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블로그 전체검색
블로그이벤트2
침묵의 거리에서 1

[도서] 침묵의 거리에서 1

오쿠다 히데오 저/최고은 역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부모라는 입장에서 범하기 쉬운 오류 중의 하나는, 자기 자식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 동시에 부모가 많은 것을 감싸 안아야 아이에게 사랑을 주는 것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잘못된 것도 내 자식이니까 이해하게 되고, 내가 이해해주지 않으면 큰일 날 것처럼 생각한다. 한없는 배려, 타인이 아닌 오직 자기 자식만이 그 사랑과 배려의 대상이다. 내가 지켜본 여러 가지 경우를 떠올리니, 그게 옳은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단순한 착각에서 멈추는 것이 아닌 아이의 성장과 직결된 문제이기도 하다. 그 아이가 공부를 잘하고 일류대학에 진학하고 명함 내밀기 좋은 직업을 가지게 된다고 하여도,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인성을 배제한 채로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인간이 인성이 없이 산다는 게 어불성설이겠지만...

 

평범한데도 경험과 상식이 없다는 점이 소년 범죄의 비극이다. 저지르고 난 뒤에야 자신들이 얼마나 엄청난 짓을 했는지 깨닫는다. (1권 203페이지)

 

중학교에서 2학년 남학생 한 명이 사망했다. 학교의 운동부 교실 근처, 커다란 나무 밑에서 시신이 발견된다. 단순한 사고인지 누군가에 의해 사망한 사건인지 아직은 모른다. 이제 시작이다. 사고인지 사건인지를 알아내야 하고, 그 죽음의 진실을 밝혀야만 한다. 투명하게 드러나야 할 것들이 하나씩 밝혀질 때마다 가슴은 답답해져 온다. 신체적으로 왜소한 아이, 경제력이 뒷받침되는 집안 배경을 갖고 있다.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아이의 신분을 대변한다. 그런 아이에게 학교라는 공간은 왕따와 폭력의 주인공이 되게 했다. 음료수 셔틀과 점점 익숙해지는 폭력이 학교에서 아이가 살아가는 생존법이었다. 아이의 사망으로 새롭게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읽는 나에게 기함을 하게 했다. 처음 듣는 얘기여서가 아니다. 이 책에서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의 분위기를 미리 짐작하지 못해서도 아니다. 그동안 들어왔고 알아왔던 이야기에 좀 더 생생함을 맛봤다고 해야 할까. 더 깊이 듣고자 한다면 그 이상의 것들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올까 봐 두렵기까지 했다. 아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미움을 만들고 어떤 식으로 그 미움의 대상에게 표현하는지 구체적으로 듣는 기분이었으니까. 더욱이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처음 접했던 것이 아니니 새삼스러울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오쿠다 히데오의 『침묵의 거리에서』를 통해 만났던 느낌은 조금 달랐다.

 

나는, 이 작품에 대해 상당히 오해했다. 청소년을 주제로 한 그저 그런 소설, 뻔한 이야기, 왕따나 학교 폭력, 그리고 훈계하는 마무리. 읽기도 전에 내 머릿속에 이 책의 스토리를 그렇게 집어넣었다. 그런데 내 눈에 비친 것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기본적인 틀은 비슷하다. 왕따와 학교 폭력에 시달리던 한 소년이 죽었고, 그 죽음이 사고인지 사건인지를 파헤치는 과정을 즐길 수 있는 미스터리적인 요소도 있었다. 결국, 소년은 피해자였고 가해자도 찾아냈다. 그때부터다. 내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은, 직·간접적으로 내가 경험했던 장면들을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다시 보게 한 것이다. 피해자는 분명 죽은 소년이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가해자는 죽은 소년과 함께 테니스부 활동을 했던 네 명의 동급생 소년들이다. 피해자 소년의 죽음으로 등장하는 여러 인물의 태도가 내 시선을 붙잡았다.

