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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랜 사랑

[도서] 날랜 사랑

고재종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1. 사랑

 

     

  얼음 풀린 냇가

  세찬 여울물 차고 오르는

  은피라미떼 보아라

  산란기 맞아

  얼마나 좋으면

  혼인색으로 몸단장까지 하고서

  좀더 맑고 푸른 상류로

  발딱발딱 배 뒤집어 차고 오르는

  저 날씬한 은백의 유탄에

  봄햇살 튀는구나

 

  오호, 흐린 세월의 늪 헤쳐

  깨끗한 사랑 하나 닦아 세울

  날랜 연인아 연인들아

  - 고재종, 「날랜 사랑」

 

 

따뜻한 바람에 몸이 풀린 냇물이 세차게 흐르며 여울을 짓는다. 눈과 얼음이 녹아 무리지어 흐르는 저 거센 물살을 은피라미떼가 차고 오른다. 은피라미떼는 산란기를 맞아 바다에서 민물로 올라온 은어를 가리킨다. 자기와 같은 생명을 퍼뜨리는 게 얼마나 좋은지 은어는 혼인색으로 몸단장까지 했다. 산란기가 되면 은어는 아가미 아래로 붉은색이 선명해진다. 시집 갈 때 신부 얼굴에 찍는 연지 곤지가 붉은색이 아닌가. 한 조각 붉은 마음으로 백년 서방을 맞는 여인의 마음을 시인은 산란기가 된 연어의 몸에서 보기라도 한 것일까? 혼인이란 성()이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일이다. 산란기를 맞아 세찬 여울물을 차고 오르는 은어 또한 다음 생명을 잉태하는 숭고한 일을 지금 준비하고 있지 않은가.

 

혼인색으로 단장한 은어들은 좀 더 맑고 푸른 상류로 가기 위해 거친 물살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물살은 물살대로 자기 갈 길을 가고, 은어는 은어대로 발딱발딱 배를 뒤집어 흐르는 물살을 차고 오른다. 은빛 은어와 은빛 물살이 맞물리며 퍼뜨리는 아름다운 이미지를 떠올려 보라. 시인은 은빛 은어가 은빛 물살과 만나 벌이는 이 이미지를 저 날씬한 은백의 유탄이라고 표현한다. 은어가 물결을 차고 오를 때마다 사방으로 물결이 튄다. 은빛 장관을 보는 눈만 즐거운 게 아니라, 물결이 튀는 소리를 듣는 귀 또한 즐겁다. 거기에 봄 햇발이 질 수 없다는 듯 찬란한 은빛을 발한다. 은어 몸에 닿은 햇발이 사방으로 튀며, 거세게 몸을 치솟는 은어에 놀라 유탄처럼 흩어지는 물살을 휘감는다.

 

시인은 세찬 여울물을 거슬러 오르는 은어들을 보며 모든 생명 속에 본능처럼 새겨진 거룩한 사랑을 본다. 거룩한 사랑을 실천하는 존재는 자기 이익에 연연하지 않는다. 자기 이익에 연연한다면 은어가 굳이 목숨을 걸고 바다에서 민물로 올라올 리가 없다. 연어는 민물로 올라가는 길이 죽음의 장소라는 것을 알면서도 주저 없이 민물로 가는 여행을 시작한다. “흐린 세월의 늪을 헤치고 태어난 곳으로 거슬러 오르는 이 은어들의 여행에 시인은 깨끗한 사랑이라는 시구를 붙인다. 깨끗한 사랑은 새로운 생명을 낳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상황과 이어져 있다. 은어는 산란을 하자마자 곧바로 죽는다. 산란이 곧 죽음으로 이어지는 이 운명을 시인은 죽음을 넘어서는 사랑의 진경으로 생각한다.

 

사랑은 언제나 그 속에 죽음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을 육체의 죽음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선사(禪師)들의 깨달음 또한 자아를 죽인결과로 이루어지지 않는가. 깨끗한 사랑 하나를 닦아 세우려면 자기 이익에 매몰된 자아를 죽이는혹독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시인이 사랑이라는 말에 붙인 깨끗한이라는 수식어는 무엇보다 자기를 중심에 세우는 이 마음을 내려놓는 일과 관련이 있다. 자기를 중심에 세운 존재는 늘 사랑의 가치를 따질 수밖에 없다. 그들은 자기에게 돌아올 이익이 없으면 결코 깨끗한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려고 한다.

 

시인은 깨끗한 사랑을 닦아 세우기 위해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을 날랜 연인아 연인들아라고 부르고 있다. 시 제목인 날랜 사랑과 이어진 이 시구들에는 좀 더 맑고 푸른 상류로 올라가 깨끗한 사랑을 이루려는 연어의 꿈이 스며들어 있다. 꿈을 꾸지 않으면 연어의 몸은 결코 혼인색으로 바뀌지 않는다. 맑고 푸른 물가로 가는 위험한 비행도 실행할 리 없다. 연어는 민물로 거슬러 오르는 험난한 여행을 펼침으로써 다음 세대들이 꿈꿀 자리를 아름드리 마련해준다. 생명의 꿈은 언제나 다음 생명이 꾸는 꿈으로 이어지는 법이다. 생명이란 서로서로가 이어진 거대한 그물망을 형성하고 있지 않은가. 날랜 연인들은 바로 이 생명의 그물망을 잇기 위해 맑고 푸른 상류로 끊임없이 올라간다. 자신을 내버린 자리에서 피어나는 날랜 사랑이 참으로 아름답지 않은가.

