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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도서] 남한산성

김훈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말들이 넘쳐나는, 말들의 세상에서

- 김훈 󰡔남한산성󰡕

 

 

 

󰡔남한산성󰡕은 말들이 만들어내는 폭력적인 세상의 풍경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말은 관념이다. 관념은 실제 현실을 넘어 현실과는 다른 말들의 세계를 이룩한다. 대명 사대주의에 빠진 조선의 관료들에게 신흥 강대국 청나라는 결코 인정할 수 없는 오랑캐 나라이다. 그들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관념은 항상 그 강함을 무시한다. 오랑캐는 오랑캐일 뿐이라는 관념이 더 이상 오랑캐일 수 없는, 그래서 스스로 황제국이라 칭하는 청나라의 현실을 부정하는 근거가 된다. 대명(大明)이라는 정치적 상징물이 대청(大淸)의 현실을 왜곡하는 근거가 될 때, 세상은 이미 말들의 세상에 포섭된 관념의 세계로 돌변해버린다. 그러므로 그 관념이 강력한 적의 현실과 맞부딪치게 될 때, 다시 말해 전쟁이 현실화될 때 관념은 비로소 현실 속으로 스며든다. 하지만 적대적인 현실에서 관념의 언어들이 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남한산성으로 도피하는 사직의 주체들은 이로 보면 관념에 빠진 존재들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남한산성󰡕에서 말들의 싸움은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성안에서 벌어지는 대의(근본)와 방편(사세)의 논쟁이 하나라면, 문장의 성격으로 극명하게 비교되는 두 나라 왕(황제)들의 문장론의 차이가 다른 하나이다. 대의와 방편의 싸움은 척화파와 주화파로 갈려 사대부의 윤리를 둘러싼 말의 싸움으로 진행된다. 말의 윤리는 명분에 따라 결정된다. 척화파의 대의는 대명 사대주의의 원칙을 중시한다. 따라서 거기에서 벗어나는 어떤 행동도 비윤리적이라는 낙인을 찍어버린다. 주화파의 핵심인 최명길을 목 베라는 주청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것도, 최명길은 척화파의 원칙에 어긋나는 화친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칙으로서의 대의는 명나라가 청나라보다 강하다면 쉽게 현실화될 수 있다. 하지만 명나라가 청나라를 누르지 못하는 상황에서 대의는 지키는 사람만의 대의, 청나라 칸의 입장에서 보면 이 무력하고 고집 세며 수줍고 꽉 막힌 나라의 아둔함으로 인식될 뿐이다. 특히 산성 속에 틀어박혀 맞겠다는 것이지 돌아서겠다는 것인지, 싸우겠다는 것인지 달아나겠다는 것인지, 지키겠다는 것인지 내주겠다는 것인지, 버티겠다는 것인지 주저앉겠다는 것인지, 따르겠다는 것인지 거스르겠다는 것인지를 조선 조정은 분명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 이렇게 해도 안 되고 저렇게 해도 안 되는,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말들의 부풀림을 낳은 주된 원인이라 하겠다.

 

 

임금은 오랫동안 서안에 엎드려 있었다. 임금의 어깨가 흔들렸다. 신료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김상헌이 말했다.

- 전하, 적들이 비록 세찬을 내쳤으나 전하께서는 곤궁한 속에서도 선린의 법도를 보이셨으니, 전하께서 이기신 것이옵니다. 힘은 선한 근본에 깃드는 것이라고 신은 배웠나이다. 성심을 편히 하시고 더욱 방비에 힘쓰시옵소서.

임금의 어깨가 더욱 흔들렸다. 내관들이 임금 곁으로 다가갔다. 내관은 임금의 양쪽에서 머뭇거리기만 할 뿐, 흔들리는 임금의 어깨에 손대지 못했다. 최명길이 말했다.

- 전하,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이옵니다. 군병들이 기한을 견디듯이 전하께서도 견디고 계시니 종사의 힘이옵니다. 전하, 부디 더 큰 것들도 견디어주소서.

(󰡔남한산성󰡕, 248~249)

 

 