 

피해자 소년 부모의 태도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터트릴 수 있는 울분의 한 방식으로 보인다. 내 아들은 죽었으나 그 죽음을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죽은 아들은 돌아오지 못한다. 마음의 병은 깊어가고 일상은 마비되었다. 그래서 학교에서 취하는 태도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고, 가해자에게 분노를 포장한 도의적인 책임을 묻기도 한다. 이게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아들의 학교생활을 알게 된다. 집에서는 마냥 예쁘고 귀한 아들인데, 항상 좋은 것만 해주고 싶어서 운동복마저 최고급으로 입히고 싶었을 뿐인데, 돈 있는 사람이 있는 행세 하는 것뿐인데... 그게 최선은 아니었던 거다. 학교라는 공간, 여럿이 어우러져 함께 해야 하는 시간, 그 시기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었을 학교에서 부모의 넘치는 사랑 표현은 아들에게 좋은 효과를 내지 못한다. 다른 아이들의 시선, 평등함을 알기도 전에 위화감부터 배우는 계기를 만들었던 게 아니었나 싶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것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었을까. 그 어떤 것도 이제는 소용이 없다. 아들은 죽었으니까. 이제 없으니까.

 

죽은 소년에게 가해자로 지목된 소년 네 명의 부모를 주목해야 한다. 부모들이 자주 하는 착각, ‘내 자식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 자식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거대한 착각 속에서 자식의 허물을 감싸기 바쁘다. 자식인데 내가 감싸주지 않으면 누가 해줄까 싶은 맹목적인 헌신 같다. 분명한 건 네 소년이 가해자라는 점이다. 직접 언어적·신체적 폭력을 가하기도 했고, 직접 가담하지 않았어도 가까이에서 방관자 역할을 했다. 그러니 가해의 범위는 똑같다. 그런데 이 소년들의 부모는 죽은 소년에 대해, 소년의 부모에 대해 배려하지 않는다. 내 자식이 그럴 리가 없다는 믿음으로 시작된 착각은 보통의 부모들이 가질 수 있는 마음, 잘못은 했으나 아이의 성장과 미래를 위해서 선처해달라는 틀에 박힌 호소를 남발하는 것과 같다. 그럴 때마다 나의 못된 심보는 그들(가해자의 부모들)에게 반대의 경우를 꼭 경험하게 해보고 싶어진다. 당신의 아들이 피해자가 되어 죽었다고 생각해 보라고. 이럴 때 볼 수 있는 건 침묵뿐이겠지. 알고 있다. 침묵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러니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계산법은 여기에 넣지 말라는 얘기다. 진정, 자기 자식을 위하는 길이 선처를 호소하고 감싸 안는 것이 아님을 안다면 그런 태도를 보이지 말라고. 자식을 키운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일 거다. 자식을 ‘올바로’ 키운다는 게 더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기계가 아니니 인간의 눈으로 똑바로 보고 올바로 키우는 게 당연한 일 아닌가?

 

