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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마타, 이탈리아

[도서] 페르마타, 이탈리아

이금이 저

내용 평점 3점

구성 평점 4점

다음을 기약할 이유는 충분하다. 직장에서 휴가를 내기 힘들어서, 돈이 부족해서, 함께 갈 사람이 없어서, 지금 같은 시기라면 코로나19 때문에. 불가능하다 여기고, 지금은 때가 아니라며 미루고. 언젠가는 기회가 오지 않겠느냐는 막연한 희망의 불씨 또한 서서히 사그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 땐 진정 몰랐다. 휴가 없이 보낸 시간이 십 년이 넘다 보니 노는 게 무언지, 어찌 하면 쉴 수 있는지를 잊은 듯하다. 학창 시절 공부를 진정 잘 하는 사람은 노는 데도 탁월했다는 걸 떠올리자니 왠지 씁쓸하기도 하다. 지금 나에게 최선이라면 책을 읽으며 타인의 경험을 갈취(?)하는 거. 떠나고 싶은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고른 책은 나를 이탈리아로 데려다 주었다.

저자에게도 떠남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래도록 망설였으며 지인들과 의기투합했으나 결국 한 명은 낙오했다. 성사되기 직전까지도 불투명했던 여행이었으므로 계획이 철저히 세워졌을 리 만무하며, 게다가 말이 통하는 것도 언어나 음식이 익숙한 것도 아니므로 앞으로 겪게 될 혼란이 결코 작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친한 사람도 틈 없이 오래 붙어 있다 보면 반목하게 된다. 그간 보이지 않던 단점이, 나와는 어긋나는 지점들이 선명히 드러나고, 급기야 불편해지기도 한다. 역시나 두 인물도 서로 다름으로 인해 삐그덕 거렸는데, 다행이도 각자의 방식으로 여행을 즐기기로 마음 먹으면서부터 모든 게 한결 수월해졌다.

이탈리아에는 유럽 최고의 관광지로 손꼽히는 장소들이 참으로 많다. 고대부터 지금까지도 중심지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는 로마, 교황이 군림하고 있는 바티칸 등 어디에 들러도 후회치 않겠지만 아무래도 우리로선 남들이 많이 찾는 장소를 선호하는 게 사실이다. 꿈은 원대했으며, 어렵게 떠난 만큼 이참에 볼 수 있는 모든 걸 보겠다는 각오 또한 충만했다. 발 딛는 곳마다 고대 그리고 중세의 향기가 그윽했다. 목조 건물이 많아 대다수가 불타 소실된 우리와 달리 대리석 중심 문화여서 옛날과 현대의 공존이 가능했다. 어디에 시선을 두면 좋을지, 행복한 고민만이 이어질 듯 하였으나 어찌 보면 배부른 고민이라 할 법한 상황이 부닥치기도 했다. 한적한 골목에서 길을 잃었고, 상대의 호의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도 좋을지가 의심스러웠다. 도시 전체가 마피아 소굴이라는 식의 이야기에 심히 취한 상태여서 그랬던 건지, 나도 모르게 상대를 잠재적 치한처럼 바라보았던 것이다.

여행 도중 편견이 깨어졌다. 홀로 택시에 타는 일은 어마어마한 두려움을 요했고, 자꾸만 말을 거는 어르신은 성가신 나머지 피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현실은 달라 나에게 두려움을 선사한 인물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은 친절함을 유지했다. 고맙다는 말 한 마디 건넬 짬이 없을 정도로 늦은 시점에 도달해서야 이름 모를 할머니의 눈에 담긴 애정이 읽히기 시작했다. 페르마타. 힘차게 달리는 도중이었다면 놓치고 말았을 수도 있다. 잠시 멈추어 섰기 때문에 부족하나마 응시할 수 있었고, 상대의 호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도 됐다. 이탈리아 전체가 ‘페르마타’ 이 말에 부합하는 거 같아 보인다고 하면 이탈리아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할지 궁금하다. 그래서 무료하다고, 다른 나라로 탈출하고 싶다고 절규하려나?

예순 살을 축하하는 의미로 앞서 다녀온 여행을 정리해 책을 내길 희망했다는 저자.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코로나19의 펀지에 스러진 이탈리아를 떠올리며 글을 쓰는 저자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안타까움도 물론 컸겠지만, 고스란히 살아 숨쉬는 지난 기억을 들춰보는 일마저 괴롭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추억을 머금은 시간에는 어떠한 불행도 침투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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