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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죽음은 처음이니까

[도서] 엄마의 죽음은 처음이니까

권혁란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잠시 장을 보러 나간 김에 미용실을 들렀다. 지금은 안 되시고요, 이따 5시 반 넘어서 가능한지 전화 한 번 주시고 오세요. 앉아 있는 사람은 셋, 아무래도 코로나 때문에 현장 대기를 안 받는 모양이었다. 아마 시간대별로 예약자들이 줄을 서 있겠지. 끽해야 길이를 짧게 다듬는 게 전부인데도 퇴짜를 맞아감서 미용실을 찾아야 한다니 기분이 묘했다. 때마침 '엄마의 죽음은 처음이니까'란 책을 읽으며 지금 내가 죽음으로 가는 길 어디 즈음에 서 있는지를 가늠하고 있었다. 세수를 할 때마다 이마에 미세하게 형성된 주름이 자꾸만 느는 게 눈에 보여서 신경이 쓰이는데, 제멋대로 막 자라나는 머리카락을 보아서는 아직 죽음을 고려하기에 적절치 않은 시점인 거 같긴 하다.

사고를 중지하고 싶은 것이다. 마지막 순간을 그저 뒤로 미루고픈 마음이 큰 거다. 과연 언제까지 그리 할 수 있을까. 나이 70을 넘어선 부모를 바라보면서 작년과 올해가 다르다는 걸 느끼고 있다. 그들에게 마지막이 있을 것이요, 나 또한 머지 않아 그들의 뒤를 따를 거란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잘 알았다. 남 이야기 대하듯 책을 읽었다. 구입은 2020년 초에 했으니 꼭 일 년을 그냥 묵혔다. 제목이 서글퍼서, 회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해서. 이유야 들라면야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었다.

평균수명이 꽤 길다. 그래도 90을 넘어선 사람이 사망했다면 다들 한 목소리로 “호상”이라 말한다. “잘 죽었다”는 말의 뉘앙스는 참으로 이상하다. 좀 더 일찍 혹은 늦게, 시점에 차이가 있을 뿐, 죽었다는 사실은 동일하다. 저자는 남들이 무심하게 내뱉은 ‘호상’이라는 단어를 겪었다. 책에서는 그 자신도 충분히 나이가 들어 죽음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가 계속 등장했다. 실제로 그는 연명 치료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결단을 내렸고, 각종 보험을 점검하며 향후 자신의 병원비로 인해 자녀들이 괴로워할 가능성을 차단했다. 처음부터 그가 단호하게 죽음에 대처할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엄마의 죽음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통과하면서 그리 해야 할 필요성에 눈을 떴다고 보는 편이 정확할 듯하다.

어르신들의 시간은 고무줄과도 같다. 불과 며칠 전까지도 정정했던 이가 어느 순간 보면 배로 늙어 있다. 그의 어머니도 그랬다. 미리부터 준비하지 않았으므로 다섯이나 되는 형제들은 우왕좌왕했다. 처음부터 시설에 모시려곤 안 했다. 아무래도 늙은 부모는 직접 모시지 않으면 죄 짓는 거라는 의식이 그들을 짓눌렀다. 당사자도 그걸 원하진 않았다. 하지만 자식들에게도 감당해야만 하는 삶이라는 게 있었다. 더구나 엄마와 함께 늙어가는 중인 자식 입장에서 오롯이 엄마를 위해 자신의 모든 걸 퍼붓기란 현실적으로 힘들었다. 저항은 완강했지만 짧았다. 현실에 적응하는 게 최선이었고, 다행이도 시설 관계자들은 친절하고도 정성스러웠다.

고생은 짧게 하고 떠나야 복이라던데, 저자의 엄마에게 마지막 순간은 길었다. 시간만을 놓고 보면 2년 정도였지만, 글을 읽는 내 마음조차도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의식이 없다. 목에 자꾸만 끼는 가래를 제거하려 들면 고이 잠들어 있던 엄마가 괴로워한다. 병원에서는 금방 숨을 거두실 거 같다고 말을 하는데, 그제도 어제도 같은 말을 들었다. 차라리 고향 집에 모시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가도 막상 호흡기를 떼는 일은 꺼려진다. 병원에서도 우린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라며 그와 같은 결정에는 동조 않는다. 윤리적인 결정을 놓고 신음하기 훨씬 전부터 저자의 기록에는 엄마의 섬망이 등장했다. 빨리 죽어야 한다던 엄마는 평소 같았으면 결코 입 밖으로 내지 않았을 온갖 저주와 욕을 세상이 퍼붓고 있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공통점이라던데, 저자도 나도 그런 모습으로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싶진 않다고 울부짖었다.

소화해야만 하는 일정이 있었는데, 엄마는 고맙게도 그 일정을 소화할 수 있는 시간을 저자에게 허락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간 너무 힘들고 서러워서 막상 돌아가셨다는 말을 접하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슬픔이 몰려오진 않았다. 경황이 없어서였을 수도 있다. 충분히 슬퍼했다는 식의 표현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걸, 이후 남겨진 저자의 기록은 말해주고 있었다. 어찌 됐던 살아있는 사람은 살아야만 한다. 한동안 죽음 이외의 소재에 대해선 생각조차 못했고, 예전 같았으면 하지 않았을 실수를 연발하며 제 나이 듦을 여실히 느꼈다. 그런 자신을 금방이라도 잃지는 않을지 염려하는 딸들을 바라보면서, 열렬히 자신의 죽음을 준비했다. 무엇이 괜찮은 죽음인지를 생각해볼 기회, 그건 엄마의 죽음이 저자에게 선사한 선물이었다.

나도 언젠가는 혼자가 될 것이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고아’가 되어 이 세상을 살아가야만 하는 날이 있을 것이다. 여전히 죽음은 피하고픈 화두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 엄마의 죽음, 아빠의 죽음, 내 자신의 죽음, 세상 모든 죽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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