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리뷰 [아들의 밤] 날씨가 추우면 소리가 더 커질까
내가 어른이 되면 우리는 기차를 타고 떠날 것이다. 되도록 아주 멀리. 창문으로 언덕과 마을 그리고 호수를 바라보며 낯선 나라에서 온 사람들에게 말을 건넬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함께 있을 것이며 영원히 우리의 길을 갈 것이다. (4쪽)
소설 맨 앞장에 있는 이 문장들이 무슨 의미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마지막 장을 펼쳤을 때 비로소 수미상관 구조처럼 맞아 떨어진다. 여기서 '우리'를 얘기하는 화자가 누구인지 명확해진다.
그녀는 종종 두꺼운 타이츠 위에 하나를 더 껴입고 출근한 뒤 화장실에서 벗었다. 대충 입고 다니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았다. 차라리 춥고 말지. (16쪽)
그녀는 물이 거의 찰 때까지 기다렸다가 수도꼭지를 잠그고 욕조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목욕물이 옆구리 쪽으로 철벅거리며 넘쳐흘렀다. 피부에 소름이 돋고 젖꼭지가 단단해졌으며 간지러운 느낌이 등골을 타고 내려갔다. 그녀는 부드럽게 몸을 숙였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글 때의 황홀한 기쁨이라니. 그녀는 생각했다. 그것은 가장 큰 행복이었다. (34-35쪽)
<아들의 밤>에서 그녀(욘의 엄마, 비베케)의 시간은, 오로지 이렇게 자기 방식대로 마치 황홀한 어떤 경험처럼 흘러간다. 어린 아들 욘의 시간하고는 접점이 있는 듯 없는 듯, 따로 또 같이 흐른다. 그런 기류에서 묘한 긴장감이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종착역까지 다다를 때는 살짝 허무한 느낌마저 들기도 하지만.
이렇게 엄마와 아들 두 사람 각자만의 시간이 불쑥불쑥 교차되면서, 어마어마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까 기대하게 한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생일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내일이면 아홉 살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기다릴 수 있다고 자신에게 말했다. 더구나 그녀는 지금 자고 있지 않은가. 그녀의 무릎에 놓인 책. 그런 모습은 그에게 익숙했다. (12쪽)
책과 거실 바닥, 엄마의 자는 모습. 아홉 살 정도의 어린 아들, 욘에게 매우 익숙한 엄마의 모습. 아들 욘은 그런 엄마의 자는 모습과 지친 모습에서 어떤 것들로 위안을 얻었을까. 아들 욘의 생각이 참 특이하다. 보통의 아이들처럼 징징거리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애어른처럼 성숙하다. 아이 시절의 그런 성숙함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닌데...
엄마 비베케는 일주일에 책을 세 권 읽었다. 가끔은 다섯 권까지 읽을 때도 있다. 책을 가까이 하는 유혹, 그녀가 직장에서 열심히 일한 뒤의 시간에 누리는 행복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렇게 엄마가 행복을 누리며 책을 읽거나 책을 빌리러 도서관 가는 시간에, 욘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디에 있을까?
이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어떤 불안감이 생긴다.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떡하지. 욘에게 별일이 없겠지.
이건 아마 작가의 문체, 소설 전개 과정에서 비롯된 힘일 것 같다. 세밀한 심리 묘사, 촘촘한 시간 배열, 집요하게 파고드는 일상의 모습.
서로 같은 시간인 듯, 다른 시간이 흐르는 욘과 엄마의 밤.
혹시 사고가 난 것일까? ... 그녀가 추락했다면 지금쯤 마비되어 휠체어에 앉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아직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못해 피를 흘리고 죽어가고 있을지 모른다. (138쪽)
욘은 한밤중에 이런 식으로 고통스러운 장면을 애써 상상하며 비베케를 떠올린다. 그리고는 이내 아이다운 천진한 생각으로 마무리한다. 그러면서 눈 속에 발을 구르며 위아래로 뛰어다니고.
정말 이건 뭐지? 하면서 전개가 예상 밖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그제야 열쇠를 코트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녀는 열쇠를 꺼내 들었다.(216쪽)
밤 늦게 돌아온 그녀. 집 열쇠를 자신이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욘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녀는 걱정을 할까? 인생은 너무나 멋지고 이상야릇하다는 생각에 실소를 머금으며 혼자의 시간을 즐기고 있는 그녀. 그 시간 욘은? 자작나무 몇 그루가 있는 숲속에 있었다니.
모든 것이 고요했다.
날씨가 매우 추우면 소리가 더 커진다 한다.
그런데 욘의 엄마가 춥지도 고요하지도 않은 자신의 이상야릇한 행복에 취해서, 아들이 발을 동동 구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일까?
숲속에서 집으로 가는 길을 찾아 헤매면서 추위에 떨고 있는 아들. 그 시각 침대에서 블라인드를 내려 놓고 심호흡을 하며 잠을 청하고 있는 엄마.
발가락부터 발, 종아리, 허벅지, 엉덩이, 뺨, 입이며 손까지 온몸이 얼었다. 더는 감각도 없었다. (...) 그녀가 기차를 타고 와 그를 데려가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함께 어디론가 가겠다고. (...) 그는 배를 깔고 바닥에 누워 잠들었다. 머릿속에서는 모든 것이 어둡고 거대하며 고요했다. 그는 여기에 누워 그녀를 기다릴 것이다. (230-231쪽)
{이 책은 출판사 열아홉에서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