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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신사

[도서] 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올스 저/서창렬 역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5점


 

 

비신스키: 직업은?

로스토프: 직업을 갖는 것은 신사의 일이 아닙니다.

비신스키: 좋아요. 그럼 당신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죠?

로스토프: 식사와 토론. 독서와 사색. 일상적인 잡다한 일들.

비신스키: 시도 쓰죠?

로스토프: 나는 깃펜으로 펜싱을 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2017년 미국 전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감명 깊게 읽은 책 11위 안에 드는 책이라 소개했고, 2019년에는 빌 게이츠가 여름 추천 도서로 선정을 했던 <모스크바의 신사>는 미국 보스턴 출신의 작가 에이모 토울스의 두 번째 장편소설이다. 20세기 초 볼셰비키 혁명 이후 소비에트 러시아가 시대적 배경이며 모스크바 메트로폴 호텔이라는 제한적 배경이 주 무대이다. 주인공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은 로마노프 왕조가 몰락하자 인민위원회 소속 긴급 위원회 재판을 받게 되고, 혁명에 동조하는 시를 썼다는 이유로 총살은 면하지만 호텔 바깥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종신연금형을 받게 된다. 그는 4년 동안 머무르던 메트로폴 호텔 스위트룸에서 하인들이 쓰는 6층 창고 방으로 최소한의 물건만 지닌 채 거쳐를 옮겨 생활하게 되었고 자신의 모든 재산은 국가로부터 환수되고 누려왔던 특혜들은 모조리 반납을 하게 된다. 그러나 호텔 내부자들에게는 백작은 지위만큼의 위엄을 인정해 주고 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동일한 결과에 도달한다

우리에게 원한을 품어 언제든 복수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굴복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동정과 연민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그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방법으로―

대담하고 단호한 태도를 취하는 것도 때로는 같은 효과를 낸다……

 

 

백작이 새로운 거처에서 읽기 시작한 몽테뉴의 <수상록>의 일부분을 에이모 토울스는 인용한다. <모스크바의 신사>를 처음 읽을 당시 포스트잇으로 붙여 놓았긴 했지만 완독 후 리뷰 작성을 위해 훑어 내려가는 과정에서 로스토프 백작의 깊은 의중이 여기에 함축이 되어있으며 결말 또한 예측 가능한 복선 구실을 하는 문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블록을 다 차지할 만큼 큰 규모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메트로폴 호텔의 식당과 스위트룸들은 영향력 있고 학식 높은 사람들의 모임 장소였다. 로스토프 백작은 이 모든 시설을 자유롭게 이용했으며 비록 스위트룸에서는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지만 6층 작은방 붙박이 옷장 너머에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곳을 서재로 만든다. 타인의 통재와 관리 아래에 존재하는 방보다 상상만큼 넓어 보이는 비밀스러운 그런 서재였다. 호텔의 귀족 식당 보야르스키와 모든 부류의 러시아인이 찾는 식당 피아차를 오가며 자신만의 루틴을 만들어 가는 백작의 모습에서 불안이라는 요소는 전혀 그의 삶에 방해가 되지 않는듯하다. 때때로 백작은 철학적 새색도 서슴지 않는다. 스토아 철학의 금욕주의를 시작으로 회의주의 그리고 에피쿠로스 철학의 쾌락주의적 사고를 거쳐 집필 된 몽테뉴의 <수상록>을 지극히 좋아했던, 스토아학파 몽테뉴를 신봉했던 백작의 아버지로부터 가랑비에 옷 젖듯 철학적 사유를 깊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었던 것일까? 부모님을 콜레라로 여의고 홀로 남은 백작의 후견인(아버지와 함께 군 복무를 했던, 네 가지 언어를 말하고 여섯 가지 언어를 읽을 줄 알았던) 데미도프 대공이 말해 준 '인간은 자신의 환경을 지배해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그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라는 말처럼 그는 메트로폴 호텔을 격변하는 거대한 러시아의 소우주이자 현실적인 삶의 현장으로 덤덤히 받아들인다.

 

 

니나가 호텔에 있는 동안 벽은 안으로 좁혀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영역과 복잡성이 모두 확대되면서 밖으로 팽창했다.

니나가 이곳에 온 지 첫 주가 지났을 때

호텔은 두 구역의 삶을 포괄할 정도로 팽창했다.

