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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고 고른 말

[도서] 고르고 고른 말

홍인혜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카피라이터이자 만화가, 시인인 홍인혜 작가님의 <고르고 고른 말>을 읽었습니다. 이력만으로도 한 사람이 저렇게 다재다능할 수가 있나.. 하는 감탄을 자아내지요. 작가님이 언어를 고르고 고를 수밖에 없는 ‘언어생활자’라는 말도 납득이 갑니다. 작가님 정도는 아니지만, 저 역시 한때 통번역계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창작’과는 조금 다르게, 원문을 최대한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단어와 표현을 고르려고 고민했던 기억이 나기도 했구요.


사실 저는 이번에 작가님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는데, 책을 봐도 그렇고 인스타를 봐도 작가님은 사소한 것에 감사할 줄 아시는 따뜻한 분이신 것 같습니다. 언어를 고르고 또 고르는 섬세함으로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다 보니, 사람과 같이 있는 시간에 에너지를 많이 쏟아 피곤해하는 내향적인 사람이 되신 것 같기도 하구요. 글을 읽으며 저와 비슷한 면이 너무 많아서 놀랐습니다(물론 다른 면도 있었지만요;) 그래서인지 공감 가는 문장들이 너무 많아서, 처음부터 마구 (마음속으로) 밑줄을 그으며 읽다가 문장들을 한번 더 추려 보기도 했습니다.


언어생활자이신 작가님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고르셨을 단어와 문장들인 만큼, 모든 표현들이 좋았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렇지만 어떤 문장들은 특히 더 공감이 갔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니, 제가 이러쿵저러쿵 설명을 하는 것 보단 작가님이 쓰신 문장을 읽어보는 게 좋겠지요.

 


 


엄마에게는 엄마의 가치관이 있었다. 그 범위 안의 행복이 있었다. 딸이 갔으면 하는 길은 당신이 일평생 쥐고 왔던 지도 안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긴박한 순간에 탈주하는 딸에게 엄마는 기왕의 관습과 세계관을 넘어 한 인간으로서 공감과 응원을 건넸다. 그 인간을 그렇게 빚어낸 인간으로서.
- 50면


어떤 상황에서도 딸을 응원하는 엄마의 모습에서, 저 역시 한평생 엄마에게 응원을 받은 딸임을 기억하는 동시에 아직은 너무 어린 제 딸에게도 그런 엄마가 되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특정 색을 지속적으로 좋아하면 지인들에게도 영향을 준다. 내 친구들은 지나가다 민트색을 발견하면 나를 떠올리고, 가끔 민트색을 보고 내가 떠올랐다는 팬도 있다.
- 55면


얼마 전에 ‘나를 정의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말하는 거다’라는 요지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 글을 쓴 분도 카피라이터가 꿈이었고, 이런 식의 자기 PR을 광고계에서 처음 배웠다고 했습니다. 그 분이 롤모델로 삼는 분들은 카피라이터 출신의 작가라며, 홍인혜 작가님을 거론하기도 했지요. 그 글이 묘하게 겹쳐 보여서 더 반갑게 읽은 문장인 것 같습니다.



생경한 땅에서 활짝 열린 감각들 틈으로 스며드는 낭만에 취할 수 있다면 여행은 그것만으로 대성공이다. 맨밥처럼 밋밋한 일상에서 도무지 느끼기 힘든 낭만을 되찾는 것만으로도 여행의 이유는 충분하다.
-60면


시국도 시국이지만, 올해 아기가 태어난 이후로는 여행을 거의 잊고 살았던 것 같아요. 미국과 쿠웨이트에 각 1년간 살아 봤었고, 한 때는 해외여행을 매년 한 번 이상 꼭 갔었던 사람으로서 저 문장에 공감했습니다. 아직 저에게 아름답게 기억되는 시간은 몇 년 전 겨울 일본의 공원을 걷던 평일 오후거든요. 찬 공기 속에서도 하루 중 가장 따뜻했던 그때의 풍경과 같이 여행한 가족들의 기뻐하는 모습도 좋았지만, 문득 ‘지금이 더 좋은 건 한국에선 출근해 있어야 할 시간에 가족들과 한가하게 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이것도 여행의 낭만이 아닐까요.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라는 말은 그를 위한 변호라기보다 나를 위한 변호였다.(…) 그러니까 그는 괜찮은 사람이지만 실수로 나를 서운하게 만든 사람이어야 했다. 하지만 친구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에게 나쁘게 굴면 나쁜 놈, 미워해도 되는 놈이라고.
-82면


