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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도서] 비

마르탱 파주 저/발레리 해밀 그림/이상해 역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퀴즈 :

부드럽거나 날카롭다. 차갑거나 뜨겁다. 짧거나 길다.

여러 언어로 말하고 다양한 춤을 알고 있다.

성격은 열정적이고 소심하고 발랄하다.

때론, 느닷없이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갑작스럽기도 하다.

여행과도 같다. 문명, 피신처, 천장들이 날 떠난다.

식초를 능가할 정도로 시다.

정답 '비'

 

 

 

나는 칼베거 흐베라벨리 온천지대에서 마셨던 차를 더올린다.

아이슬란드 전통에 따라, 그곳에서는 검은 차가 든 쇳잔을 뜨겁게 달궈진 땅 위에 올려놓고

비가 내리기를 기다린다.

마침내 비가 내리고 잔이 가득찬다. 물이 끓어오른다. 차가 우러난다.

동시에 내 감정들이 내 몸에서 넘쳐 흘러 마치 나 자신이 우러나는 것처럼 사방으로 퍼져간다.

비에 닿으면 모든 것의 향이 해방된다.  p53

 비는 종교를 희석시키기도 하고 무신론으로부터 해방시켜주기도 한다.

전지구가 교회가 되고 몸짓 하나하나가 의식이 된다. 

 비는 때론 우리에게 재앙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작가는 비가 내릴 때 성서에 나오는 대홍수를 떠올린다. 그는 배에 태울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록을 작성한다.

비오는 모습을 보며 노아의 홍수까지 떠올리는 건 좀 비약이라고 생각하던 나는 잠시 후 부지런히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떠올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키득거린다.

 

'마르탱 파주'작품은 처음이다. 책을 읽는 동안 그의 중요한 매력이 시니컬함에 있음을 금새 발견했다. 그것은 사포처럼 거칠기만 하기보단 샘물처럼 신선해서 독자에게 정신의 환기를 촉발한다.

이를 테면 지구를 오염시키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따끔히 꼬집는 이 부분.

산성비가 우리 두피를 공격한다고 해서 호들갑을 떨어야 할까? 머리카락이 빠진다면 우린 마침내 이발사들과 끝없이 이어지는 그들의 독백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모자도 다시 유행시킬 것이다. 

 

 우리는 쓰레기를 아득히 먼 곳으로 보내버린다. 인도나 코트디부아르 쓰레기매립장에서 삭은 그것들은 하늘로 올라가 구름 속을 떠돌다가 다시 우리 머리 위로 떨어진다.

그렇다면 그것들을 우주로 보내버려야 할까? 그 경우에는 생활 쓰레기 혜성이 나타나지 않을까 심히 염려스럽다.  p.25 

 우리가 우주로 보내버린 쓰레기가 '혜성'이 되어 우리에게 떨어지는 상상을 해보시라.

그런데도 우린 산성비를 맞아 머리숱 줄어드는 것만 걱정하고, 우리가 사는 지구가 오염되는 것은 상대적으로 덜 염려하고 있진 않는지.

같은 맥락에서 파주는 빈정거리는 목소리를 낸다. 오염된 물은 우리 식탁에 오르는 과일과 야채에도, 우리의 와인과 치즈에도 들어 있으니 우산을 쓴다 하더라도 우리는 산성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그러니 차라리 마음 편히 나가서 비를 맞으라고.

 

이 책은 어떤 문장에선 사뿐사뿐한 발걸음 같고 또 다른 단락으로 가면 개구장이의 뜀뛰기가 되기도 한다. 비를 맞는 모습과 관련해 내 맘을 밝게 물들이는 대목!

<비는 어린 시절의 유전자들을 품고 있다. 우리는 호스로 물을 뿌리며 장난을 쳤고, 물웅덩이에서 폴짝폴짝 뛰었고, 신이 나 물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우리는 남몰래 지저분한 개구쟁이로 되돌아가는 것을 자신에게 허락한다  p.35>

 유년시절 예보 없이 갑자기 비가 내리는 날, 엄마는 단 한 번도 우산을 학교로 가져다 준 적이 없었다.

교문에 발걸음이 가까워지면 '울 엄만가?' 하는 표정으로 문앞에 선 어른들을 흘낏거리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우리 삼형제는 교문앞에서 멈춰서지 않았다. 아무리 비가 와도 엄마가 절대 안온다는 것을 금새 깨닫고 그저 쏟아지는 비와 물웅덩이를 맘껏 즐겼다. 그때 우리에겐 비를 피하는 것보다 첨벙거리며 노는 것이 더 시급한 과제였다.

이제 어른이 된 나는, 비가 오면 아이와 함께 비옷을 입고 밖으로 나간다. 다섯 살된 아들녀석은 무지개 빛깔 땡땡이 장화를 신고 물웅덩이 위에서 난리법석을 친다.

집안에서 창을 통해 비 쏟아지는 모습을 볼 때도 아이의 눈은 진지하고 반짝거린다. 그 순간 난 작가가 비를 대하는 자세가 생래적으로 나보다 아이와 휠씬 가까움을 인정한다.

