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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콜리 펀치

[도서] 브로콜리 펀치

이유리 저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한 편의 단편 소설을 읽고 그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경우가 있다. 열린 결말이라고 하지만 모호하거나 너무 재미있어서다. 다음 이야기라고 해서 반드시 단편의 확장을 말하는 건 아니다. 이 작가가 들려주는 다른 이야기를 읽고 싶다는 뜻이다. 내게 이유리 작가의 「빨간 열매」가 그러했다. 자신의 유골로 화분을 만들어달라는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인 「빨간 열매」에서 아버지는 진짜 화분이 되고 식물로 되살아나다. 어디 그뿐인가. 식물이 된 아버지는 말을 건다. 물을 달라고 산책을 나가자고 딸을 귀찮게 한다. 딸은 순순히 아버지를 데리고, 그러니까 화분과 함께 산책을 나선다. 아버지는 산책에서 만난 다른 화분과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해서 결실은 빨간 열매로 이어진다.

 

그래, 소설이니까. 소설에서 상상과 환상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신기한 건 그 환상이 너무 좋다는 거다. 그 환상이 아름답고 신비해서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사는 현실에서 일어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전혀 이상하지 않게 다가온 것이다. 이유리의 환상은 첫 단편집 『브로콜리 펀치』에 가득하다. 이유리가 그린 환상은 우울하고 답답한 현실의 도피처가 아닌 즐거움과 치유의 세계라고 할까. 그러니 자꾸만 그 환상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다.

 

단편집에 수록된 8편 가운데 단연 최고는 표제작인 「브로콜리 펀치」다. 복싱 선수인 원준의 오른손이 하루아침에 브로콜리로 변한 것이다. 세상에나 손이 브로콜리로 변하다니. 놀라운 건 소설 속 화자인 나는 아무렇지 않게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빨간 열매」에서 딸이 화분이 된 아버지를 무시하고 방관하지 않고 인정한 것처럼. 그러니까 이유리의 소설에서는 기이한 현상이나 환상은 낯선 게 아니라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당연한 일이라는 게 기조라고 할까. 그러니 당황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해결책을 모색한다.

 

병원에 가니 의사는 아무렇지 않게 약과 물을 마시 마시고 푹 쉬라고 처방한다. 이미 많은 이들이 경험한 일상, 누군가는 손가락이 강낭콩이 되고 고추가 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게 소설을 읽으면서도 다행이다 싶었다. 마음이 힘들면 그런 현상이 나타나니 신나게 놀고 노래 부르면 좋아질 거라는 소설 속 어른의 말대로 원준의 손은 나아진다. 회복의 과정은 브로콜리가 꽃으로 피어나는 것으로 표현되는데 그 모습은 무척 묘한 감동을 안겨준다. 상대 선수를 때려야만 했던 복싱 선수 원준이 쌓아둔 지치고 아픈 마음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 같다고 할까.

 

 

모든 봉오리가 저마다 한껏 피어나 가장자리의 꽃은 축 늘어지고 가운데의 꽃은 곳곳이 하늘로 뻗어, 마치 화려한 샹들리에를 뒤집어놓은 것 같은 모양이었다. 손끝으로 꽃송이 하나를 살짝 쥐어보니 깜짝 놀랄 만큼 맵싸한 향이 물큰 퍼져 나왔다. 평범한 꽃향기와는 다른, 훨씬 강렬하고 정신을 청량하게 해주는 향이었다. ( 「브로콜리 펀치」, 109~110쪽)

 

우리의 마음속 어떤 미움과 분노가 브로콜리의 꽃처럼 터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다. 말할 수 없었던, 차마 꺼내지 못했던 마음의 힘듦이 소설처럼 브로콜리나 다양한 채소로 나타난다면 어떨까. 내가 이렇게 아프구나 돌아보고 치료하고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이유리의 재밌고 신나는 환상은 우리의 마음을 돌볼 수 있는 하나의 신호가 된다. 그런 신호는 죽은 연인이 유령으로 돌아온 『손톱 그림자』, 옛 남자친구가 버리고 간 이구아나가 말을 하는 『이구아나와 나』에서도 만난다.

 

『손톱 그림자』에서는 5년 전 버스 사고로 죽은 연인 용준이 수정을 깨운다. 용준은 수정과 작년에 결혼한 남편 석기에게도 보인다. 수정과 석기는 무섭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용준과 대화를 나눈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 묻는 용준에게 사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석기와 어떻게 만나 결혼했는지도 알려준다. 심지어 석기가 출근하고 함께 밥을 먹는다. 용준은 자신이 죽은 후 수정이 어떻게 자신을 조금씩 잊었는지 듣는다. 누구에게도 전할 수 없었던 수정의 마음이 드디어 상대를 찾았다고 할까.

 

오후에 돌아온 석기는 용준을 돌려보낼 방법으로 용준이 죽은 장소를 제안한다. 버스가 전복된 장소에서 용준은 사라진다. 용준이 나타난 건 자신을 잊어도 괜찮다는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한 사람을 잊고 살아간다는 건 어떤 걸까. 처음부터 잊히는 건 아닐 것이다. 누군가 떠나도 남은 이의 삶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니까. 『이구아나와 나』의 ‘나’가 남자친구가 남기고 간 수조 안 이구아나를 선뜻 버리지 못하는 심정도 비슷하다. 그런 이구아나가 멕시코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하니 수영 강사이 나는 특훈을 시작한다. 싱싱한 채소를 먹이고 커다란 고무대야에서 수영을 가르친다. 한국에서 멕시코까지 수영을 해서 가겠다는 이구아나나 이구아나를 응원하고 지지하는 사람이나 황당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유리의 소설에서는 이상하기는커녕 그들을 격려하게 된다.

 

나에게도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나만 모르는 게 아닐까 싶은 마음까지 든다. 나무가 된 큰언니도 내가 그곳을 지나칠 때마다 나에게 말을 거는 건 아닐까. 한 번쯤 멈춰서 매만지고 안아줘야 할까. 자꾸만 많아지는 흰머리나 한 번씩 병원을 찾게 만드는 나의 오른쪽 귀는 내 마음이 지쳤다는 걸 확인시키는 신호는 아닐까 싶은 거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우리에게는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는 그들을 그리워하는 시간과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마음 한 조각 돌아볼 수 있는 시간 또한 필요하니까.

 

이유리의 단편집 『브로콜리 펀치』는 모자가 된 아버지와 죽은 자를 만나는 문이 열리는 황정은의 단편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좋아하는 작가의 첫 소설집을 생각하며 읽었다. 비슷하게 닮았지만 이유리의 환상은 경쾌한 왈츠처럼 가볍고 빠르게 중독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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