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A night in seoul
20년 전 고등학생이던 나는 매일 밤
라디오 속 ‘음악 도시’에 살고 있었다.
몸은 부산 어느 산모퉁이 여고 책상에 묶여 있었지만
마음은 희열 오빠가 있는 ‘서울’에 가 있었다.
오빠가 말하는 통인시장 기름 떡볶이 맛과 함께
서울을 상상했다.
토이 4집 속 화려한 A Night in Seoul을 들어가며
한강의 야경도 이 음악처럼 반짝반짝할까 설렜다.
10년 전 사회초년생이던 나는 매일 밤
‘라디오 천국’에 살고 있었다.
일과 연애를 라디오 속 상담 코너에서 배웠다.
책으로 배운 화장처럼 어설펐다.
상경에는 성공했지만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여전히 홀로 라디오를 들었다.
나는 행복하다를 외치라며 놀리는 디제이 유와 함께였다.
2020년 가을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밤을 걷는 밤’을 여행하고 있었다.
카카오 TV 속 희열 오빠가 산책하던
서울의 골목을 따라 걷는다.
기다린 책이 도착하자
달아오른 여자처럼 책포장을 거칠게 뜯었다.
‘밤을 걷는 밤’ 사진과 글이 담긴 책을 갖게 되어 기쁘다.
일러스트레이터 ‘이내’ 작가님의 그림도 역시 좋다.
1. 순간
요양원에 계신 지 오래된 어머니에게 물었다.
"제일 하고 싶으신 일이 뭐예요?"
어머니는 요 근처 인왕시장에 가서
과일을 사고 싶다고 하셨다.
재래시장에 가서 과일 한 알 사는, 그 아무것도 아닌 일이
누군가에게는 가장 간절한 소망이자
가장 큰 행복일 수도 있는 것이다. p84
여행을 갈 수도 없고 누군가를 만나기도 어려운 시대에
이런 산책은 조금이나마 우리 숨을 틔워주는 행복이 되었다.
모두가 따로 또 같이 걷고 있는 이 길, 이 순간이
그동안은 당연하게 여기기만 했던 일상이
마냥 소중하게 느껴지는 밤이다. p102
차로만 이곳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한옥 골목 깊숙이 이런 쉼터가 있는지 전혀 모를 것이다.
역시 골목은 걷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p131
유희열,카카오TV지음/밤을걷는밤/위즈덤하우스
어떤 상황에도 일상의 안테나를 열어
세심하게 감각을 받고 전달해
순간을 간직하는 것
그 순간이 일상과 나를 만들어 가는 것
오빠에게 배웠다.
2. 발견
청계천을 걸어보는 것은 처음이다.
청계광장까지 여러 번 다녀가면서도
천변으로 내려가볼 여유까지는 내본 적이 없다.
어쩌면 청계광장에서 무심히 건너다보며
이미 내게 익숙한 길이라고 여겨왔는지 모른다.
부지런히 밤을 거는 요즘, 이제는 알고 있다.
직접 걸어봐야 그 길의 진짜 얼굴을 알게 되고,
걸음이 쌓일 수록 길 위의 풍경도 선명해진다는 것을. p210
지금 내 삶이 고단하게 느껴진다면
이곳을 걸어보기를 권한다.
밤을 대낮같이 밝히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내 삶에도 뜨거운 불을 붙이고 싶어진다. p247
유희열,카카오TV지음/밤을걷는밤/위즈덤하우스
‘밤을 걷는 밤’ 방송을 보며
오빠에게 놀랐던 점이 있다.
혼자 (스텝도 있겠지만) 서울 밤거리를 산책하는
중년의 남자가 자주
감탄을 한다는 것이다.
골목 속 누군가의 정성 가득 화단에도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야경에도
와,, 하면서 감탄하는 오빠가 있었다.
삼십대 후반의 나는
언젠가부터 심드렁해져 있었다.
외부의 환경이 변했다기 보다
‘발견’하는 눈이 침침해졌나보다.
나도 다시 시작했다.
몸과 함께 늙어버린 마음도
회춘시키는 감탄의 마법
3. 우리 함께
나이를 먹어가면서 실감하는 가장 큰 변화는
그런 시시껄렁한 시간과 얘기를 나눌 친구가
점점 없어진다는 거다.
별일 없이 만나 시시한 얘기 나누며 낄낄거리고
아무 소득 없이 헤어지는, 그런 사이 말이다.
이 밤, 많이 변한 이 거리를 걷고 있자니
시시한 얘기를 나눌 친구가 정말 그립다. p256
밤을걷는밤/위즈덤하우스
2020년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 들면서
나는 초조해졌다.
우리 오빠 밤을 걷는 밤 계속할 수 있을까?
체지방 거의 없어 많이 추으실텐데?
겨울 바람이 매서워지던 2021년 1월 1일
18회 선유로를 마지막으로
밤을 걷는 밤 회차가 끝이 났다.
아쉬웠다.
다시 금요일이면 휴대폰 화면 속으로
서울의 밤골목을 여행할 것 같았다.
서평을 계기로 글을 쓰다보니
긴 시간 희열 오빠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오빠와 함께 나이 먹어가는 것도
토순이라는
내 정체성도 마음에 든다.
지난 20년간 나에게
서울은 유희열이었다.
웃고 울고 꿈꾸게 한다.
이젠 내가 그 길을 다시 여행할 차례다.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걸었던 길을
함께 걷는 기분이다.
나와 함께 서울을 여행할 그녀에게 책을 선물할 거다.
우리가 함께 꿈을 키운 서울의 골목을 여행하며
시시하고 야한 얘기를 나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