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없을 것 같은 젠틀하고 친절하고 기분 좋은 사람들이 가득한 이야기.
그래서 어떤 장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판타지라고 되뇌이게 되었다.
동성 연애, 소수자에 대한 존중, 예스키즈존,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와 대안 가족 등의 진중하고 무거운 개념들이 슬며시 부드럽게 이야기를 채워 나간다.
내 곁에 언제부터 거기 있었냐는 듯이 자연스럽게 그리고 당연하게.
7명의 친구들과 성희 이모가 이끌어 가는 서사는 각 단편들이 손에 손을 맞잡아 바턴을 넘기듯이 차분하게 진행된다.
엘리제를 위하여
찾아오고 싶은 사람들이 찾는 가게, 엘리제.
그런데 좋아서 좋은 게 아니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이 아프지 않기를,
걱정 같은 건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모두 잊을 수 있는 가벼운 것들뿐이기를,
나쁜 쪽으로 기웃거리게 하는 어른을 만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좋아서 좋아할 수 밖에 없는 마음.
이런 마음에 이유를 묻고 타당성을 따지고 효용성을 대며 판단하는 자는 누구인가?
"엘리제를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으로 만드는 거예요.
더 유명하고, 더 잘나가는 곳으로.
다들 좋아하는 곳으로.
그렇게 손님이 늘어 장사가 잘되면 인수할 사람도 나타나겠죠."
혜주의 미션.
'엘리제가 다시 예전 같아지면 좋을까?'
이제 망설일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된 페페.
어쩔 수 없이 들어간 피난처가 아닌,
무언가로부터 달아나고 숨기 위한 곳이 아닌,
그냥, 좋아서, 모여 있고 싶은 곳이기 위해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생긴 페페.
건물주가 된 혜주와 사장이 된 페페.
고요한 생활
수영은 아무도 없는 집을 상상한다.
상상 속 장면의 배경은 언제나 수영의 집이고,
수영은 혼자 살고,
자신의 집에 다른 사람은 들이지 않는다.
그러니 아무도 없는 집으로 영영 돌아오지 않는 사람은 당연히 수영 자신뿐이다.
돈을 열심히 모으고 되도록 쓰지 않으면서 10년 가까이 되었을 때 투룸 빌라에 첫 전세를 얻었다.
마음에 꼭 드는 것들로만 집을 채우고 싶어
침대를 살 때까지 한 달 가까이 맨바닥에 겨울 외투를 깔고 잡을 자고
커튼을 주문 제작하고
수건 한 장 허투루 사지 않아
수영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집.
어느 토요일 아침, 잠에서 깨 집안을 천천히 둘러보고는 그 집을 버릴 수 밖에 없던 수영.
그곳에 고인 생활의 냄새가 너무 익숙해서, 견딜 수 없어서.
"무서워."
태어난 순간부터 가지고 있는 어떤 기질이,
수영을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것이 이미 다 결정되어 있을까 봐.
버릴 수도 달아날 수도 없는,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수영.
"아니야, 수영아. 넌 그냥 너야. 너대로 사는 거야."
"넌 네 방식대로 사는 거야. 네가 정하는 거야."
수영이 스스로의 마음에 받아들일 수 있도록, 몇 번이나 지치지 않고 말해주었던 성희의 손.
그 손의 낯설고, 그리운, 온기.
둘 둘 셋
마당 한쪽에 유아차를 주차할 수 있는 구역을 만들고
하루 종일 자장가 소리가 들리는 지애의 카페.
평일 낮에는 근처 초등학교를 다니는 어린이 손님들이 지애의 카페를 찾아
학교에서 미처 끝내지 못한 이야기를 머리를 맞대고 하고
혼자 카페를 찾아 창가 자리에서 책을 읽거나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 가거나 일기를 쓰거나 편지를 쓰거나.
그렇게 카페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는 어린이를 신기하게 여긴 어른 손님이 다가가 말을 붙이려 할 때면
"손님, 다른 손님을 존중해주세요."
재빠른 지애의 제지로 머쓱해 하는 어른 손님.
신기할 것도 대견할 것도 없이, 그저 제 몫의 잔을 들고 자신만을 위한 자리에 앉아 있는 어린이.
