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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의 저편

[도서] 일몰의 저편

기리노 나쓰오 저/이규원 역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자유롭게 읽고 쓴다. SNS와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자신의 느낌과 의견을 말한다. 개인적인 공간에 남긴 기록은 한순간 사회적 공론에 휩싸일 때도 있다. 사회적 이슈에 대한 지극히 사적인 생각에 댓글로 다툼이 이어진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자기 검열을 시작한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교정 같은 단순한 일부터 문맥이 맞는지 주장에 대한 근거가 있는지 살피게 된다. 좋아서 쓰던 글이 타인과 소통을 시작하면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면 의문이 생긴다.

 

궁극적으로 글을 쓰는 목적은 무엇일까. 글의 형태에 따라 다르겠지만 단순한 행복, 기쁨, 즐거움은 아닐까. 그 모든 것을 충족하는 장르 중 하나가 소설일 것이다. 작가의 무한한 상상력이 만들어 낸 가공의 이야기, 그 안에서 독자는 함께 울고 웃고 분노한다. 하나의 소설을 읽고 느끼는 감정은 저마다 다르기에 일률적인 평가를 내릴 수 없다. 그러니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로 나누는 획일적인 기준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인간을 탐구하는 문학의 소재는 무궁무진하니까. 예술적 표현의 자유를 정부가 관리하고 판단하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일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나오키상과 다니자키 준이치로상, 요미우리문학상 등을 수상한 기리노 나쓰오의 장편소설『일몰의 저편』(북스피어, 2021)에서 벌어지는 일은 결코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다. 성애 소설을 쓰는 작가인 주인공 ‘마쓰’는 ‘문예윤리위원회’(이하 문윤)라는 조직으로부터 소환장을 받는다. 독자의 고발이 있었다는 이유로 아무런 설명 없이 강습에 참여하라는 내용이었다. 며칠이면 끝날 거라는 직원의 설명에 아무런 의심 없이 길을 나선다. 그 길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 채 말이다. 마쓰가 도착한 곳은 외부와 단절된 바닷가 절벽 위에 위치한 ‘요양소’다. 마쓰에게 지정된 방은 형무소와 같았다. 작은 책상, 화장실, 지급되는 생필품으로 생활하며 식사, 목욕도 정해진 시간에만 가능했다. 인터넷도 전화도 사용할 수 없었다. 감시 카메라와 스피커가 설치되었다. 건물 곳곳에서 자신과 같은 복장의 사람들을 지나쳤지만 말 한마디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언제 이곳에 왔는지 확인이 어려웠다. 말 그대로 고립 상태에 놓였다.

 

그곳에서 마쓰는 이름이 아닌 ‘B98’번이었고 소장이라는 사람과 상담이 시작되었다. 마쓰가 쓴 소설이 폭력적이고 가학적이라고 문윤이 판단해 요양소에서 갱생과 교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간은 마쓰가 얼마나 문윤의 조치에 따르고 협조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B98번이 된 마쓰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소설은 그저 허구이며 상상의 세계가 아니던가. 단지 한 장면의 묘사, 몇 줄의 표현으로 인해 소설 전체를 평가받는 일은 부당했다. 독자의 호불호가 있겠지만 그것으로 인해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당연한 감정이다. 작가에게 그 누구도 그런 글을 쓰면 안 된다고 제재를 가할 수 없으니까.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자유주의 국가에서 개인을 갱생한다는 상상을 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하지만 소설은 너무도 비참한 방법으로 마쓰를 구속하고 학대한다. 자신들이 정해 놓은 규정을 위반하면 요양소에서 지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인간에게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욕구도 묵살했다. 그들의 설명은 산책이나 운동을 하면서 창작의 시간을 가지라는 것이다. 산책을 빌미로 요양소를 탐색하는 마쓰가 알게 된 사실은 더욱 잔인했다. 하루하루 요양소에 적응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 처음에 끓어올랐던 분노는 어느새 사라지고 작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 자괴감에 빠져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는 말이었다.

 

마쓰가 그들의 요구대로 쓴 글을 읽고 검열하며 문윤은 그녀가 충분히 갱생될 수 있다고 말한다. 문윤에서 원하는 글은 명확하고 단순했다. 누구나 감동을 느낄 착하고 아름다운 글이었다. 그런 소설이 좋은 소설이고 훌륭한 소설이라며 노벨문학상을 언급한다. 마쓰도 쓸 수 있었다. 요구하는 대로 변절자, 배신자도 충분히 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나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하지만 그건 작가가 원하는 글이 아니고 쓰고 싶은 글이 아니었다. 무엇을 쓸지 창작의 영역까지 허락이 필요한 세상이 도래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글은 다양성과 고유성은 무시한 AI나 써내는 글이 아닐까. 기능적으로 소설을 잘 쓰는 작가를 원할 뿐 마쓰라는 인간 개인의 글은 필요하지 않다고 해석할 수 있다.