첫 달이 지났을 때는 모스크바의 절반을 아우를 정도로 팽창했다.

만약 니나가 이 호텔에서 충분히 오래 지낸다면 호텔은 러시아 전체가 될 것이다.

 

 

니나의 존재가 로스토프 백작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백작의 빼앗긴 자유로 인해 숨통을 죄어오던 호텔이 그에게는 러시아만큼의 광활한 세상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셈이다. 어린 숙녀 니나와의 인연을 통해 백작은 호텔 구석구석의 몰랐던 공간들을 찾아 모험을 하게 되고 둘은 친구가 되어간다. 특히 백작은 자신이 수년간 머물렀던 메트로폴 호텔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 니나와 비교했을 때 풋내기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니나에게 호텔 지하실부터 세밀하게 교육을 받는다. 불치하문(不恥下問 ), 삼인행 필유아사(三人行 必有我師 )라는 공자 님의 말씀처럼 배움에는 아래위가 없듯 겸손하고 신사적인 로스토프 백작의 태도가 무척 멋있었다. 어린 나이답지 않게 백작에게 툭 하고 한마디씩 던지는 니나의 언중유골은 또 어떠한가? 백작은 자신의 할머니의 오페라글라스를 니나에게 선물하고 니나는 호텔의 마스터키를 그에게 남긴 채 떠난다.

 

 

백작은 순순히 스푼을 입에 넣었다.

곧장 신선한 꿀의 익숙한 달콤함이 입안에 고였다.

햇빛, 황금색, 즐거움을 나타내는 꿀의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백작은 계절이 이맘때임 것을 감안하면 이 첫 느낌에 이어

알렉산드롭스키 정원의 라일락이나 사도보예 환상 도로의

벚꽃을 암시하는 향이 뒤따를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영험한 묘약 같은 벌꿀이

그의 혀에서 녹자 백작은 전혀 다른 어떤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 꿀을 모스크바 중심부의 꽃나무가 아니라

풀이 무성한 강둑과 ……여름날 산들바람의 흔적과 ……

퍼걸러의 아늑함…… 등을 떠올리게 했다.

무엇보다도 그 꿀에는 꽃이 만발한

수많은 사과나무를 암시하는 또렷한 향이 있었다.

아브람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니즈니노브고드" 아브람이 말했다.

 

 

호텔 내 술집 샬라핀에서 로스토프 백작은 영국인과 독일인이 러시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고 독일인이 러시아가 서구에 기여한 바는 보드카의 발명뿐이라며 이 술집에서 러시아가 서구에 기여한 다른 세 가지를 이야기하면 보드카를 한 잔 사겠다고 이야기한다. 보드카를 즐기지 않지만 로스토프는 당당히 체호프와 톨스토이, 호두까기 인형 1막 1장, 그리고 블린과 사워크림을 곁들인 캐비아라고 친절히 설명까지 첨언한다. 이러한 백작의 해박한 지식과 뛰어난 사교성과 입담에 또 한 번 신사의 품격을 느끼면서 타국에서 온 사람들이 나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과연 단답형이 아닌 반박의 여지가 없을 정도의 예를 설명해 가며 이야기할 수 있을까 싶었다. 여동생의 기일에 지붕의 난간 가장자리에 서서 자살을 시도하려 하지만 사과 꿀 한 스푼은 고향에 대한 향수를 충분히 불러일으켰고 삶의 또 다른 목적을 조성시키는 도구가 되었다. 백작은 안나라는 여배우와의 비밀연애도 하고 볼셰비키 고위 간부의 개인교사로, 보야르스키 식당 웨이터 주임으로 일을 하게 되고 주방장 에밀과 매니저 안드레이와 친분을 쌓으며 신사다운 면모를 유지한다. 니나는 결혼을 한 채 호텔에 다시 나타난다. 그녀는 공산당원이 되어있다. 딸 소피야를 백작에게 맡긴 채 남편을 찾으러 떠나고 오랜 시간 돌아오지 않자 백작은 소피야를 지극 정성으로 보살피며 아빠로 자처한다. 소피야 또한 니나만큼 매력적이고 밝고 영민한 인물이었다. 백작과의 찾기 게임이나 말놀이는 소피야가 얼마나 영민한지 보여주는 좋은 예다.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작가 동맹 소속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백작의 오랜 친구 미시카와 샬라핀에서 만난 리처드 밴더와일 부부, 당 간부인 오시프 등 이들은 모두 호텔 외부와의 단절에서 그를 해방시켜줄 수 있었던 인물들이었다.

