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블로그 전체검색
알고(考)

[도서] 알고(考)

유안진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상처

 

 

 

  어린 매화나무는 꽃 피느라 한창이고

  사백 년 고목은 꽃 지느라 한창인데

  구경꾼들 고목에 더 몰려섰다

  둥치도 가지도 꺾이고 구부러지고 휘어졌다

  갈라지고 뒤틀리고 터지고 또 튀어나왔다

  진물은 얼마나 오래 고여 흐르다가 말라붙었는지

  주먹만큼 굵다란 혹이며 패인 구멍들이 험상궂다

  거무죽죽한 혹도 구멍도 모양 굵기 깊이 빛깔이 다르다

  새 진물이 번지는가 개미들 바삐 오르내려도

  의연하고 의젓하다

  사군자 중 으뜸답다

  꽃구경이 아니라 상처 구경이다

  상처 깊은 이들에게는 훈장(勳章)으로 보이는가

  상처 도지는 이들에게는 부적(符籍)으로 보이는가

  백 년 못 된 사람이 매화 사백 년의 상처를 헤아리랴마는

  감탄하고 쓸어 보고 어루만지기도 한다

  만졌던 손에서 향기까지 맡아 본다

  진동하겠지 상처의 향기

  상처야말로 더 꽃인 것을.

  - 유안진, 「상처가 더 꽃이다」

 

 

어린 매화나무가 있고, 사백 년을 산 고목이 있다. 어린 매화나무는 한창 꽃을 피우고 있고, 사백 년 고목은 한창 꽃을 떨어뜨리고 있다. 그런데 구경꾼들은 어린 매화나무가 아니라 사백 년 고목에 더 몰려서 있다. 한창 피어나는 생명은 저만치 두고, 죽음을 향해 가는 고목에 사람들은 왜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일까? 둥치도 꺾인 지 오래고 가지도 구부러지고 휘어졌다. 몸통은 갈라지고 뒤틀어져 여기저기가 터지고 또 튀어나왔다. 어린 매화나무가 피운 매화와는 견주기 힘든 이 고목의 어떤 점이 사람들을 매혹한 것일까? 고목이 살아온 연륜일까? 나이 든 고목의 삶을 알고 싶어 사람들은 이리도 죽음과 가까운 고목 앞으로 몰려드는 것일까?

 

오랫동안 고여 있던 진물은 말라붙어 주먹만큼 굵다란 혹이며 패인 구멍들을 만들었다. 어린 매화나무가 자랑하듯 내보이는 매끈한 몸통에 비하면 참으로 험상궂기만 하다. 거무죽죽한 혹에 모양과 굵기와 깊이와 빛깔이 다 다른 구멍 또한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사람으로 따지면 어린 매화나무는 한창 청춘의 꽃을 피울 나이이고, 사백 년을 산 고목은 죽을 날을 받아놓은 노인과 다르지 않다. 청춘의 눈에 노인은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시인은 청춘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고목의 모습을 고목의 시선으로 보려고 한다. 고목의 시선이라고? 고목의 몸을 온통 뒤덮고 있는 상처에 그 시선은 집중한다.

 

아직도 흘러나올 진물이 남아 있는지, 개미들이 바삐 고목을 오르내린다. 그래도 고목은 의연하고 의젓하다”. 시인은 고목이 내보이는 이 모습을 사군자 중 으뜸답다는 시구로 표현하고 있다. 사군자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가리킨다. 옛 선비들의 정신세계를 상징하는 사군자 중에서도 으뜸이 바로 매화이다. 매화는 늦겨울(초봄)에 꽃을 피운다. 다른 꽃들은 피어날 엄두도 내지 않는 시기에 꽃을 피우는 매화를 보며 옛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지조를 지키는 존재를 떠올렸다. 여전히 추운 시기에 꽃을 피우는 것이니 매화는 얼마나 힘이 들까. 매화는 매서운 추위와 싸우며 꽃을 피운다. 상처가 많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사백 년 고목은 사백 년 동안 겨울 추위와 싸우면서 아름다운 꽃을 피워냈다. 찬란한 꽃을 피우는 만큼이나 엄청난 상처를 온몸에 새겼다. 시인은 이런 매화 고목을 구경하는 일이 꽃구경이 아니라 상처 구경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어린 매화나무는 화려한 꽃을 피워 사람들을 유혹하지만, 사백 년을 산 고목은 온몸에 난 수많은 상처로 사람들을 이끌어 들인다. 상처 하나 없이 이 풍진 삶을 살 수 있을까? 상처 깊은 이들은 그래서 고목의 상처를 훈장(勳章)”으로 보고, 상처 도지는 이들은 그래서 고목의 상처를 부적(符籍)”으로 본다. 훈장과 부적은 상처의 이면이다. 상처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존재만이 훈장과 부적을 온몸으로 끌어안을 수 있다는 말이다.

 

길어야 백 년을 사는 사람들이 사백 년을 넘게 산 고목의 상처를 온전히 헤아릴 수는 없으리라. 그래도 상처 입은 사람들은 온몸에 상처를 뒤덮은 고목을 쓸어보고 어루만진다. 고목을 만진 손에 향기라도 옳아온 듯 손 향기까지 맡아본다. 사백 년을 산 몸에는 어떤 향기가 풍겨 나올까? 시인은 상처의 향기가 진동할 것이라고 말한다. 상처의 향기는 말 그대로 고목이 살아온 삶의 향기를 의미할 것이다. 고목이 산 삶의 향기는 온몸에 새겨진 상처에서 뻗어 나온다. 상처가 곧 삶의 향기를 풍기는 기원이 되는 것이니, 상처야말로 찬란한 꽃보다 더 고목의 삶을 대변하는 것이 된다. 옹이 진 상처에서 화려한 꽃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삶을 발견하는 시인의 눈이 참으로 아름답지 않은가.

  

 
취소

댓글쓰기

저장
덧글 작성
0/1,000

댓글 수 0

댓글쓰기
첫 댓글을 작성해주세요.

PRID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