미래에 어른이 될 존재하고만 대화하겠다는 것처럼 커서 뭐가 되고 싶은지 묻는 것이 아니라,
지금 눈앞에 있는 어린이와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텐데.
"손님은 어떻게 드릴까요?"
지애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성희를 따라 둘,둘,셋이라고 말하고,
끄덕이는 직원을 따라 나온 네 잔의 다방 커피.
처음 마셔본 지애 몫의 커피에 두근거리는 마음.
쿠키가 두 개일 때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가고 나서야 영화가 끝나다고 생각하는 혜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도중에 불이 켜지는 극장을 경멸하는 혜선.
혜선을 좋아한 예리.
이별을 하고,
그리고 어쩐지 자주 찾던 예술 영화 전용 극장 홍보팀으로 취업을 한 예리는
비가 많이 오던 금요일 밤 혜선과 조우하게 되었다.
뒷모습뿐인데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던,
엔딩 크레디트가 시작되고 어둠 속에 다른 사람과 팔짱을 낀 채로 움직이여고 하던 혜선에게
"이 영화는 엔딩 크레디트 뒤에 쿠키 영상이 있습니다."
"중요한 쿠키 영상이 두 개나 있습니다."
예리의 다급함과 망설임 없는 혜선.
엔딩 크레디트가 끝나고 상영관 안의 조명을 켜고 희미하게 보이는 쿠키 영상.
구르는 재주
"포기하지 마!"
"포기할래!"
"한 번만 더 하면 이번에는 된다, 진짜!"
"이번에도 안 된다고, 진짜!"
침대 매트리스 끝에 두 손을 짚고 그대로 발로 바닥을 찼다.
옆으로 넘어지지 않고 그대로 앞으로 구르기, 결국 성공.
창문을 열자 성희 이모는 아직 집 앞에 서 있었다.
"이모, 나 굴렀어!"
안내 데스크 일을 계속 하며 108번째 데모곡에 제출한 가사 시안이 채택되어 작사가로 데뷔했다.
가끔 마감 기한이 촉박할 때는 몰래 한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머리카락으로 가렸다.
파도가 온다
제 몸보다 훨씬 커다란 서프보드를 들고서 바다를 향해 달려나가는 지민.
바다가 잘 보이는 위치에 놓인 선베드에 자리를 잡은 소정.
"원 웨이브, 원 서퍼. 한 파도에 한 사람만 타는 거예요."
"그냥 알아요. 이건 저 사람 파도구나, 내 파도는 저기에 오는구나."
스키를 탄 지 10년이었다.
10년 동안 쌓아왔던 것들이 아무 의미 없게 되어버렸다.
다 끝나버린 것 같았다.
"이 작가는 서른다섯 살에 첫 작품을 썼대."
"이 책은 작가가 쉰 살에 쓴 거야."
"작가가 이 책에 나온 여행을 떠난 게 스물일곱 살이래. 그리고 지금 예순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걸어서 여행을 다닌다고 하네."
"은행원이었다가 은퇴하고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대."
"대박! 저기, 제 파도가 있어요!"
제 키보다 큰 서프보드를 번쩍 들고서 내비게이션에 이름도 찍히지 않는 작은 해변에 홀로 있는 지민.
모든 파도가 지민의 파도였다.
배턴 터치
"어른들이 너한테 배턴을 주기만 하네. 네가 다 들지 않아도 돼. 너도 얼른 넘겨줘."
이어달리기는 체육대회의 마지막 종목으로 어릴 때부터 약한 아이였던 아름은 완전히 지쳐 있었다.
"아무래도 세정이가 대신 뛰는 게 좋겠어. 아름이 넌 쉬어야 할 것 같아."
"아니야, 나 뛸 수 있어."
배턴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아름아!"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고 아름은 배턴을 놓쳤다.
"이모, 나 미션 완료했어."
"그래? 어떤 보상을 주면 좋을까. 원하는 걸 말해봐."
"이모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터치.
답장은 없어도 괜찮아
얼마큼 나이를 먹으면 어른이 되는 걸까.
나보다 더 어른이 된 내가 지금의 나를 만난다면 어떤 말을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