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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

[도서] 훌

배수아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여기 '훌'이 있다. '훌'은 세 명의 각기 다른 타인이기도 한데, 어쨌든 모두 '훌'이라고 불린다. 소설 「훌」의 세계에서 '훌'들에게는 이름도 인종도 국적도 없다. 다만 화자에 의해 '훌'이라고 인식되고 불리울 뿐이다. 

 

「훌」은 동명의 소설집 『훌』에 실려있는 단편소설이다. 배수아의 소설들은 본래 전통적 의미의 서사와 거리를 두고 있는 작품이 많다. 현학적이고 해체적인 배수아 고유의 글쓰기는 1990년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고, 많은 단골독자들을 (필자를 포함하여♥)형성해왔다. 그러나 일부 작품들은 자아분열적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는 혹평을 받아오기도 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훌」이다. 확실히 「훌」은 읽기가 여간 쉽지 않은 소설이다. 그러나 바로 그 쉽지 않음, 해체적 글쓰기가 이루어지는 지점이, 필자에게는 전지적퀴어시점을 바탕으로 몹시 퀴어하게 읽힌다.

 

「훌」에는 세 명의 '훌'이 등장한다. 나 '훌', 나의 친구이자 연인인 '훌', 그리고 나의 직장 동료인 '훌'이 그이들이다. 인종이나 국적이 정확히 명시되지 않았기에 독자가 쉬이 알 수 있는 정보는 이들 세 사람이 모두 먼 이국의 나라에서 독일로 흘러온 노동자들이라는 것뿐이다. 나 '훌'은 자신과 동일한 이름, 동일한 기표로 불리는 두 명의 '훌'과 각기 다른 방식으로 관계 맺는다. 나 '훌'은 직장 동료 '훌'에게 시시한 드라마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직장 생활의 고단함을 달래기도 하고, 친구이자 연인인 '훌'에게 약을 사다주기 위해 익숙하지 않은 이방의 도시를 우왕좌왕 모험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왜, 세 명은 동일하게 '훌'로 불리우는가?

 

「훌」은 '훌'이라는 이름을 한 인물에 대한 고유명사가 아니라 여러 인물을 아우르는 이름, 마치 일반명사처럼 사용하고 있다. 더불어 소설의 시점이 의도적으로 뒤엉켜 있다는 점에 근거해 「훌」은 자아분열적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온 것이다. 실제로 소설을 읽다보면 반복되는 동일 이름에 의해 게슈탈트 붕괴 현상을 겪는 독자도 있을 법하다. 「훌」은 '훌'과 '훌', '훌'이 이방의 도시에서 관계 맺는 이야기이나 딱히 군중 속 개인의 몰개성화 현상을 그리고 있지도 않다. 오히려 '훌'과 '훌', '훌' 등 세 인물의 성격, 취향, 취미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특색 있게 그려지는데, 이에 의지해 독자는 그들 '훌'이 각기 다른 존재라는 것을 간신히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대체 왜 '훌'인가? 바로 이러한 혼란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소설 「훌」은 성공한 듯 보인다.

 

「훌」은 이름에 대한 신화를 무색하게 만든다. 고유한 이름이란, 없다는 것이다. 「훌」의 세계에서 이름이란 기표에 불과하다. 기존의 세계관에 의하면, 이름이란 무지막지하게 의미 있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존재 개개인은 고유하며 그 고유함은 응당 존재 고유의 '이름'으로 명징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詩 김춘수의 「꽃」 또한 기존의 세계관에 빚지고 있지 않던가.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이름을 불러주니 꽃이 되었다고. 반면 배수아의 「훌」은 위와 같은 기존의 이름 짓기 기법을 단숨에 비틀고 부정한다. 고유한 개별적 이름들을 하나의 구덩이(hole)에 빠뜨려 전체화(whole)한 '훌'이라는 이름은, 개별적 이름이 각각의 고유한 자아로 인식되던 기존의 세계관에 의하면 자아분열에 다름아닐 것이다. 불편할 법도 하다. 그러나 이름을, 존재를 설명하지 못하는 단편적 기표로 전제한다면 어떨까? 즉 이름이란 것이 생각보다 뭐 별 거 아니라면?

