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떠올렸을 때 함께 생각나는 단어, 이미지는 어떤 것인가요? 하얗다. 주름. 거동이 불편하다. 고집. 노약자. 쾌쾌한 냄새. 지하철 무개념 에피소드들. 아마도 저를 포함한 적지 않은 분들이 연상할 것들일 것 같습니다.
그럼 노인은 우리와 다른 종족(?)일까 고민해 보았습니다. '노인'으로 한데 묶어 구분짓고 부정적 편견 하에 타자화 해도 정말 괜찮은 사람들인걸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이 책을 통해 정확히 어디에서 내가 오해하고 있었는지 슬프게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아닐거란 착각이지요. 나는 저렇게 병약하고 고집세고 가족들의 마음을 어렵게 하고 다른사람 도움없이는 일상을 영위할 수 없는 노인이 되지 않을 거라는 착각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얼마전 친가에서 할머니를 요양원에 보낸다고 한바탕 난리가 났었습니다. 여느 때와는 달리 이번엔 실제 추진이 있었고 할머니가 우셨답니다. 요양원에 갈 때만 해도 괜찮으시더니 병실이 다 차 입소가 거부되니 그제야 통곡하셨답니다. 자식들에게 천번 양보해서 간 요양원에서마저 거부당해 설움이 크셨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자녀들 모두 각자의 상황에서 고민해 낸 최선의 방법이었을텐데 할머니에겐 한없이 부족한 사랑이었습니다.
이 책은 나이듦을 받아들이는 방법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나의 얘기이자 내가 사랑하는 가족의 얘기로서, 죽음으로 이어지는 나이듦의 과정에서 서로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치료를 통해 나이든 몸을 회복시키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노인을 부양해야 할 대상으로만 취급하는 것은 그 노인의 역사, 개성, 욕구를 무시하는 처사로서 모두 제대로 남은 생을 행복하게 보내는 방법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탈리아에서 코로나 위급 시 고령환자가 아닌 젊은이에게 인공호흡기 우선 처치로 인해 의사들이 윤리적 결단으로 힘들어 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같은 나라에서 101세 할머니가 코로나 완치 판정을 받았었기도 했지요. 이 할머니의 완치가 단지 노인치사율을 극복한 수치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노인, 젊은이를 초월한 존엄한 개인의 사투로 보여지길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