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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도서]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안도현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목숨

 

 

 

  속을 보여주지 않고 달아오르는 석탄난로

  바깥에는 소리 없이 내리는 눈

 

  철길 위의 기관차는 어깨를 들썩이며

  철없이 철없이도 운다

  사랑한다고 말해야 사랑하는 거니?

  울어야 네 슬픔으로 꼬인 내장 보여줄 수 있다는 거니?

 

  때로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단 한 번 목숨을 걸 때가 있는 거다

 

  침묵 속에도 뜨거운 혓바닥이 있고

  저 내리는 헛것 같은 눈, 아무것도 아닌 저것도 눈송이 하나 하나는

  제각기 상처 덩어리다, 야물게 움켜쥔 주먹이거나

 

  문득

  역 대합실을 와락 껴안아 핥는 석탄난로

  기관차 지나간 철길 위에 뛰어내려 치직치직 녹는 눈

  - 안도현,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시인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했지만, 시인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노래할 리는 만무하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그 속에 섣불리 다룰 수 없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 의미가 너무나 커서 시인은 그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지 모른다. 수사법으로 따지면 역설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시인은 참으로 소중한 무언가를 이야기한다. 시인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반복할수록 아무것도 아닌 것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그 무언가로 승화된다. “때로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단 한 번 목숨을 걸 때가 있는 거다라는 구절을 보라. 아무것도 아닌 것에 왜 시인은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걸려고 하는 것일까? 아무것도 아닌 것이 없으면 그는 결코 시적인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대합실 석탄난로는 속을 보여주지 않고도 은근히 달아오른다. 대합실 바깥에는 소리 없이 눈이 내린다. 석탄난로가 달아오르는 대합실에서 시인은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본다. 철길 위로 기관차가 철없이 울면서 다가온다. 침묵해야 할 때는 침묵해야 하는 법이다. 시인은 철없이 우는 기관차에서 침묵을 깨는 어떤 소음을 듣는다. “사랑한다고 말해야 사랑하는 거니?”라는 시구에 담긴 의미를 생각해 보라. 이 질문에는 부정성이 내포되어 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듣지) 않고도 연인은 사랑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울면서 슬픔을 표현하지 않아도 눈빛에 담긴 슬픔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침묵이란 이런 것이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말하는 신비한 능력.

 

시인은 침묵 속에도 뜨거운 혓바닥이 있고라고 말한다. 침묵은 그 속에 뜨거운 말을 품고 있다. 가슴 속에 들끓는 말을 시인은 왜 침묵으로 갈무리하려고 하는 것일까? 언어로 표현되는 순간 뜨거운 혓바닥은 차갑게 얼어버리기 때문이다. 소리 없이 내리는 저 헛것 같은 눈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라는 말로 눈송이 하나하나에 담긴 상처 덩어리를 담아낼 수 있을까? 뜨거운 혓바닥을 언어에 담는 순간 사물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의 감각은 사라지고 추상화된 만이 우리 앞에 나타난다. 묘하지 않은가. 사물은 왜 언어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일까? 뜨거운 사물은 왜 언어만 만나면 차가운 대상으로 변해버리는 것일까?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는 저 헛것 같은 눈송이 하나하나를 시인은 제각기 상처 덩어리를 품고 있거나, 야물게 주먹을 움켜쥐고 있는 사물로 그려낸다. 상처 덩어리면서 동시에 움켜쥔 주먹이기도 한 저 눈송이는 왜 지금 이 순간 땅을 향해 천천히 내려오고 있는 것일까? 눈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침묵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눈을 통해 시인은 침묵 속에 담겨 있는 뜨거운 혓바닥을 상상한다. 저 작은 눈송이 하나에도 뜨거운 혓바닥이 들어 있다. 눈송이가 전하는 뜨거운 말을 들으려면 우리 또한 몸속에 품은 뜨거운 혓바닥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침묵은 침묵으로 맞아야 한다는 얘기다. 침묵으로 눈송이들이 풀어내는 상처 덩어리를 하나하나 보듬어 안아야 한다.

 

시인은 문득 석탄난로가 온몸으로 대합실을 와락 껴안으며 핥는 느낌에 빠진다. 달아오르는 몸으로 석탄난로는 대합실을 끌어안는다. 제 몸으로 자기보다 더 큰 세상을 달구는 것이라고나 할까. 기관차가 지나간 철길 위로는 거침없이 눈송이들이 뛰어내려 치직치직 녹아내린다. 석탄난로는 온몸으로 대합실을 데우고, 눈송이들은 뜨거워진 철길을 온몸으로 식힌다.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제 길을 가는 사물들을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말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자꾸만 무언가에 대한 욕망을 부추긴다. 무언가가 되는 일은 무언가를 지배하는 일과 같다. 무언가를 지배하기 위해 무언가가 되려는 이 마음의 맞은편에 시인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맞세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욕망의 저편에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욕망하는 사람은 없다. 무언가를 욕망하는 사람은 늘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욕망에 불타고 있다. 무언가에 대한 욕망이 다른 무언가에 대한 욕망을 부른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 사람은 더욱 더 그 말에 집착을 한다. 하루라도 그 말을 듣지 못하면 애가 단다. 왜냐고? ()는 사랑이라는 언어로 상대를 지배하려는 욕망에 흠뻑 빠져 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닌 말에 집착하여 그 너머에 있는 사랑의 진실을 그()는 놓쳐버린다. 사랑에 목말라 하면서도 정작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목숨을 걸고 그 사랑 속으로 뛰어들지 못한다. 온몸으로 대합실을 데우는 석탄난로와 온몸으로 뜨거운 철길 위에 떨어지는 눈송이들의 뜨거운 삶이 느껴지는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기에 그들은 목숨을 걸고 저편으로 가는 힘을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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