부모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 감정이 상할 수 있는 말이 자기 자식에 관련된 말이다. 몇 년 동안 친구의 아이를 지켜보다가 아이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어렵게 말을 꺼낸 적이 있다. 주변에서 친구의 아이 또래의 아이들을 자주 보다 보니 자연스레 어떤 게 옳은 것이고 어떤 게 조금 잘못된 것인지 보는 눈도 생겼다. 하지만 아이가 없는 내가 아이를 직접 키우는 사람에게 얘기하는 건 상당히 민감한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계속 친구의 아이를 봐야 할 입장에서 해줄 수 있는 말이라 생각해서 악역을 자처했다. (내가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말을 하는 경우, 좋은 얘기는 거의 없다.) 내가 몇 년 동안 지켜본 너의 아이는 이런 점은 아닌 것 같다, 조금 더 관심 두고 지켜보거나 전문가의 상담을 받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아이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너희 부부의 많은 것을 보고 있는 아이가 저절로 보고 듣고 배우면서 보이는 행동이라 생각된다, 등등. 아주 조심스럽고 솔직하게 얘기했으나 친구의 반응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좋은 이야기도 아니고, 자신의 아이를 두고 하는 말이 좋게 들릴 리가 없다. 그렇게 얘기를 하고 몇 달이 흘렀을 때 친구가 울면서 전화를 했다. 유치원 담임교사와 상담하고 왔는데 담임교사가 몇 달 전에 내가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하더라고 했다. 그때 내가 했던 말을 듣기만 했는데(아이도 안 키우면서 말하는 입장이었으니...), 유치원에서 똑같은 말을 듣고 오니 겁이 나더라는 것이다. 그마저도 담임교사는 얼마나 말을 돌려서 좋게 들리게 했겠느냐고, 실제로는 더 심각한 상태인 것 아니겠느냐고... 유치원에서는 보통 3월에 개원을 하면 어느 정도 아이들을 지켜보다가 4월쯤에 학부모 상담을 한다. 아이의 유치원 생활을 잘 살펴보고 그 생활을 부모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직접 지켜본 사람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니 아주 엉터리 상담은 아니다. 내가 생각했을 때, 혼자가 아닌 단체생활에서 아이의 문제가 더 잘 보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활에서 발견되는 아이의 문제점을 해결하거나 보완하지 않으면,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더 문제점이 쌓여갔으면 쌓여갔지 덜어지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다. 아이에게 조건 없는 부모의 희생과 헌신으로 감싼 배려와 이해가 아니라 한 명의 인격체로, 자라나면서 계속 경험하게 될 사회(학교나 직장 그 외)라는 공간에서 어떤 자세와 사고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 부모의 가장 큰 역할이 아닐까 한다. 어디 가서 거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고품격의 가르침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책 속의 주인공들은 중학교 2학년이다. 곧 고등학생이 되고 성인이 될 것이다. 지금 자신들이 왕따와 폭력의 대상으로 삼았던 한 소년의 죽음이 앞으로 자신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알고나 있을까. 아마도 지금 당장은 모를 것이다. 그렇다고 모른 채로 자라서도 안 된다. 그래서 그 모름을 알게 하는 게 부모의 역할이라고 본다. 그 임무를 수행할 사람도 부모밖에 없다. 부모가 그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자식을 보듬어 안는 시선이 아닌 객관적인 시선을 가져야 한다. 쉽지 않겠지만, 좀 더 먼 거리를 가야 하는 자식을 위하는 마음가짐으로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각자의 위치에서 취해야 할 태도, 알고 싶고 드러내야 할 진실이 있기 마련이다. 학교와 선생의 입장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현명한 다리 역할을 해야 하고, 학교 안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책임과 반성을 해야겠지. (아, 이 뻔한 말밖에 할 수 없는 게 가슴이 아프지만...) 경찰이나 검찰에서는 분명하고 투명하게 드러나야 할 사실과 진실을 밝혀야 하는 의무를 망각해서는 안 되겠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립의 시선에서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보도해야 하는 언론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과 피를 나누었다고 무조건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의 소중한 자식에게 객관적인 시선을 가져야 하는 부모의 태도다. 내 자식의 잘못은, ‘내 자식’이란 수식어를 뺀 ‘잘못’으로만 판단해야 하는 시선이다. 누군가는 이런 시선을 잔인하다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게 무엇을, 누구를 위해 취해야 할 태도인지를 분명하게 상기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오쿠다 히데오의 메시지가 썩, 괜찮았다.

 

 

 
취소

댓글쓰기

저장
덧글 작성
0/1,000

댓글 수 2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블루

    오히려 부모가 자신의 아이를 더 모르는 경우가 있어요.
    저도 제가 아이를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아는게 다가 아니더라고요.
    수많은 모습중에서 사람에 따라, 장소에 따라 보이는 모습들이 달라지는거죠.
    가해자인 아이들의 부모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되더라고요.
    만약 내가 가해자 중 한명의 부모였다면, 역시 똑같이 행동할까, 이런 생각들때문에 고민했었어요. 말로는 나는 객관적인 입장에 서겠다 할수도 있지만, 막상 나에게 이런 일이 닥쳤을때 나도 그들 부모들처럼 똑같이 행동할까봐 겁나기도 했어요.

    2014.12.22 17:47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금비

    아까 뭐라고 썼더라??ㅎㅎ
    이 책의 리뷰를 여러 번 봤는데 볼 때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란 생각은 하게 되더라구요. 이번엔 아가씨 입장에서 쓴 리뷰라 그런지 뭔가 더 절제된 느낌이 나요.
    위의 언급하신 친구분 아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했는지 궁금해요. 제 아이도 이제 학교 들어가니까...걱정되고요.
    (참, 아들과 뽀로로 잘 봤어요. 뻑공 이모가 선물 줬다고 했더니 아이가 그리 웃대요. 뻑공이라는 말이 웃기다며..ㅋㅋㅋ)

    2015.01.08 13:27 댓글쓰기

PRIDE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