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 교수의 <한시미학산책>을 다 읽었다. 이 경우에 다 읽었다는 표현은 별로 중요하지가 않다. 한시 자체는 말할 것도 없고 저자가 번역해놓은 것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단지 ‘읽었다’는 이유로 책장을 넘긴 게 한두 장이 아니니 말이다. 그저 읽었으니 다 읽었다고 인정해달라는 나 스스로에 대한 투정이나 다름없다.
1월 12일에 읽기 시작하여 21일에 다 읽은 것으로 표시를 했으니 딱 열흘인 셈인데,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오며 가며, 아내가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소파에 앉아서, 백화점에서 아내를 기다리며, 아내와 아이들이 모두 잠든 한밤 중에 이렇게 읽어 열흘이다. 뭐랄까. 공을 들인 책을 다 읽었을 때의 대견함이랄까... 그렇다.
이 책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번역이다. “꿈길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와 같은 양주동의 번역이 놀랍지 않을 정도이다. 그저 번역한 한시만을 읽더라도 그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은 물론 원래 한시의 공이기도 하지만 번역한 저자의 공이기도 하다.
시의 정신과 한시에 대해서 많은 것을 얘기했지만, 거의 다 읽으면서 딱 한 가지 더 바라고 싶은 것이 생겼다. 중국의 한시와 우리나라의 한시를 비교하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한시라는 것이 당연히 중국에서 온 것이지만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흉내만 낸 것은 아닐 것인데, 과연 어떤 점이 다를까 하는 것이 궁금해졌다. 그 다른 점이 저자가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소리 높인 과거-현재-미래에 대한 의미가 더 명확해지지 않을까 싶다. 즉, 과거를 온전히 이해하고 현재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과연 우리나라의 한시에서 그런 작업은 있었는지, 있었다면 어떤 것이었는지 그게 궁금하다.
바로 앞에서 언급했지만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사실 책 전체에서 저자의 목소리는 뚜렷하다. 시라고 속삭이고 있지만은 않다. 저자의 낮지 않은 목소리는 책을 더 또렷이 읽을 수 있게 하는 장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에필로그에서 더 커진다. 하고픈 얘기라서 그렇다. 혹은 어떤 하소연 같기도 하고, 또는 자신이 하는 학문에 대한 존재 이유를 설파하는 선언 같기도 하다. 이런 것이다.
“옛날은 그 때의 지금이었을 뿐이다. 지금은 훗날의 옛날이다. 현재에 충실하라. 그러면 그것이 훗날의 모범이 된다. 옛것을 맹종치 말라. 그 옛것도 그 때에는 하나의 ‘지금’이었을 뿐이다. 세월은 흘러간다. 오늘의 주인공이 내일은 무대 뒤로 사라진다. ‘지금’과 ‘여기’가 차곡차곡 쌓여 역사가 된다.” (660쪽)
그리고 또한 이런 것이다.
“한시 연구에서 논문을 쓰자는 것인지 위인전을 쓰고 있는지 분간 안 되는 연구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생애나 역사 배경을 죽 늘어놓고, 거기에 작품을 꿰어맞춰 일대기적 구성으로 재배열하거나, 자기가 연구하는 시인이 언제나 최고가 되는 당착은 병폐가 된 지 오래다. 툭하면 현실인식이고, 입만 열면 역사의식을 말한다.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문학성이 담보되지 않은 의식이란 대자보나 설교와 무엇이 다른가?” (669쪽)
오래 전의 한시를 읽지만, 그건 그저 읽자는 것이 아니고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보자는 것이리라.
(201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