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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화

[도서] 몽환화

히가시노 게이고 저/민경욱 역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작가의 구상은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노란 나팔꽃이 등장했고, 이유 모를 살인 사건 또한 다루어졌다. 그 외의 다양한 요소들까지 버무려져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은 지난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언제 즈음 각기 따로 노는 듯한 이야기들이 만나 동일한 흐름을 이루게 될지가 읽히지 않았다. 유독 와 닿지 않는 일본인의 이름을 마치 가계도를 그리듯 백지에 적어가며 조심스레 저자의 뜻을 헤아리려 들었다. 두께가 두껍다고 마냥 어렵지는 않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글은 늘 속도 내어 읽는 게 가능했다. 이번에도 걸음이 더디지는 않았으나 저자의 도움 끝에 이해가 가능했다. 수가 너무 빤히 드러나면 추리소설이 아니리라. 왠지 저자와의 두뇌 싸움에서 완패한 것만 같은 느낌이 계속해서 들고 있다.

시작이 강렬했다. 누구인지 모를 이가 거대한 일본도로 사람을 찌르고는 달아난다. 이유도 모른 채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순식간에 머릿속에 그려지는데 끔찍했다. 이어지는 수사는 예상대로라면 이 사건의 범인을 잡기 위함이어야 한다. 저자는 해답을 제시하는 대신 시간을 건너뛴다. 매년 주기적으로 장어를 먹은 후에 꽃시장을 방문하는 가모 가족이 등장한다. 친가 쪽 사촌인 도리이 나오토의 사망 소식을 접하는 아키야마 리노에 대해서도 저자는 말한다. 둘 다 앞서 벌어진 살인사건과는 별반 관련이 없어 보인다. 성장기 소년에게 찾아온 풋풋한 연애 감정은 가족에 의해 포기를 강요당한다. 장래가 유망한 수영 선수였던 리노는 어떠한 이유에선가 꿈을 접는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는 평행선을 그으며 달린다. 살인사건까지의 도달은 바라지도 않으니, 두 가족 간의 연결고리라도 파악이 가능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이번에는 또 다른 절도 사건이 벌어진다. 용의자로 지목된 이는 하필이면 경찰의 아들이다. 끝까지 억울함을 호소하는 아이를 믿어도 좋을까. 계속해서 인물은 등장하는데 이야기가 제각각이라 어디에 초점을 맞추면 좋을지 판단이 어렵다. 이 많은 것들을 어찌 한데 모아 정리할지, 나도 모르게 저자를 걱정하는 마음이 들기까지 한다.

세상 모든 일이 명쾌할 순 없다. 가끔은 해결이 되었다고는 하나 진실이 완벽히 밝혀지지 않은 것만 같은 찜찜함을 떨쳐내질 못할 때도 있다. 무슨 연유에선가 진실을 감추기로 모두가 입을 맞춘 것만 같은. 진실보다 더 보호해야만 하는 가치가 존재하진 않을까 싶은 의구심. <몽환화>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무엇을 중시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과도 같았다. 모든 사건은 동떨어진 것만 같으나 알고 보면 하나의 금기에 느슨하게 연결돼 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걸로 알려진 노란 나팔꽃.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이의 존재를 부정한다. 일반인들이라면 관심을 아예 아니 가질 분야이기도 하거니와 혹 궁금증이 일더라도 전문가의 단호한 의견에 가로막히고야 만다. 저자는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금기를 자신들만의 비밀로 간직토록 만든다. 특정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가문의, 더 나아가 사회 전체를 뒤흔들 일을 끌어안고 쉬쉬해야만 하는 운명이라니, 실로 가혹하다. 인물들은 속으로는 불만이 가득할 수도 있겠지만 이를 드러내지 않는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몽환화의 진실이 영영 밝혀지지 않게끔 동조한다. 구도 아키라, 마사야 등은 처벌을 받으나 세상은 그들의 처벌 사유에 대해 공표지 않는다. 이 순간 중요한 건 개개인의 단죄가 아닌 금기의 유지다.

소설에서 언급이 되기도 한 양귀비에 대한 생각이 계속 떠올랐다. 붉은 빛깔이 무척이나 매혹적인 이 꽃은 마약 성분을 품은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아무나 함부로 재배해서는 아니 된다는 인식을 적잖은 이들이 공유 중이기도 하다. 동시에 ‘악마의 재능’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됐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소위 천재로 일컬어지는 인물을 따라잡고 싶다는 욕망이 이따금 일탈을 부르는 일을 우리는 종종 접해 왔다. 세상에 존재치 않는다는 몽환화. 그러나 이미 현실에서는 다른 형태의 몽환화가 활짝 피어 있는 게 아닐지 싶었다. 전망 없다 여겨지는 원자력을 계속 연구하기로 마음 먹은 소타와 다시 헤엄치겠다는 결의를 밝힌 리노처럼 몽환화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용기가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왠지 저자가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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