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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아워』

생과 사의 경계, 중증외상센터의 기록
: 정책의 우선순위

 

 


 

피는 도로 위에 뿌려져 스몄다. 구조구급대가 아무리 빨리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도 환자는 살지 못했다. 환자의 상태를 판단할 기준은 헐거웠고, 적합한 병원에 대한 정보는 미약했다. 구조구급대는 현장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병원을 선택할 것이어서 환자는 때로 가야 할 곳을 두고 가지 말아야 될 곳으로 옮겨졌고, 머물지 말아야 할 곳에서 받지 않아도 되는 검사들을 기다렸다. 그 후에도 다른 병원으로 옮겨지고 옮겨지다 무의미한 침상에서 목숨이 사그라들었다. 그런 식으로 병원과 병원을 전전하다 중증외상센터로 오는 환자들의 이송 시간은 평균 245, 그 사이에 살 수 있는 환자들이 죽어나갔다. 그렇게 죽어나가는 목숨들은 선진국 기준으로 모두 예방 가능한 사망이었다.

사지가 으스러지고 내장이 터져나간 환자에게 시간은 생명이다. 사고 직후 한 시간 이내에 환자는 전문 의료진과 장비가 있는 병원으로 와야 한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골든아워(Golden Hour)’. 그러나 금쪽같은 시간은 지켜지지 않았다. 가까운 거리는 앰뷸런스로 이송 가능하지만 먼 거리는 상황이 다르고, 가깝더라도 차가 막히는 러시아워가 되면 환자들은 길바닥에 묶였다. 고속도로나 일반도로에서 심하게 흔들리는 앰뷸런스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앰뷸런스로 2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가 헬리콥터로는 20분 안쪽이면 충분하다. 그렇게 실어 온 환자들의 생존 가능성은 당연히 높다. 내가 미국에서 보고 런던에서 봤던 사실이었다.

   

 

 

 

  

는 헬리콥터를 이용한 이송 체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일개 지방 병원의 외과 의사가 원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죽지 않아도 될 환자를 죽지 않게 하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필요했고, 그 의지를 실현시킬 정책이 필요했으며, 관련된 자들의 합의가 필요했다. 그러나 정책을 누가 만드는지는 알 수 없었고, 확실한 정책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아서 나는 그들의 실체를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결정적인 제약과 한심한 조치들은 늘 보이지 않는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정부로부터 몰려왔다.

 

보건복지부 측에서 마련한 회의 자리에서는 헬리콥터를 이용한 의료진의 현장 출동과 중증외상 환자 치료 체계 전반이 화두였다. 나는 중증외상 환자 이송에 헬리콥터를 도입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죽지 않아도 될 목숨을 살리려면 우선되어야 할 것이었다. 동석한 의료인들은 헬리콥터의 이착륙 장소와 소음 등을 문제로 삼으며 반대를 표했다.

나는 경험했으므로 알고 있었다. 런던 시가지의 수백 년 된 건물들 사이에서 헬리콥터가 날고 내려앉았다. 사람들은 의료 헬리콥터로 인한 불편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서울의 도로는 역사가 오래된 외국의 대도시보다 넓고 잘 정비되어 있으며 동네마다 큰 운동장을 가진 공립학교들이 있어, 착륙 거점으로 쓸 수 있었다. 한국의 도로 정도면 얼마든지 유사시에 헬리콥터의 이착륙이 가능하므로 나는 실례를 들어 가능성을 논했다. 그러나 모두 안 된다고만 했다. 제대로 된 중증외상 의료 시스템을 세우려면 국가의 방향 설정이 필요했다.

