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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간직한 비밀

[도서] 우리가 간직한 비밀

라라 프레스콧 저/오숙은 역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5점

약 500페이지의 분량을 자랑하는 책을 간만에 속도 내어 읽었다. 전에는 종종 있던 일이지만 최근 들어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 정확히는 그러기가 힘들었다. 두께에 지레 겁을 먹고 뒷걸음질 치기 바빴기에. <우리가 간직한 비밀>은 소설이다. 여느 장르보다도 빠르게 읽을 수 있는 게 소설이긴 하나 이 책의 경우엔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했다. 지난 세기 인류에게 긴장을 선사했던 냉전 체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와 그의 작품 <닥터 지바고>에 대한 이해가 바로 그것이다. 부끄럽게도 난 문외한에 가까웠다. 내가 지닌 지식이라고는 해당 작품이 영화화돼 널리 알려진 작품이라는 게 전부였다.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아닌 파스테르나크여야만 하는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다. 동서로 양분됐던 지난날의 질서와 닮은 꼴을 하고 있는 작품의 구조 탓에 초반에 고전했다. 서로 동떨어져 있는 것만 같은 세상 간에 어떠한 연결고리가 존재할지, 나도 모르게 작가의 역량마저 의심하면서 책장을 넘겼다.

우선 <닥터 지바고>라는 작품이 있어야 마땅했다. 이 작품의 저자인 파스테르나크는 다소 반체제적 성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이 그의 글을 애독한다는 이유로 많은 동료 작가들이 숙청 당하는 와중에도 살아남았다. 그의 곁에는 올가 이빈스카야가 있었다. 이미 두 차례 결혼한 그녀를 세상은 부적절한 사랑의 주인공 즈음으로 기억할 뿐이지만 이 인물의 역할은 그보다 훨씬 중요했다. 비서이자 대리인이었으며, 어쩌면 파스테르나크가 짊어져야 했던 무게를 대신 짊어진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강제 노동 수용소를 오가면서도 침묵했고, 독한 산통 끝에 탄생한 <닥터 지바고>로 인하여 또 다시 고통스러운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앞서 언급한 두 인물이 ‘동’에 속했다면, 정보국 소속 타자수들은 ‘서’에 속했다. 명문대학을 졸업한 그들은 자신의 남자 동기들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그 시절 여자들은 결혼하면 직장을 당연히 떠나는 존재로 여겨졌고, 남성들보다 어쩌면 더 똑똑하지만 사회의 기대가 터무니없이 낮은 나머지 좌절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소설 속 여자들은 냉철했다. 타고난 직감과 명석함으로 조직 내외의 일을 누구보다도 정확히 파악했다. 굳이 말을 주고받지 않았지만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이 무언지를 알고 있었다. 그 중 샐리와 이리나는 특히 돋보였다. 러시아 배경을 타고난 이리나가 일명 지바고 작전에서 임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일종의 역량을 불어넣어 준 건 다름 아닌 샐리였다. 두 인물이 서로를 향해 품었던 감정이 무엇이었을까. 동료애? 정보국은 이들에게 ‘동성애’라는 족쇄를 채움으로써 더 이상의 성장을 허락지 않는다. 소설이니까, 시대가 1950년대니까. 어떠한 이유를 들먹여도 이를 마음 편히 받아들이기란 어려웠다.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임을 잘 알아서 그랬다. 매카시즘과 더불어 ‘라벤더 공포’라 하는 것이 실제로 미국 사회를 뒤흔들었다는 걸 우리의 역사는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남성과 여성을 다분히 의식한 ‘그녀’ 혹은 ‘여성’이라는 단어를 지양해야 한다는 말을 종종 들어왔다. 하지만 저자가 여성이었기에 이와 같은 작품이 가능했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것만은 어찌할 수 없다. 만일 남성 작가가 같은 내용의 전개를 시도했더라면 어떠했을지를 상상해 보게 된다. 이야기 속 여성들은 충분히 분량 할당을 받지 못한 채 이름 없는 타자수, 대작가의 불륜녀 정도로 그려졌을지도 모르겠다. 생물학적 성이 여성이어도 다르게 사고하려는 노력이 전제되지 않았다면 마찬가지의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시선은 언제나 화려한 무언가를 향하곤 했다. 조직을 이끌어가는 리더 격, 뭔가 직함을 지닌 존재가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다 보면 상대적으로 낮은 직급, 그다지 중요치 않다 여겨지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여성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될 때가 잦으니 말이다. 드라마나 영화화됐다면, 여느 작품보다도 많은 여성들이 주연격으로 등장해 연기를 펼칠 수 있는 작품일 것이므로, 그 또한 대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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