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을 나 또한 좋아한다. 작가만큼일지 그보다 더할지는 알 수 없지만, 누군가 나의 일에 임하는 나의 마음과 자세에 대해 묻는다면, 거침없이 내 일에 자부심도 크고 이 일을 하는 그 순간과 시간들이 참 좋다고 답할 것이다(물론, 지금도 그렇게 자주 말하고 다니지만). 왜냐하면... 그냥 다 좋으니까. 출근의 부담은 싫지만, 나의 일에 대한 부담은 좋으니까. 사람들과의 마찰은 힘들지만, 나의 일의 힘듦은 기꺼이 감수할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나도, 내 일로 건나가는 법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 내 일로 건너가, 내 일을 함께하는 그들과 '우리 팀'으로 묶여 더욱 즐겁게 웃으며 일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이 일을 계속 해나가고, 또한 잘 해내야 할 이유가 충분할 것이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혹여나 비웃을 수도 있지만, 나는 내 일에 만족한다. 매일 이런 나의 일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도 참 마음 한켠이 뿌듯해지기도 한다.
팀장으로 이직. 진급이 아니라 이직. 해야 하는 일도, 발휘해야 하는 능력도, 신경 써야 할 것도, 나를 평가하는 사람도, 나에게 기대하는 역할도, 모두 다 달라졌다. 물론 나의 마음가짐도 달라졌다.(22쪽)
새로운 직급을 얻는다는 것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생활에 적응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건 나도 경험상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작가처럼 '이직'이라고까지 생각해보지 못했다. 이 부분에서 무릎을 쳤다. 이 표현이 참 찰떡같다는 생각에서. 이직이란 표현이 참 잘 어울리는 말인 듯하다. 정말, 새로운 직급을 얻는다는 것은 그동안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하면서 대부분의 일하는 시간을 보내야한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그리고 작가처럼, 나도 이 이직 후의 일도, 나라는 사람과 좀 어울린다는 생각도 든다.
무책임과 무능력 없이 여섯 시에 퇴근을 하겠다는 건, 매 순간 촘촘히 날을 세우며 일하겠다는 다짐이자 태도다. 매순간 가장 효율적인 길을 찾겠다는 태도, 그리하여 사생활의 영역에 회사 일을 침범시키지 않겠다는 태도. 내 생활의 주도권을 내가 갖겠다는 선언.(...) 내 일의 주도권을 내가 가지지 않는다면 누가 가진단 말인가.(49쪽)
맞다. 내 일의 주도권은 내가 가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직은 주도권을 내가 갖기 좀 더 수월해지는 부분이 분명 있다. 물론 그만큼의 책임이 뒤따른다는 부담감은 늘 도사리고 있다. 또한 늘 일은 끊임이 없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속성인 것이고, 이 속성으로 인해 일에 끌려다니다보면 그때부턴 내가 나인지 일인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러지 않기 위한 나만의 질서는 분명해야 한다. 그 질서가 정시퇴근이라면, 이보다 더 확실한 직장인을 위한 보상은 없을 테니까.
이 기적을 위해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단단한 바위뿐만이 아니라 이 바위들을 하나의 팀으로 뭉쳐주는 진흙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진흙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다량의 존중, 서로를 향한 감탄, 각자의 책임감, 지치지 않는 수다력, 거기에 허점과 보완과 성공과 박수와 밥과 술 그리고 무엇보다 웃음이 진흙을 구성하고 있다.(222쪽)
웃음이 있어야 한다. 위기 상황 내지는 힘들과 어려운 순간에도 잃지 말아야 할 것이 유머라고 했다. 이 웃음 안에 들어와야만 끈끈한 '우리 팀'이 될 것이다. 이런 팀을 내가 팀장으로서 구성하든, 팀원으로 들어가든, 온전히 우리 편의 단단함은 커질 것이다.
덧-
'나'라는 주어와 '우리'라는 주어를 가려서 써야 하는 자리가 바로 상사의 자리다. '나'라는 주어를 쓰면서 스스로의 책임을 다하고, '우리'라는 주어를 쓰면서 모두에게 이 일의 책임을 나눠주는 일. 바로 그 일을 하라고 회사에서 팀장에게는 조금이나마 월급을 더 주는 것이니 말이다.(134쪽)
이게 상사의 자리인데. 과연 지금, 이 월급 더 받는 상사는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게 맞는지. 화도 나고 의문도 많아지는, 요즘이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