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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도서]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미야노 마키코,이소노 마호 저/김영현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심각해지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질병 그리고 죽음이라는 묵직한 단어가 제목에 쓰인 책을 골랐다. 심지어 저자 중 한 명은 죽음을 앞뒀다고 적혀 있었다. 대체 내가 책을 고를 무렵 원했던 건 무어였을까. 살면서 내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다. 언제 어디서 어떠한 부모로부터 태어날지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혹자는 생의 마지막 순간만큼은 스스로 택할 수 있지 않냐는 질문을 던지기도 하던데, 영생을 꿈꾼다 하여도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는 건 모두가 감내해야 하는 숙명이다. 유한한 존재로서의 나, 내가 속한 세상까지는 아나가지 못하겠으나 나 한 명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사그라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주는 위압박은 얼마나 거대한지. 내 뿌리깊은 우울의 일부는 이로부터 비롯됐지 싶다. 아직 직접적으로 죽음에 다가서는 경험을 했다거나 당장 숨이 넘어갈 정도의 고통을 앞두고 있는 게 아님에도 그랬다. 상황이 달라진다면 이 막연한 감정들이 마치 눈 앞의 파도처럼 일렁이며 나를 집어 삼킬 것이다.

1999년, 2000년 대학 졸업. 대강의 나이를 가늠해 본다. 두 인물이 처음부터 절친하지 않았음에도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철학자와 의료인류학자니 얼마나 심오했을까 싶다만, 채겡 적힌 게 전부는 아닌지 두 인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 말을 놓았으며 내 눈으로 접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깊은 마음을 나눴지 싶다. 잔인하게도 첫 만남이 있을 무렵 이미 마지막은 예고된 상태였다. 미야노 마키고는 갑자기 병세가 악화될 가능성에 대해 의사로부터 언질을 들은 상태에서 고민했다. 그간 별여 놓은 많은 일들을 수습하고, 마치 죽음을 예견한 사자처럼 무리를 떠나는 상상을 실천으로 옮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길을 걸었다. 굳이 나서서 신변을 정리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인연을 맺기까지 했다. 자신의 건강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스레 이루어졌다. 이소노 마호는 얼마든지 도망갈 수 있었다. 짧은 시간만이 우리의 눈 앞에 놓여 있다. 상실의 감정은 내 모든 걸 뒤흔들 정도로 클 것이다. 용기가 모든 걸 잊게 만들어 주었다. 당시엔 몰랐다는 말은 진정 몰랐음을 뜻하진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표현이 쓰였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꼭 너여야만 하는 이유는 없다. 우리는 영영 서로를 모른 채 살아갈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게 됐다. 조금 더 어렸을 때도 아닌 지금 이 순간, 내가 아파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아니한 상황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설로부터 비롯된 이야기는 무수히 뻗어 나갔다. 상대가 중증 환자임을 인식한 순간 나의 태도는 달라지기 마련이다. 이 음식은 건강을 해칠 수 있으니 피해야 하고, 언제 의료진이 필요할지 모르므로 여행은 꿈꾸지 말아야 한다는 조언이 왠지 상대에게 어울릴 듯하다. 조금이라도 가방이 무거워 보인다면 상대를 대신해 들어주어야만 할 거 같은 압박. 특별히 내가 착해서가 아니라 왠지 그러해야만 할 거 같아 행한 일들이 상대를 오히려 환자로 만들고 있을 수도 있다는 일침이 나를 때렸다. 몸이 괜찮아지면 무엇을 하겠다는 다짐은 다음의 기약이 가능한 경우에나 성립할 수 있지만, 그 다음을 확신하는 일은 인간에게 주어진 몫이 아니다. 지금을 살아가면서 최대한 나의 영역을 확장하는 거, 그리하여 한낱 점에 불과할 수도 있었던 나를 하나의 선으로 연장하는 거. 아무리 생이 마지막 순간에 도달했다 하여도 이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은 찾기는 쉽잖을 것이다.

마지막 편지가 쓰인 게 2019년 7월 1일이다. 연명에 든 게 7월 22일이니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어떠한 진통제로도 다스릴 수 없었을 통증과 함께하며 외로웠을 생을 남은 저자는 상상한다. 괴롭다. 그래도 아름다운 완주였다. 떠난 이도 그리 생각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어 마냥 슬프지만은 않다. 나에게도 언젠가는 닥칠 그 일, 그가 잘 해냈듯 나 또한 완성할 수 있을 듯하다.

그칠 듯 이어지는 글의 마지막에 이윽고 닿았다. 우연과 필연. 무엇이 우연이었으며, 무엇은 필연이었던 걸까. 마치 꿈을 꾼 것만 같았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도달한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영원히 꾸게 될 꿈이 조금 더 촘촘하게 영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생을 지켜내야겠다. 비록 나에게는 편지를, 마음을, 그 어떠한 것도 주고받을 인연이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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