 

2. 사랑

       

  간밤 뒤란에서

  뚝 뚜욱 대 부러지는 소리 나더니

  오늘 새벽, 큰 눈 얹혀

  팽팽히 휘어진 참대 참대 참대숲 본다

  그중 한그루 톡, 건들며 참새 한 마리 치솟자

  일순 푸른 대 패앵, 튕겨져오르며 눈 털어낸 뒤

  그 우듬지 바르르바르르 떨리는

  저 창공의 깊숙한 적막이여

 

  사랑엔, 눈빛 한번의 부딪침으로도

  만리장성 쌓는 경우가 종종 있다

  - 고재종, 「직관」

 

 

큰 눈이라도 내리는지, 간밤 뒤란에서 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올곧은 게 대나무라고 하지만, 바람이 세차게 불거나, 큰 눈이 내리면 대나무는 한쪽으로 휘어지거나 아예 부러지기도 한다. 이것은 대나무의 자연이다. 곧은 것이 자연이라면, 휘거나 부러지는 것 또한 대나무의 자연이다. 사람들은 곧고 곧은 대나무에 반하는지 모르지만, 휘거나 부러지는 특성 없이 어떻게 곧고 곧은 특성이 나올 수 있을까. 큰 눈을 맞아 팽팽히 휘어진 참대숲을 시인은 오늘 아침 기꺼운 마음으로 본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대나무에 얹힌 큰 눈이 아래로 쏟아져 내릴 형국이다. 말 그대로 아슬아슬한 균형이라고나 할까. 대나무는 끝내 견디려 하고, 큰 눈은 기어이 대나무를 이겨내려고 한다.

 

참새 한 마리가 대나무 한 그루를 톡, 건들며 하늘로 치솟는다. 일순 푸른 대가 패앵, 하늘로 튕겨져 오르며 온몸에 쌓인 눈을 털어낸다. 우듬지가 바르르 떨린다. 참새 한 마리가 아니라면 대나무는 그 모습 그대로 큰 눈을 견뎠을 것이다. 견디고 견디다 못 견딜 것 같으면 스스로 부러져 내렸을지도 모른다. 참새가 대나무를 도와주기 위해 일부러 하늘로 치솟지는 않았으리라. 참새는 본능처럼 하늘로 치솟으며 대나무 한 그루를 건드렸을 뿐이다. 큰 눈에 눌려 있던 대나무는 바로 그 순간을 기회 삼아 온몸을 짓누르던 큰 눈을 털어내고 우듬지를 바르르 떤다. 우듬지만 떨었을까. 우듬지에서 내려온 떨림이 뿌리까지 이르러, 한겨울을 힘겹게 견디던 뿌리 또한 부르르 몸을 떨었을 것이다. 참새 한 마리의 몸짓이 대나무 한 그루를, 나아가 참대숲을 온통 울리는 이 기막힌 현상을 보라.

 

시인은 참대숲에서 펼쳐지는 이 기막힌 순간을 저 창공의 깊숙한 적막이여라고 표현하고 있다. 바르르 떨리는 우듬지 위로 깊디깊은 창공이 펼쳐져 있다. 창공(蒼空)은 말 그대로 푸른 하늘을 의미한다. 푸르고 푸르러 깊이를 모르는 적막한 하늘 속으로 대나무 푸른 소리가 흘러든다. 대나무는 푸른 하늘을 머리에 인 채로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땅 속 깊이 뿌리를 박은 덕에 대나무는 저 창공이 펼쳐내는 깊숙한 적막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큰 눈을 털어낸 대나무가 바르르 몸을 떨면 창공 또한 바르르 떨며 몸속 깊이 그 떨림을 받아들인다. 공명이다. 참새 한 마리의 몸짓이 깊숙한 적막에 빠져 있던 하늘에 숨구멍을 낸다. 공중으로 치솟는 참새를 하늘이 왜 온몸으로 끌어안겠는가. 생명은 다른 생명이 있기에 비로소 생명으로 거듭나는 법이다.

 

자연에서 펼쳐지는 신비한 현상에 눈길을 주던 시인은, 바로 그 현상에서 우리네 마음을 유혹하는 사랑의 감정을 이끌어내고 있다. 사랑이란 결코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다. ‘짝사랑이라는 말을 사람들은 사용하지만, 사실 짝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공명이 없는 사랑을 어떻게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시인은 사랑엔, 눈빛 한번의 부딪침으로도/ 만리장성 쌓는 경우고 종종 있다라고 쓰고 있다. 눈빛이란 공명을 의미한다. 참새 한 마리가 하늘로 치솟으면, 대나무는 패앵 소리를 내며 우듬지를 떨어 눈을 털어낸다. 뿌리까지 울리는 이 떨림은 그대로 하늘로 올라가 창공이 펼친 깊숙한 적막을 가만히 흔든다. 아주 작은 떨림이 거대한 떨림으로 확산되는 이 순간을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무엇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시인은 눈빛만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한 눈빛과 다른 눈빛이 만난 자리에서 사랑이 피어오른다. 불과 불이 만나 더욱 큰 불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말하면 어떨까. 눈빛이 마주친 순간 연인들은 깊이를 모를 사랑에 빠진다. 한 그루 대나무의 떨림이 참대숲 전체를 떨리게 하듯, 연인의 눈빛을 본 것만으로도 그의 몸은 주체할 수 없이 떨린다. 그는 왜 눈빛 하나에 이토록 온몸을 떠는 것일까? “저 창공의 깊숙한 적막을 그 떨림 속에서 확인했기 때문이다. 눈빛과 마주하기 전까지는 느낄 수 없었던 적막이 눈빛과 마주하는 순간 온몸으로 휘감아 들어온다. 가슴이 턱 내려앉는 이 느낌, 이 공명이 무엇보다 사랑이 비롯되는 지점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이미 눈빛 한번 부딪친 것만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뜨릴 수 없는 사랑의 만리장성을 쌓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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