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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 소년

[도서] 은행나무 소년

정도상 저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어른이 되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 있다. 원하지 않아도 세상을 보게 되고, 그 세상 속에서 내가 살아가야 할 방법을 배운다. 비록 치욕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하더라도, 살아가는 방식이 그렇다면 받아들인다. 삶은, 때로 비루하고 허망해도 살아지는 거다, 라는 조금은 씁쓸한 생존방식도 보게 된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어른이 되어서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한다면 그때 만나야 할 모습이다. 어린 나이, 고작 열두 살의 나이에 보고 싶은 세상의 모습은 아니다. 열두 살, 아직은 초등학생, 현실을 그대로 담은 르포가 아닌 동화를 꿈꾸어도 좋을 나이에 그런 세상을 알게 된다는 건 너무 서글플 것 같다.

 

그런 나의 바람에 콧방귀라도 뀌듯 저자 정도상은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놓은 천사마을, 한겨울의 칼바람이 가슴 속으로 파고드는 허름한 집, 그 안에 열두 살 소년 만돌이를 던져놓았다. 소년에게 사고로 한꺼번에 잃은 부모와 여동생을 그리워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소년은 외삼촌 댁과 큰댁을 이방인처럼 떠돌았다. 겨우 정착한 외할머니댁에서 평온한 하루를 보내는 삶이 이루어질까 싶었는데, 그것마저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온종일 외할머니가 재봉틀을 밟아대며 근근이 이어가는 끼니에, 문제아로 낙인찍힌 학교생활, 툭하면 빠지는 공부방. 무엇 하나 소년의 허기를 채울 수 있는 게 없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외할머니는 치매에 걸렸다. 외할머니가 소년을 못 알아보는 일이 잦아졌다. 소년의 친구 지혜를 이미 죽은 딸로 착각하기도 한다. 천사마을은 재개발 지구로 확정되어 철거용역들과 거주자들의 대치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방화가 일어나고 포클레인이 들어와 주택을 찍어 내린다. 그런 암흑 같은 환경에서, 철거에 반대하는 주민들과 함께하는 휴학생이자 공부방 선생인 여수경 누나의 카메라는 소년에게 또 다른 의미의 뷰파인더가 된다.

 

우연히 내준 공부방 숙제인 사진을 찍어오라는 것은 만돌이가 세상을 보는 시선을 키워주는 계기가 된다. 아이가 만난 세상은 동화 속의 세상처럼 그려져야 하는 바람이 있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고 현실을 부정하는 것 또한 이루어질 수 없는 판타지다. 그 과정에서 소년이 카메라를 목에 걸고 세상을 찍는 순간들은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재봉틀을 돌리는 할머니, 굳어버린 인절미, 폐허가 된 동네의 빈집 등등. 지금을 살아가는 소년의 현실을 각인시키는 듯 보이는 장면들이기도 하다. 벗어날 수 없는 가난, 치매 걸린 외할머니, 철거예정지 속에 존재하는 집. 하지만 그건 눈으로 보는 세상을 담은 것뿐이다. 현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만돌이의 유산과 보험금을 차지하고자 후원자를 자처하는 외삼촌과 큰아버지의 법정 싸움에 휘말려야 한다. 돈이 없어 파 하나를 사는 것도 주저해야 하고, 철거대상이 가득한 그 동네에서 사는 것도 여전히 소년의 현실이고 현재다. 벽에 똥을 바르는 치매 걸린 외할머니와 함께하는 지금의 슬픔을 어떻게 감당하라는 것인지 몰라 발버둥 친다.

 

그럼에도 소년의 시간은 유유히 흐른다. 계속 성장한다. 그 과정에서 배우는 것과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슬픔은 희극으로 경험하게 한다. 짝사랑으로 끝나버린 첫사랑이 가르쳐준 것은 카메라를 통해 바라본 세상이다. 주변의 모습들, 사람들을 찍으면서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찾는다. 그렇게 세상을 배우고 사람을 알아간다. 한쪽 다리로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콩콩 이모가 윗도리를 벗어젖혀도, 하율 스님이 온몸에 휘발유를 들이부어도, 천사교회 최 목사님이 그렇게 기도해도, 인간 바리케이드를 쳐도 포클레인은 들어와 집들을 찍어 내리고 철거는 이루어진다. 여전히 자신들의 패배로 이루어진 세상이지만 그래도 살아가야 할 이유와 오기를 부여한다. 그 안에 열두 살 소년 만돌이가 있다. 그들 안에서 세상과 사람을 배우고 성장하는 시간을 함께 한다.