힘은 선한 근본에 깃드는 것이라는 김상헌의 말과,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이라는 최명길의 말은 진심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대의에 입각했든, 사세를 중시했든 그들은 사직을 살리기 위해 임금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 소문과 수근거림으로 들끓는 묘당의 말들(특히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는 영의정 김류의 말)에 비하면, 그들의 말은 분명한 관점이 있고 그 관점에 따라 현실을 해석하는 장처가 있다. 하지만 김상헌의 말에는 현실이 없고, 최명길의 말에는 현실은 있지만 나라로서의 자존심이 없다. 자존심을 버려야 살 수 있다는 현실론이 대세이긴 하지만, 대명 사대사상에 철저한 선비들에게 이러한 현실론은 결코 인정할 수 없는 수치로 인식된다. 청의 황제에게 보내는 항복 문서를 쓰라는 임금의 명령을 받은 사대부들의 행동을 생각해 보자. 정육품 수찬은 임금에게 올리는 글에 쓰지 말아야 할 언어(, 오줌 따위)를 사용하여 곤장을 맞고는 오래지 않아 죽었고, 정오품 교리는 고민하다 지병인 협심증으로 죽었으며, 정오품 정랑은 남한산성의 상황을 고구려의 안시성과 비교함으로써 자신의 글이 원천적으로 선택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선비들은 만고의 역적으로 몰릴까 두려워한다. 임금의 명령으로 항복문서를 썼을지라도, 그 죄는 궁극적으로 글을 쓴 자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선비로서의 대의는 역적으로 몰려서는 안 된다는 사세에 의해 쉽게 깨지지만, 청나라의 사세는 대명의 대의를 결코 넘어서지 못한다. 그리하여 묘당의 신하들은 청의 칸을 황극이라 일컫고, 칸의 나라를 천인소귀(天人所歸)’라 일컬은 최명길의 글을 대의를 명분으로 비판하고 있다. ‘뜻을 빼앗기면 모든 것을 빼앗긴다고 김상헌은 주장한다. 임금이 이미 항복을 선언한 마당에 신하들이 내세우는 은 과연 무엇일까? 최명길은 스스로 자신의 글을 글이 아니옵고 길이라고 밝힌다. ()과 길의 차이가 김상헌과 최명길을 소통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간다. 대의와 방편, 근본과 사세, 글과 길 등으로 말이 바뀌며 전개되는 말들의 싸움은 결국 살고자 하는임금의 의지에 의해 방편-사세-길의 관점으로 정리된다. 이로써 모든 것이 끝난 것일까? 한 나라의 군주가 청의 칸에게 세 번 절하고, 여섯 번 머리를 조아리는 것으로 말들의 싸움은 끝난 것일까?

 

청나라 칸의 문장은 거침없고 꾸밈이 없었으며, 창으로 범을 찌르듯 달려들었다.”고 김훈은 서술한다. “칸은 고사를 끌어내거나, 전적을 인용하는 문장을 금했다. 칸은 문채를 꾸며서 부화한 문장과 뜻이 수줍어서 은비한 문장과 말을 멀리 돌려서 우원한 문장을 먹으로 뭉갰고, 말을 구부려서 잔망스러운 문장과 말을 늘려서 게으른 문장을 꾸짖었다.”(󰡔남한산성󰡕, 284)고도 말한다. 지나치게 꾸미는 말을 경계하는 칸의 문장론은 대의를 중시하고, 전적을 인용하여 뜻을 넌지시 제시하는 조선 선비들의 문장과는 분명히 다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곳에서 해야 할 일(행동)이다. 부풀려진 말의 세상에 빠져 고정된 관념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일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김훈은 대장장이 서날쇠가 봄농사를 위해 똥물을 밭에 뿌리는 장면으로 󰡔남한산성󰡕의 결말을 짓고 있다. 말들의 싸움 속에서 서날쇠는 적진을 뚫고 왕의 격문을 성의 외부로 전했으며, 전쟁이 끝나자 봄농사를 지으려 하고 있다.

 

말만 앞세우고 행동으로 나서지 않는 사대부들의 삶과 서날쇠의 삶은 극명하게 대비된다. 사대부들이 대의를 앞세우며 산성 속에서 움직이지 않을 때, 서날쇠는 성문이 열려야 백성들이 살 수 있다는 마음으로 임금의 격문을 외부로 돌려달라는 김상헌의 요구를 기꺼이 수용한다. 말들의 세상에서 유일하게 비껴나 있는 서날쇠는 일상 생활의 감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이순신과 우륵에게 견준다면, 서날쇠는 김훈의 역사소설에서 확실히 진보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서날쇠는 허무의식에 빠져들 여지가 없다. 생활의 감각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그것은 곧바로 행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김훈이 서날쇠의 삶을 소설의 결말로 삼은 것은 그러므로 김훈 소설의 맥락에서 보면 획기적인 일이라 할만하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서날쇠가 일상의 감각에 충실하며 살아가는 와중에도, 조정의 관료(선비)들은 말들의 싸움 속을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이 진행되는 상황에서는 서날쇠의 일상 감각이 빛을 발하겠지만, 전쟁이 끝난다면 서날쇠의 삶은 어떻게 될까? 물론 대장장이의 삶으로 돌아가 평범한 삶을 살 가능성이 가장 많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전쟁을 잊고, 서날쇠를 잊고 다시 말들의 싸움 속으로 스며들어갈 것이다. 이순신과 우륵의 개인적 영웅주의가 서날쇠의 삶에 그림자처럼 드리워지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어떻게 살든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서날쇠의 건강한 삶에 끼어든 김훈의 지독한 허무주의는 자본주의의 승리가 이미 선언된 지금 이곳의 현실과 공명한다. 정말 길은 없는 것일까? 김훈의 역사소설로 대답한다면, 길은 없다. 그리고 그 길 없음의 허무적 미학이 이 시대 독자들의 마음을 울리는 근본적인 이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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