 

우선 사전을 뒤져보자. '훌'이라는 이름은 영단어 'whole' 또는 'hole'에서 따온 것으로 짐작된다. 'whole'은 '전체의, 전부의, 모든, 온전한'을 뜻하는 형용사이며 동일 의미의 명사이기도 하다. 'hole'은 구덩이, 구멍을 뜻한다. 전체의 구덩이 또는 구덩이의 전체. 복수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전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며 하나의 몰개성화의 구덩이에 빠질 뻔, 한다. 그럴 뻔, 하는 것이다. 배수아는 이들을 쉽사리 빠뜨리지 않는다. 세 명의 '훌'들은 독자에게 (게슈탈트 붕괴 현상을 극복해야 하지만!) 저마다 고유한 다른 존재로 인식된다. 이름이 같아도 이들은 충분히 고유한 존재로 설명된다. 전체의(whole) 구덩이(hole)에 빠질 뻔한 '훌'들을 구원하는 것은, 바로 이야기다. '훌'들은 저마다의 행동거지, 발언, 취향, 개인의 역사에 따라 존재감을 드러낸다. 「훌」의 세계에서, 한 인물의 정체성은 어떠한 기표나 이름이 아니라 저마다의 이야기에 따라 결정된다. 존재를 구원하는 것은, 이름이 아닌 이야기인 것이다.


우리는 어쩜 듣는 이 없는 무언가에 대고 끊임없이 내 얘기를 들어달라고 투정을 부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소통 부재의 세상에서 누구에게, 무엇을, 말할 것인가.
결국은 그가 나이고, 내가 너인 이 세상에서.(「훌」)

  

언어로 소통하는 인류에게 이름 짓기란 불가피한 숙제나 마찬가지다. 끝없이 소통해야 하는 구조 속에서 개별 존재에 이름을 부여하는 방식은 확실하게도 편리한 구석이 있다. 문제는 이름의 권력구조다. 이 세상의 '민수', '철수', '존슨'은 '지은', '혜진', '에밀리'보다 힘이 세다. '민수'는 '지은'과 결혼해야 하고 '에밀리'는 '지은'을 사랑해선 안 된다. '존슨'은 '혜진'의 나라에서 환영 받지만, '혜진'은 '존슨'의 나라에서 혐오의 대상이다. 이름의 권력구조는 존재의 우열을 결정 짓고, 때로는 이름대로 살아가기를 명령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이름에 대해 결정권을 가진 적이 없었다. 내가 짓지도 않은 이름에 의해 내가 설명된다. 배수아의 「훌」은 이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당신의 이름이, 정말 당신이냐고. 당신을 충분히 설명하고 있는 게 맞냐고 말이다. 

 

이름의 권력이 제거된 「훌」의 세계에서, 이름이란 더이상 세계를 인식하는 주요 도구가 아니다. 그저 내 사랑, 내 친구, 내 동료를 부르는 청각적 기호일 뿐이다. 네가 '훌'이어도 '훌'이 아니어도, 너는 사랑스럽다. 네 이름이 어떻든, 너는 여전히 '향기로운 세재 냄새가 살짝 남아 있는, 새로 세탁한 이불이 아니면 몸에 두르지 않'는 너이며 '기다랗고 마른 한 팔을 침대 아래로 쭉 내리고 반쯤 엎드린 채' 잠드는 너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아름다운 것을 보면 가슴에 찔리듯이 충격이' 오게 하는 너이기 때문이다. 

 

(덧: 친구이자 연인인 '훌'은 출판사 서평 등 대부분의 소개글에서 친구라고 소개되어 왔다. 이러한 세태는 명백하게도 이성애중심주의적 시선의 폐단으로 읽힌다. 나 '훌'과 또 다른 '훌'의 관계는, 비록 아쉽게도 성애적 요소는 제거되었으나 실상 연인과 다름 없는 점들이 많다. 연인 '훌'에 매혹된 나 '훌'의 감정을 사랑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작성: 빅뷰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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