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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게임

[도서] 와일드 게임

에이드리엔 브로더 저/정연희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와일드 게임>이라는 제목만 봤을 땐, 내용을 짐작할 수 없었다. 책 소개를 봤을 땐 당연히 소설인 줄 알았다. 세상에 어떤 엄마가 자고 있는 14살의 딸을 깨워서 '내가 네 아빠 친구랑 키스를 했어. 나 사랑에 빠진 것 같아'라는 고백을 한단 말인가. 그런데 책을 읽으며 세상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벌어지는 곳이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당신이 상상할 수 없다고 세상에 없는 것으로 만들지는 말아줘'라는 황정은 작가님의 말을 떠올리면서.

 

이 책은 회고록이다. 다시 말해, 작가가 어린 시절 직접 겪은 일을 재구성한 책이다. 앞서 말했던 '자는 딸아이를 깨워서 자신의 불륜을 고백하고, 더 나아가 비밀을 지켜주고 불륜을 도와달라고 하는 엄마'는 누구보다 자의식이 강하고, 딸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엄마였다. 사실 힘든 일을 겪기도 했다. 엄마 말라바는 알코올 의존증이 심해서 걸핏하면 술을 마시고 폭력을 휘두르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말라바의 첫 결혼은 실패로 돌아갔고, 처음으로 낳은 아이가 2살 무렵 갑작스럽게 질식사했다. 그러다 두 번째 남편 찰스를 만났는데, 찰스는 돈도 많은데다 가정에 충실하고 엄마를 사랑해주며 아이들에게도 친절한, 완벽에 가까운 남편이었다. 그러나 이런 완벽남에게 '건강 문제'가 생기고 만다. 뇌졸중 때문에 신체를 예전처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주인공 에이드리엔은 이런 엄마의 심정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던, 어찌 보면 조숙한 딸이었다. 남아 있는 앨범으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한 '큰오빠'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로 주인공은 엄마의 운명을 안타깝게 생각해왔다. 그렇기에 엄마도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결론을 도출했으며, 엄마가 행복하다면 의붓아버지의 친구와 바람을 피운 것 정도는 눈감아주고 그들이 더욱 마음놓고 진도를 나가도록 돕기로 했다. (덧붙이자면, 책 제목인 '와일드 게임'도 그 과정에서 나온 말이다. 요리 칼럼니스트인 말라바가 사냥을 좋아하는 불륜남을 더 자주 만나기 위해 '와일드 게임(야생에서 사냥한 동물)'을 주제로 요리책을 써 보겠다고 한 것이다.) 말라바는 항상 에이드리엔에게 말했다. "우리는 온전한 전체의 반반이야." 에이드리엔은 그 말이 너무나 듣기 좋았고, 자기에게 와서 불륜 상대가 자신을 어떻게 대했는지 미주알 고주알 이야기하는 엄마와의 시간을 학수고대했다.

 

사실 말라바가 에이드리엔을 그렇게 조숙한 딸로 만들었던 것 같다. 엄마가 아빠의 친구와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은, 14살의 딸이 감당하기에 너무나 크고 불편한 진실이 아니었을까. 자신이 짝사랑하는 남자아이 이야기를 엄마에게 털어놓을 법한 나이에 에이드리엔은 거꾸로 엄마의 사랑과 비밀에 매이게 된 것이다.

 

행복할 자격이 있는 엄마. 아버지의 친구와 바람을 필 때, 그리고 그 이야기를 딸이 들어줄 때 가장 행복한 엄마. 그런 엄마를 위해 에이드리엔은 다시 오지 않을 자신의 청춘을 허비해 버렸다. 에이드리엔은 엄마를 동경하고, 심지어 우상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보다 엄마를 우선시했다. 엄마의 연애사로 충분했기 때문에, 자신은 그 피끓는 청춘기에 연애도 하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에이드리엔의 청소년기에는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커다란 공백이 생겼다. 엄마의 비밀을 먹고 쑥쑥 자란 그것은 성장을 해 가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블랙홀 같은 것이어서 에이드리엔의 마음을 계속 짓눌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게 되면 중요한 단 하나, 진실한 관계를 맺을 가능성을 잃는다(84면)"고 했던 말처럼, 에이드리엔은 마침내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까지 했으면서도 그에게 모든 것(즉, 엄마의 비밀)을 털어놓지 못한다.

 

예상 가능하듯이, 에이드리엔의 삶도 평탄하지 않다. 그녀가 결혼한 남자는 엄마의 불륜상대의 입양 아들이다. 엄마와 불륜상대는 순식간에 사돈이 되었다. 소설보다 더 소설같다. 마침 불륜이 표면으로 드러나며 엄마의 연애사도 끝날 위기(?)에 처해 있었다. 보통의 엄마라면 이런 순간에 자신의 행동을 크게 반성하며, 딸의 행복한 앞날을 위해 행동을 조심할 것이다. 그러나 말라바는 달랐다. 그녀는 불륜상대와 사돈이 된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역이용해, 딸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자신이 제일 주목받는 여인이 되기로 한다. 이를 위해 에이드리엔이 결혼할 때 물려주기로 했던, 자신이 자기 엄마에게서 받은 휘황찬란한 목걸이를 딸 대신 자기가 건다.

 

엄마의 부모님이 엄마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처럼, 정서적으로 방치된 아이들이 종종 사람 대신 물건에 집착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

엄마에게 이 목걸이는 엄마의 사랑을 상징했다. (...)

엄마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보물을 내게 주려는 것이었고, 그 생각에 내 심장은 거의 터질 것 같았다.