서로의 뜻이 다르다는 사실만 확인한 채 회의는 끝났다. 속에서 마른 먼지가 일어 숨이 틀어막혔다. 정부에서 밀어붙여주었으면 싶었으나 그 역시 더뎠다. 중증외상과 관련한 정책 추진이 답보 상태인 데 대해 한 전문위원에게 답답한 속내를 토로했다.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그가 되물었다.
이 교수님. 대한민국에 중증외상 의료 시스템만 문제라고 생각하세요? 그것만이 심각하고 촌각을 다투어야 하는 문제인가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국방, 예술에 이르기까지 어디 하나 녹록한 부분이 있는 줄 아세요?

머릿속이 서늘했다. 그의 말은 사실을 짚었을 뿐 비난도 질책도 아니었다. 정부에서 추진하고 진행해나가는 일들은 수없이 많고 중증외상 문제는 그중 하나에 불과하다. 나는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물음과 눈빛에 말문이 막혔다. 그는 차분하고도 군더더기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리 수많은 사람이 노력하고 필요성을 알린다고 해도 국가 정책이 움직일 수 있는 파이는 정해져 있어요. 그게 현실이고 사실이죠. 민주 국가에서 정책을 집행할 때 다양한 안건이 수많은 사람들을 거쳐 진행됩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일들이 발생하고요. 시급했던 정책들이 미뤄지다 폐기되기도 하고, 대규모 국책사업이 예산 낭비로 판명되는 경우도 있어요. 하지만 어떻게 합니까? 옳은 방향에 대한 각자의 생각이 다 다른걸요.
 
그의 말은 틀리지 않다. 제대로 된 중증외상센터가 없다고 나라가 망하지는 않는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그것 없이도 지금까지 잘 지내왔다. 중증외상 의료 시스템이 없어 죽어나가는 목숨보다 더 많은 목숨이 걸린 중대 사안은 많을 것이다. 그것들조차 잰걸음을 하다 고꾸라질 수도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책의 우선순위는 사안의 중요성보다 누가 얼마만큼 관심을 가지고 동의하느냐에 달려 있다. 대한민국에서 기본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것이 중증외상 분야뿐인가? 노동 현장이나 교육 현장이나, 수많은 사안들이 주먹구구식으로 흘러간다. 힘없고 돈 없는 이들에게 기본이라는 말은 참으로 사치스러운 단어다. 기준도 저마다 달라 싸움은 곳곳에서 벌어진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인정하기 쉽지 않았다. ‘왜 우리는 안 되는 것인가?’ 하는 답 없는 의문만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내 앞에 놓인 길은 아득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사지에서 나아가고 물러서기를 반복해야 하는데, 그사이 조촐하게나마 모인 팀원들이 광범위한 업무와 산적한 업무량에 쓰러져가고, 죽어나가는 환자들 또한 수없이 많을 상황이 눈앞에 보였다. 기다림은 길고 지난할 텐데, 묵묵히 버텨낼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참고 기다린다고 한들 앞으로 달라질 가능성조차 없어 보이는 것이 제일 견디기 어려웠다.

 

 


 

 

골든아워 1

이국종 저
흐름출판 | 2018년 10월

 

골든아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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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타블로거 chan300

    밑빠진 독같은 나라에서 예산 부족 타령만 하는 모습을 보면 소름끼칩니다.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2018.10.12 11:16 댓글쓰기
  • 스타블로거 꽃밭

    안되는 이유만 찾고, 자신의 이익부터 계산기 두드리고....무엇이 중요한지 생각하는 국회의원들이 좀 않아졌으면 좋겠어요. 악전고투 하시는 이국종 박사님, 존경스럽고 힘내셨으면 합니다.

    2018.10.12 12:32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나날이

    헬리콥터의 필요성은 촌각을 다투는 환자에게 아주 필요한 것이겠지요. 그런 것들은 영화에서 처럼 우리도 도용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것보다도 정치, 사회, 문화적인 간극이 저자를 아득하게 만들고 있는 듯하네요. 점점 생과 사의 경계에 서는 사람들의 옆에 있는 분들의 마음이 읽혀져 오네요.

    2018.10.12 22:09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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