 

비는 파주에게 천하무적이다. 그는 광대하고 고요한 비를 느끼고, 옆구리에 등을 기대 그 너그러운 괴물의 호흡에 귀를 기울인다.

 비가 내리면 스포츠는 흥미로워진다. 축구선수는 균형을 잃고 넘어지기 일쑤고, 근육질의 몸은 서툴지만 아름다운 동작을 취한다.

이 대목에서 내 머릿속은 하이퍼텍스트를 클릭하듯 영화 '국가대표'의 한장면이 무심결에 연결된다.

변변한 훈련장소도 없이 점프대 공사장에서 훈련하던 국가대표 스키점프 선수들은 눈에서 미끄러지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기 위해 항상 경사면에 물이 흐르게 한다. 비가 오면 흐르는 빗물 위로 스키를 타고 내려오면 되기 때문에 물이 필요없다. 그 동안 걸핏하면 물이 안나오기도 했다.

그러다 팀 해체 위기의 순간에 비가 온다. 선수들은 출입이 금지된 경기장 안으로 너나 할 것 없이 모여들어 비를 맞으며 스키점프 점프대를 향해 질주한다.  이.심.전.심!

 

파주의 비 예찬은 태양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그는 비를 왕따, 외로운 아이, 거지 등등 주변부에 소외된자로 비유한다. 반대로 태양은 눈을 깔도록 강요하는, 늘 켜져 있는 플래시다.

그것은 복종의 상징이다. 파주는 '아름다운 날씨'라는 개념조차 비판한다.

태양은 텔레비전이다. 그 전파에 홀린 우리는 우리의 삶,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사야 할 새로운 것들을 넋 놓고 바라보는 시청자들이다.

비는 실존적 놀이를 부추기며 우리를 행위자로 만든다. 태양이 우리를 감옥에 가두고 광선들이 창살인 반면 비는 우리를 달아나게 하고 뛰게 한다. 피난처는 우리가 있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향해 나아가는 곳이다.

태양을 이렇게 부정적인 뉘앙스의 '강성'으로 표현한 글은 거의 처음 본듯하다.

사물인지란 걸 하게 되고서부터 줄곧 내게 태양은 밝음, 비는 고독이었다. 

비가 내리면 우리는 발아한다.

파주는 자신의 몸에 비의 지문이 찍히는 걸 좋아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빗방울은 보석이다.

그것들을 따서 깨물면 입천장과 혀 아래서 폭발하는 과일이기도 하다.

작가는 '비'의 개념을 호기심 많은 꼬마아이처럼 자기만의 방식대로 뒤집어 보거나 엉뚱하게 풀어낸다.

<나는 내 구두 굽의 압력이 비의 메커니즘을 작동시키기를 희망하며 자주 파리의 거리를 걸었다. 나는 구름의 사격을 촉발시키는 비밀들이 존재한다고 확신한다.>

구두 굽의 압력이 구름의 사격을 촉발시켜 비를 내리게 한다니. 와! 사.랑.스.럽.다.

이런 표현도 있다. 구름의 자궁이 수축되어 하늘의 배가 살짝 열리고 거기서 양수가 흘러나와 우리를

덮친다는. 천성적 '예민함'을 타고 난 나는 이 순간 뱃속에서 자궁이 쿨렁하고 요동치는듯한 현상을 겪는다. 

비는 리듬이 있고 창조에 참여한다. 이야기들은 비가 올때 씌어진다. 화가는 빛과 땅의 존재이고 작가는 대양이 피조물이다.

 

마르탱 파주의 '비'는 한 편의 시같은 산문이며 '비'예찬론이다.

도,레,미,파,솔,라,시,도 '음계'를 자유자재로 연주하는 하나의 짧은 교향악 같은 느낌.

비는 '음악'이라는 악보 위에서 마음껏 춤추는 음표다.

작가는  「A(비) = B이다」의 방식으로 끊임 없이 비를 다른 '사물'이나 '추상적 개념'에 빗대어 은유한다.

여기에서 A와 B사이에는 은하수처럼 다양한 창조력이 존재한다.

비라는 물리적 현상을 노아의 방주에서 환경오염, 괴물의 호흡, 그리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보물로까지 풀어내는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과 묘사는 가히 연금술사 수준이다.

비에 대한 다양한 표현은 작가가 태양을 미워하고 비를 일방적으로 편애하는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때도, 독자인 내게 별 거부감 없이 단락을 끝까지 읽도록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이 책은 날카로운가 하면 발랄하고 어느 순간엔 철학적 사유를 이끌어 낸다. 때로 에로틱하기도 하다.

책 속에서 숨김없이 발휘되는 작가의 기발함은 보물찾기에서의 스릴을 선물한다. 발견하는 순간 다음 보물을 또 빨리 찾고싶게 만들 정도로 매력적인 긴장감. 더불어 스테레오 타입인 나 자신의 고정관념도 빨리 던져버리라고 외치는 내면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제 가을비가 내리기만을 기다린다. 매번 다른 이름을 비에게 붙여주려는 계획으로 눈은 반짝거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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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도 마음에 드는 부분이 많아서 많이 옮겨 적은 책입니다^^

    2012.02.21 00:37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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