250면

 

에이드리엔이 그 목걸이를 받는 순간을 얼마나 학수고대했는지도 모른 채. 아니, 알았을 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말라바에게 중요치 않았다. 그녀에게 딸의 마음이 다치는 것보다 더 중한 일은 자신의 불륜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책 전체에서 이 장면이 가장 충격적이었다. 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일 수 있는 결혼식마저 자신을 위한 날로 만들려고 하는 엄마라니. 이런 엄마가 있다니. 우리 엄마는 나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뭐든 해줄 수 있는, 말라바와 정 반대인 엄마이다. 나 역시도 자라나는 내 딸이 행복해진다면 뭐든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대부분의 엄마들이 이럴 것이기 때문에, 딸의 결혼식에서 스포트라이트를 가로채는 말라바가 나에게 던진 충격은 오래 갔다.

 

또 한 가지. 엄마의 보물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에이드리엔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고 표현했다. 나는 엄마에게 사랑받는 것을 당연하게만 생각해 왔는데, 그게 누군가에게는 이토록 가슴 벅차고 감동적인 일일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웠다. 동시에 이전에 읽었던 최진영 작가님의 소설 한 구절이 생각났다. '엄마라고 꼭 자식을 사랑해야만 하는 걸까'. 어릴 땐 당연하게만 받아들였던 것들이 사실은 전혀 당연하지 않기에, 내가 받은 모든 것을 감사하고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 가고 있다.

 

예전의 내가 이 책을 읽었다면, '우리 엄마가 말라바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엄마에게 감사해야지' 정도에서 감상이 멈췄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나도 이제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딸이자 엄마로서 읽은 이 책에서 나는 '친구같은 부모, 친구같은 자식'의 폐해를 발견했다. 예전에 어디선가 친근한 부모는 좋지만, 그렇다고 부모가 자신의 친구에게 하듯 아이를 대해서는 안된다는 구절을 봤던 것 같다. 그리고 말라바와 에이드리엔을 보고 그것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은 말라바의 마음은 가벼워졌을 지 몰라도, 그녀의 '감정 쓰레기통' 역할을 하는 딸 에이드리엔의 마음은 그의 백배 천배로 무거워졌고 그 무게가 그녀의 여생을 계속해서 짓눌렀기 때문이다.

 

엄마를 너무 사랑해서 엄마의 비밀을 자신의 것처럼 지켜주었지만, 그게 자신을 갉아먹고 있었다는 사실을 성인이 되어서야 깨달은 에이드리엔. 결국 그녀는 "타인의 삶에 빠져볼 때 자신에 대해 깨달을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지 모를 거야(203면)"는 말을 듣고, 수많은 책을 탐독하며 감정과 비밀의 깊은 수렁에서 서서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자신만은 외할머니로부터 말라바를 거쳐 자신에게까지 이어져 온 그 비뚤어진 모녀간의 유대관계를 털어버리고, 자신의 딸에게는 대물림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어린 딸에게 엄마가 필요할 때면 언제든 그 자리를 지켜주겠다고 결심하며.

 

에이드리엔이 결국에는 치유되었다는 것을 다음의 문장을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자라면서 믿었던 것처럼 우리는 온전한 전체의 반반이 아니었다. 엄마는 엄마라는 한 개체였다. 내가 나라는 한 개체이듯. 그리고 나는 내가 엄마처럼 되지 않을 때마다, 더 많이 내가 된다는 것도 알았다.

329면

 

내 딸도 나와는 독립적인 개체라는 사실을 알고, 자신의 인생을 주체적으로 꾸려나가며 행복하길.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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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워블로그 아자아자

    반갑습니다.
    같은 책을 읽고도 이런 멋진 리뷰가 나오니 우수 리뷰에 선정되시는군요.
    줄거리를 잘 요약하시면서도 곳곳에 나의 감정을 토로하고 피력하는 힘.
    축하합니다.

    2021.10.27 21:52 댓글쓰기
    • 노아

      안녕하세요~ 같은 책을 읽었다고 하셔서 아자아자 님이 쓰신 리뷰도 읽어봤습니다. ‘하루를 오롯이 이 리뷰애 매달렸다. 오래 남을 책이다’ 라고 하신 부분이 특히 공감이 되네요.. 술술 읽었지만 이 느낌을 어떻게 서평으로 전달해야 할까 싶어 저도 막막했거든요; 아자아자 님 리뷰도 좋았고, 잘 읽었습니다 :)

      2021.10.27 22:31
  • resilience

    노아님의 따님이 독립적인 개체로 자신의 인생을 주체적으로 꾸려나가며 행복해지길 바란다는 리뷰의 마지막 부분이 인상 깊었습니다. 좋은 리뷰 잘 읽고 가고 우수 리뷰 선정 축하드립니다.

    2021.10.27 23:13 댓글쓰기
    • 노아

      부족한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2021.10.28 09:52
  • shh0218

    저도 와일드게임이라는 제목만을 보고서는 소설일거라 제 마음대로 생각해버렸습니다.
    그런데 후기를 조금 읽어보다 제 생각과는 다른 책이라 후기에 빠져들게 되었네요.
    자신의 불륜을 딸에게 고백하다니... 헉!
    후기를 읽어나갈수록 이 책이 점점 더 궁금해지고 읽고 싶어졌어요.^^
    좋은 후기 잘 읽고 갑니다. 그리고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감사해요.

    2021.10.28 19:37 댓글쓰기
    • 노아

      저도.. 제목도 그렇고 심지어 간략한 줄거리를 읽고도 소설이라 생각했었어요; 회고록이지만 정말 1인칭 소설 같은 책이었네요. shh0218님도 재밌게 읽으실 것 같아요~! 리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2021.10.28 21:15

PRIDE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