 

 

아빠, 내 무덤에 흙을 덮을 때,

참새들이 찾아올 수 있도록 빵 껍질을 부숴서 뿌려주세요.

그러면 참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듣게 될 테고,

혼자 누워 있는 게 아니니까 기쁠 거예요.

 

 

미시카와 그의 부인 카테리나에게는 무한한 연민이 느껴졌다. 미시카의 유품에서 나온 '빵과 소금'이라는 제목의 책과 백작과 미시카가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이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떠올랐다. 그가 남긴 책 속에는 성경, 고골의 <코>, 이반 투르게네프의 <사냥꾼 일기>,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백치><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대심문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등의 책 속에 '빵'과 관련된 인용구가 가득 적혀 있었다. 마지막으로 인용된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일류셰치카라는 어린아이의 일화를 읽고 로스토프 백작은 슬픔을 억누르지 못한다. 세상의 불공정함에도 세상을 원망하지 않던 미시카와 백작 자신이 일류셰치카에게 오버랩 되었기 때문이다. 나 또한 감정이입이 되어 코끝이 찡해지는 장면이었다.

 

후반부로 갈수록 백작이 도대체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걸까?라는 의문이 들도록 만들다가 결국 '아!'라는 감탄사를 이끌어내는 이야기 방식과 반전이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다. 작가가 4년에 걸쳐 집필을 했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소설책이라고 이르기보다는 러시아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문학, 음악, 음식, 예절 등을 고스란히 담은 한 권의 지식서 라 이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러시아 작품에서 볼 수 있었던 '결투' 장면이 실제로 1900년대에는 아주 사소한, 째려보았다는 이유만으로도 행해졌고 모욕한 사람과 모욕 받은 사람이 총을 쏘기 전에 걸어가는 걸음의 수는 모욕의 강도에 반비례하는 결투 규약이 있었단다. 메트로폴 호텔 지하 와인 저장고에 있는 고급 와인들 병에 라벨을 모두 떼어버린 장면은 제정 러시아의 몰락으로 인해 사회주의 국가로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볼 수 있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레스토랑의 음식과 어울리는 각종 와인에 대해서도 백작의 입을 빌려 장황히 늘어놓는다. 책을 읽다가 역사, 문화등 이것저것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소피야의 쇼팽의 야상곡 연주도, 리처드의 권유로 집어 든 레코드 음반인 호로비츠가 카네기 홀에서 연주한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도, 책을 읽으며 함께 들으며 나도 백작과 그곳에 함께 머무르는 것처럼 상상해 보기도 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생이란 신이 연출하는 한편의 연극 같은 것". 자신의 삶을 누군가에게 이끌려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살아간 로스토프 백작은 신이 부여한 자신의 배역을 멋지게 연기해 낸 것이리라. 그의 긍정적인 마인드가 주위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기에 충분했고 자기 사람으로 만든 그 사람들을 통해 기적을 이루어 낸 것은 아닐까? 이 책을 집어 들기 전 기대감이 상당했다. 그런데 앞부분 조금 읽다가 실망그러웁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어느 순간 책에 훅 하고 몰입이 되면서 특정한 책을 읽을 때만 느끼는 황홀경에 빠질 수 있었다. 그동안 내가 너무 구어체와 불친절한 책들에 길들여져 있기도 하거니와 챕터마다 수많은 물음표를 던지는 생각의 굴레를 즐기는 나로서는 이 책이 주는 친절함 속에 숨어있는 책의 진가를 단번에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아마 나와 비슷한 독자도 있지 않을까 싶다. 아들에게 꼭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기도 하고 언젠가 독서토론을 꼭 해 보고 싶은 책이라 소장하려 한다. 리뷰 마무리하려니 아직 못다 한 말이 너무나 많다. 시계 이야기, 단추 이야기, 백작의 애꾸눈 고양이 쿠투조프 이야기, 영화 카사블랑카 이야기도 해야하는데 말이다. 늘 리뷰는 이리도 마무리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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