이 부분을 읽으며 뜨끔했어요. 저 역시 ‘나를 위한 변호’를 하고 다녔는데, 이제 제 감정에 좀 솔직해져봐야겠단 생각이 드네요.



“아꼬와, 아꼬와.” (…) 나는 너와 함께한 귀한 시간이 그토록 빠르게 흘러가버리는 게 아까웠다. 신생아실에 모인 어른들은 사랑스러운 너에게 무엇이든 더 해주고 싶어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했다.
-106면


우리 아기를 처음 본 순간 저도 그랬지요. 이 마음을 기억하기 위해서 이 문장들을 기록해 봅니다.
 


소용없는 물건을 집에 쌓아두고 거주 환경을 망치는 것이야말로 낭비 중의 낭비였다. 추억은 소중하지만 과거의 망집으로 현실이 협소해지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을까.
-120면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작가님은 결국 버리기 전의 물건들을 모아놓고 미련을 털어버리는 ‘유예 공간’을 만드셨다고 합니다. 저 역시 ‘이건 물건이 아니라 추억이야’라며 남편을 식겁하게 만들고 있는데, 이 문장을 보고 반성했네요.



부끄럽게도 나 역시 타인을 압축시켜 간편하게 해석하는 납작 렌즈를 가지고 있다. 나를 풍부하면서도 미묘한 존재로 인식하고, 남을 단순하고 1차원적으로 해석하는 오만함이 고개를 든다.
-145면


항상 경계해야 할 마음가짐인 것 같아요..!



그렇다면 진정 기록하고 소중히 간직해야 할 것은 부모님의 음성과 표정, 자세와 몸짓이었다. (…) 진짜 차곡차곡 갈무리해둬야 할 것들은 그런 것들이었다.
-165면


예전부터 노력은 하고 있었지만,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네요. 부모님을 갈무리할 기회가 있을 때 많이 해 둬야겠습니다.



야채라고 하면 도마 위에 정갈하게 놓인 당근이나 양파를 떠올리고, 채소라고 하면 밭에서 쑥 뽑힌 무나 쑥갓을 떠올린다.
-181면


음.. 이 책에서 거의 유일하게 제가 작가님과 반대로 생각했던 부분이에요. 저는 야채 하면 밭에서 바로 뽑힌 것들이 떠오르고, 채소가 손질된 야채일 것 같거든요.



“손님이 왕이면 나는 황제다”
-219면


저도 프리랜서 생활을 하면서 클라이언트가 왕이라는 근성이 몸에 배어 있어서, 직장 생활 중에도 저에게 통번역을 부탁하는 분들을 클라이언트로 보고 주장을 굽히거나 거절을 똑부러지게 못 할 때도 있었습니다. 저에게도 저런 마인드가 필요할 것 같아요!



특별할 것도 없는 나의 입술에서 어떤 이의 영혼을 물들일 고운 빛깔이 흘러나올 수 있다니. 대문호도 아닌 내가 누군가 내내 만지작거리다 머리맡에 두고 잠들 소중한 문장을 빚어낼 수 있다니.

이야말로 언어의 기적이다.
-255면


예쁜 말 고운 말, 칭찬 한 마디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읽는 내내 밑줄 긋고 표시하다 결국 저도 문장들을 ‘고르고 골라야’ 했을 정도로 좋은 문장과 표현들이 쏟아져 나왔던 책이었습니다.

홍인혜 작가님의 다른 에세이, 만화, 시도 궁금하네요. 조만간 읽어봐야겠습니다.




* 출판사에서 도서만을 제공받아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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