음속에는 언제나 아주머니의 어린 앤이 있어요. 평생토록 마릴라 아주머니와 매슈 아저씨와 초록 지붕 집을 날마다 더 사랑할 앤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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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삶, 아름답고 기대되는 길모퉁이


 다른 서양 고전처럼 <빨강 머리 앤>도 기독교 사상이 바탕에 깔려있다. 에이번리 마을에는 하느님께서 주신 자신의 몫을 해내기 위해 하루하루를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나오며, 교회에 가지 않거나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그러나 종교가 없는 사람이 읽어도 전혀 부담이 없는 이유는 시대적 배경이 그렇다고 넘기는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 삶에 대한 경탄과 이를 감사할 줄 마음, 그 자체가 믿음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앤은 천상병 시인의 시처럼 이 세상으로 소풍을 온 소녀같다. 삶을 즐거워하는 앤을 보면서 내가 살면서 놓쳤던 작은 것을 돌아보고 감사한다. 풀잎에 맺힌 빗방울을 보고 안녕, 하고 인사도 해보고, 탐스러운 장미꽃 한 송이에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웃어도 본다. 아무리 힘든 일이 생겨도 그 다음에 올 것을 기대하며 힘차게 삶을 걸어나가는 앤을 보면서 힘을 얻기도 한다. 길모퉁이를 만나면 당황하지 말아야겠다. 잠시 멈춰서 상상해야지. 어떤 꽃이 피어있을까, 어떤 나무를 만날까.



 앞으로 알아야 할 온갖 것을 생각하면 신나지 않으세요? 그럼 살아 있다는 게 정말 즐겁게 느껴지거든요. 세상에는 흥미로운 일이 가득하잖아요. 만약 우리가 모르는 게 없이 다 알고 있다면 재미가 반으로 뚝 줄어버릴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상상할 여지가 없잖아요.
38


 여기서 최선을 다해 살면 그에 따른 대가가 주어지리라 믿어요. 퀸스를 졸업할 땐 미래가 곧은길처럼 제 앞에 뻗어 있는 것 같았어요. 그 길을 따라가면 중요한 이정표들을 수없이 만날 것 같았죠. 그런데 걷다 보니 길모퉁이에 이르렀어요. 모퉁이를 돌면 뭐가 있을지 모르지만, 전 가장 좋은 게 있다고 믿을래요. 길모퉁이에도 나름의 매력이 있어요, 아주머니. 모퉁이 너머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궁금하거든요. 어떤 초록빛 영광과 다채로운 빛과 그림자가 기다릴지, 어떤 새로운 풍경이 펼쳐질지, 어떤 새로운 아름다움과 마주칠지, 어떤 굽잇길과 언덕과 계곡들이 나타날지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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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퀸스에서 돌아와 창가에 앉았던 그날 밤 이후로 앤 앞에 놓인 미래의 지평선이 좁아졌다. 하지만 발 앞에 놓인 길이 좁아진다 해도, 앤은 그 길을 따라 잔잔한 행복의 꽃이 피어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진실한 노력과 훌륭한 포부와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있다는 기쁨이 앤에게 깃들었다. 그 무엇도 타고난 앤의 상상력과 꿈이 가득한 이상 세계를 빼앗을 수 없었다. 그리고 길에는 언제나 모퉁이가 있었다!
524



 <빨강 머리 앤>에는 작은 재미들이 곳곳에 가득하다. 매일 미세먼지 수치를 확인하는 회색 도시 사람으로서 에이번리 마을의 풍경은 묘사된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눈에 초록초록 휴식을 준다. 몽고메리 여사의 꽃과 나무 묘사는 너무도 아름다워서 '기쁨의 하얀 길'이나 '반짝이는 호수', '눈의 여왕'을 보러 캐나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 가는 비행기표라도 결제하고 싶게 만든다. 공상에 빠져 엄청난 수식어를 남발하는 앤과 냉정하게 현실을 말하는 마릴라의 만담은 각 장마다 반복되는데, 두 사람의 대조적인 모습에 절로 웃음이 터져나온다. 말수 적은 매슈 아저씨가 '앤을 보내줘야한다고 생각한다'는 말은 뚝심있게 반복하는 장면 역시 미소를 짓게 한다. 키 크고 잘생기고 공부 잘 하는 길버트 블라이드와의 경쟁과 우정은 어떠한가. 밥상에서도 낭만찾는 앤처럼 애 엄마의 볼을 발그스레 물들이며 '낭만적이야, 꺅! 길버트!'를 외치게 만든다. 가뭄에 콩 나듯이 등장하는 길버트 블라이드는 그 비싼 출연료에 걸맞게 2권, 3권을 읽게 만드는 흥행 보증수표다.

 

그러나.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뭔가 중요한 의미를 찾아 분석할 필요없이 그저 재미있다. 읽다보면 행복해진다.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고 내가 살아있어서 감사하다. 그것이 내가 앤을 읽는 이유다.


정든 세상아, 정말 아름답구나. 내가 네 안에 살아 있다는 게 기뻐.
522

 

 

 

덧. 빨강 머리 앤 전시회에서 더모던 출판사의 <빨강 머리 앤>을 구입했는데, 애니메이션 그림으로 삽화가 들어가 있어서 추억이 퐁퐁 샘솟았다. 보기만 해도 흐뭇해진다. 겉표지도 귀엽지만 속표지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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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네토이사오

    빨강머리앤 프랑스계 캐나다인의.소설

    2019.09.19 23:04 댓글쓰기
    • 보통사람

      프랑스계인지는 처음 알았네요.

      2019.09.20 12:53
  • 부자

    우와~빨강머리 앤은 언제 어디서 만나든 기분이 좋습니다.
    추석연휴 우수 리뷰 이벤트에 선정되신것 축하드립니다.

    2019.09.20 10:10 댓글쓰기
    • 보통사람

      고맙습니다.
      빨강머리 앤은 언제 어디서 만나든 좋다는 말씀에 저도 동감합니다. 읽을 때마다 행복해지는 책이에요.

      2019.09.20 12:54
  • 베레니체

    좋은 리뷰 나누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받고 싶어하는 앤의 모습을 읽고 울컥했습니다. 요즘 앤을 읽으며 다시 앤을 조명하게 되고 앤이 보여주는 모습에 생각도 달리 하게 되고 같이 성장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도 같이 앤이 가진 매력을 늘 탐색하고 싶네요. 메마른 인생에 기름칠해주는 행복한 벗을 만난 것 같습니다...

    2019.10.12 22:13 댓글쓰기
    • 보통사람

      고맙습니다.
      매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아침을 기다리는 앤의 모습에서 힘을 얻고, 계속 슬퍼하기에는 세상이 너무 재밌다는 앤도 귀여웠습니다. 반복되는 일상에 어제같은 오늘인 것처럼 오늘같은 내일이겠지하며 살다가 오랜만에, 삶의 즐거움을 다시 발견한 느낌이라 즐겁게 읽었습니다.

      2019.10.18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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