 

계속되는 삶 앞에서 자본이 폭력이 되는 순간을 경험한 소년이 앞으로 어떻게 성장해나갈 것인지 궁금해지게 된다. 마지막 버팀목처럼 지키고 있던 은행나무마저 베어졌지만, 떨어진 은행이 다시 작은 화분에서 싹을 틔운 것을 보았다. 아직은 그냥 파란 새싹이지만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나고 자라서 어떤, 누구의 버팀목으로 존재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은행이 틔워낸 새싹은 은행나무로 자라날 거라는 것이다. 우리의 시간은 흘러가고, 자라고, 삶은 또 이어지고 있는 것처럼 같이 걸어가고 있다. 앞으로의 일들이 어떻게 소년 앞에, 내 앞에 등장할지 아무도 모른다. 여전히 자본이 휘두르는 권력 앞에서 흔들리고 쓰러질지도 모른다. 그게 삶이라고 받아들이며 묵묵히 오늘을 살아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그런 삶 속에서도 여전히 함께 하는 사람들과 세상 속에서 배우는 것들로 인생을 채워가고 성장해가고 있으리라는 것이다. 때론 삶이 고달플 때, 힘들 때, 위로가 필요할 때 이미 베어져 버린 은행나무 대신 또 다른 무엇을 버팀목으로 삼게 되더라도.

 

살아가면서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먼저 배운 소년이었다. 돈, 권력, 그리고 많은 것들이 살아가게 하는 이유가 될 수 있지만, 그 무엇보다도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가 삶의 정신적인 질을 만든다. 비록 가난과 초라한 가족이 소년이 가진 전부였지만, 그 이상의 것들로 배워가고 알아가는 시간이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인격이 뭔지, 살아가는 동안 갖추어야 할 존엄이 뭔지를 알고 사는 사람들 속에서 소년은 분명 보았으리라.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야 제대로 된 인생을 꾸려가는 것인지를. 돈과 권력이 살아가는데 편리함을 준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불편한 생활, 더위와 추위를 견디게 하는 힘이 돈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나 역시도 자라면서 배우고, 어른이 된 후에도 여전히 배우고 있는 것 한 가지가 있다. 돈과 권력, 그 이상의 어떤 것이 나를, 우리를 살아가는 힘이 된다는 것을. 때로는 비루한 삶이 숨쉬기 힘들 정도의 외로움을 선사하더라도 그 순간을 살아가게 하는 이유를 만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 만돌이에게 감히 말할 수 있다. 새로이 싹을 틔운 아기 은행나무에게 한쪽 어깨를 기댈 수도 있는 그 시간을 기다리면서 살아가보자고, 그 순간이 궁금하지 않느냐고.

 

소년의 손에 새로 쥐어진 디지털 카메라 속에 세상의 어떤 모습이 담기고 있을지, 궁금하다.

 

고물 휴대폰을 초기화하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나는 나를 '초기화'하고 싶었다. 교통사고 이전의 시간으로 초기화가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나는 전자제품이 아니다. 언젠가 침쟁이 친구가 할 말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고, 흘러간 시간을 바꿀 순 없단다. 삶이 언제 끝날지 모르니까 살아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사랑해야지. 그게 직선의 시간 위에 서 있는 나를 비로소 살아 있게 해주니까. 이미 직선의 시간을 많이 지나온 사람만이 그것을 알지.' (153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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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타블로거 mira

    직선을 시간을 많이 지나면 진짜 사랑, 인생,돈등등 알수있을까요. 그것이 궁금해서 이책에 관심이 가네요 ㅎㅎ

    2013.12.20 13:15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뻑공

      글쎄요, 그럴까요? ^^
      저도 완벽하게 그 시간을 지나왔다고 생각할 수 없기에 뭐라 답변 드리기는 어렵습니다만... 그럴 것이다, 하는 마음으로 오늘도 그 시간을 걸어가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

      2013.12.21 22:53
  • 파워블로그 블루

    책 처음 나왔을때 제목때문에 궁금했던 책이군요.
    그래요, 소년에게는 카메라가 있었기에 그 힘든 시간을 견딘것 같습니다.
    카메라의 뷰파인더 속으로 보이는 세상이 조금은 동화적으로 보였으면 좋으련만, 뷰파인더 속에서도 힘든 세상이었다는 게 조금은 서글프지만, 자기 나름대로의 돌파구가 되었던 것 같아요. ^^

    2013.12.20 13:32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뻑공

      오래전에, 우연한 기회로 받은 책인데요... ^^
      그 카메라가 정말 우연일지도 모르는데, 그 환경 안에서 소년에게 다른 의미로 살아갈 의지를 주는 메시지가 된 것 같아요.

      2013.12.21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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