 

개인과 국가의 싸움이었다. 누가 봐도 개인이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마쓰의 심리를 교묘하게 조정하며 그녀를 자극했고, 도발하게 만들어 마침내 모든 걸 포기하게 만드는 게 문윤의 전략이었다. 인간은, 그것도 예술가인 작가는 갱생되거나 교정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소설은 마치 문학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교묘하게 포장한다. 독자에게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을 선별할 능력이 있냐는 듯 말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말하는 문학이라는 세계, 작가의 창작적 자유는 그들의 집단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작가는 곧 개인이며 독자다. 소설속 문윤의 논리에 따르면 좋은 소설을 쓰는 작가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처럼 좋은 소설만 읽는 독자가 필요하다. 그것은 독단적이고 일방적인 폭력이다.

 

이쯤에서 독자인 나는 어떤 독자인가 생각한다. 더불어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지난 정부의 예술가 명단을 떠올린다. 정부의 뜻에 반하는 목소리를 지닌 이들은 사회에 나쁜 영향을 준다며 불이익을 받는 이들이다. 정치가 예술을 지배할 수 있다는 믿음은 어디서 왔을까. 예술가의 정치적 신념은 작품과는 별개다. 설령 같다고 해도 그건 개인의 자유 영역이다. 그렇다면 소위 문학상 수상작, 베스트셀러, 고전만 읽어야 하는 것일까. 다양한 시도를 하는 실험적인 소설이나 사회를 비판하는 고발 소설과 추악한 인간의 내면을 파헤치는 탐사 소설은 읽지 말아야 할까. 그렇다면 작가 마쓰가 아닌 비주류 소설을 읽는 독자도 문윤의 요양소에서 갱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논리다. 독재가 아닌 민주주의 시대인 21세기에 불가능한 이야기라 장담했지만 막상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이런 일이 자행되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아무도 모르는 권력이 움직이는 검열의 시대가 이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쓰는 이 글을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하면 불편하고 불안해진다.

 

“작품은 자유야. 인간의 마음은 자유니까. 무엇을 표현해도 돼. 국가권력이 그걸 금지하면 안 돼.”(317쪽)

 

“내가 말하는 건 작가가 책임을 지고 표현한 작품이야. 허구의 이야기 말이야. 허구는 다양한 인간을 묘사하지. 개중에는 차별적 인간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인간도 있지. 왜냐하면 인간 사회가 그러니까. 다양한 사람의 고통을 그리는 게 소설이니까 아름다운 것만 쓸 수 없지.”(317쪽)

 

그리하여 마쓰의 처절한 외침은 곧 내 것이 된다. 표현의 자유가 사라지고 좋은 소설만 읽으라고 강요하는 세상이 온다면 어떨까.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만으로 꾸며진 세상은 좋은 세상일까. 인형처럼 똑같은 얼굴과 마음을 지닌 인간들이 가득한 사회를 상상하자 오싹해진다. 작가 기리노 나쓰오는 마쓰의 목소리를 통해 묻는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어떠냐고 말이다. 소설 속 디스토피아와 다르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문학은 시대를 반영한다. 인간의 심연을 포착한 글이 소설이다. 독자가 소설을 읽는 이유다. 소설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배우고 소통하기 위해서다. 마쓰가 문윤의 의도대로 끌려가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도 그 때문이다.

 

단순하게 재미만 놓고 봐도 스릴 넘치는 소설이다. 하지만 묵직한 여운을 안겨 준다. 흥미롭게 진행된 마쓰와 소장의 토론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다 정신을 차린다. 읽고 싶은 소설을 선택할 자유와 권리를 포기할 수 없다. 하나의 목소리가 지배하는 독재의 사회가 될 것임을 알기에 모든 소설을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로 구분하는 이분법적 논리를 따라갈 수 없다. 작가와 독자의 인격과 존엄성을 무시하는 처사를 따를 수 없고 따라서도 안 된다. 소설을 읽을 때마다 마쓰가 생각날지도 모른다. 현명한 독자가 되려는 묘한 욕망과 함께 말이다.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문학의 궁극적인 목표와 가치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소설 밖 현실에선 ‘일몰의 저편’에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격월간 문학잡지 《릿터 Littor》 33호에 수록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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