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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올레트, 묘지지기

[도서] 비올레트, 묘지지기

발레리 페랭 저/장소미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4점

고민이나 비밀을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없다는 건 불행한 일이다. 부모나 선생님이 그런 역할을 해줄 수 있겠지만 그들과 친구로 지내는 이는 얼마나 될까. 인생에 있어 친구는 소중하다. 그렇다고 친구의 비밀을 무조건 알 필요는 없다. 내 비밀을 들어주는 친구의 비밀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필요로 하기도 하니까. 나는 그것을 ‘순환의 법칙’ 정도로 여긴다. 그런 삶의 순환이 우리를 숨 쉬게 한다고 믿는다.숨통이 조여오는 슬픔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어 우리 생은 아름답게 빛난다. 발레리 페랭의 『비올레트, 묘지지기』 는 그런 소설이다. 켜켜이 쌓인 슬픔과 고통이 새어나갈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소설, 작은 틈을 벌려 그늘진 삶에 빛이 들어오도록 도와주는 소설이라 말하고 싶다.

 

묘지기기 비올레트가 들려주는 담담한 자신의 이야기는 모두를 울린다. 단순하게 묘지를 관리하며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기대했던 나는 소설을 읽을수록 점점 그녀의 삶에 빠져들었고 제발 그녀가 회복되기를 바랐다. 어쩌면 그건 현재를 살아가는 나와 당신을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비올레트는 묘지를 관리하고 방문객에서 묘지의 위치를 알려주고 화분을 팔고 정원을 가꾸며 고요하고 단순한 삶을 살아간다. 남편 필리프 투생은 실종 상태고 죽음에 둘러싸였지만 평온을 느낀다.

 

죽음이란 늘 그 모양이다. 죽은 지 오래될수록 산 사람들에게 끼치는 죽은 사람들의 영향력은 미미해진다. 세월이 삶을 풍화시킨다. 세월이 죽음을 풍화시킨다. (21쪽)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을 것 같은 비올레트, 소설은 그녀가 살아온 삶을 천천히 보여준다. 누군가 죽고 장례식이 진행되고 추모하는 이들의 모여 죽은 자를 위해 노래하고 편지를 낭독하며 그를 기억하는 일, 그것을 조용히 지켜보고 그 순간을 기록하는 비올레트.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그녀의 상처와 슬픔, 죽음이라는 사유를 통해 조금씩 회복하고 치유되는 시간은 그녀만의 생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그것이기에 때로 엄숙해지고 때로 먹먹함을 숨길 수 없다.

 

죽음은 도처에, 언제나 있다. 아무도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안 그랬다간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죽음은, 늘 다리 사이에서 어슬렁거리는데도 우리를 물어뜯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 존재를 깨닫게 되는 개와 같다. 더 나쁘게는 우리 측근을 물었을 때. (117쪽)

 

 

아무리 단순하게 살고자 노력해도 삶은 너무도 복잡하고 우리를 힘들게 만든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일인지 헤아리기도 전에 슬픔의 파도가 덮쳐온다. 비올레트에게도 그랬다. 부모에 대한 흔적은 하나도 모른 채 고아로 시작된 삶. 비올레트란 이름에 의미조차 생각할 수 없다. 이리저리 위탁가정을 옮겨 다니며 그녀가 바란 건 그곳을 벗어나는 일뿐이었다. 그런 그녀 앞에 등장한 필리프를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첫 만남에 끌렸고 그를 위해서는 모든 걸 할 수 있었다. 필리프와 미래를 계획하는 일 따위는 없었고 사랑하는 일만 중요했다. 자신을 무시하고 천대하는 필리프의 부모를 그가 막아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곧 비올레트의 전부가 된 딸 레오닌이 태어났으니까. 기차가 지날 때마다 차단기를 관리하는 건널목지기도 비올레트는 충분했다.

 

레오닌은 비올레트를 웃게 했고 행복하게 만들었다. 남편의 바람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레오닌만 있으면 이겨낼 수 있었다. 그랬기에 친구들과 신나게 캠프를 떠난 레오닌이 사고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걸 믿을 수 있었다. 레오닌의 죽음은 비올레트의 삶을 꺾어버렸다. 슬픔의 무게로 장례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그랬던 그녀가 레오닌이 잠든 곳의 묘지지기로 일하게 된 건 운명의 끌림이었을까. 레오닌을 만나러 간 곳에서 사샤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비올레트는 여전히 고통 속에 침잠한 채 죽은 듯 살았을 것이다. 슬픔에 잠긴 비올레타에게 묘지지기를 하면서 그가 정원을 가꾸게 된 이야기를 듣고 흙을 만지며 그녀는 안정을 찾기 시작한다. 거기 레오닌이 있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레오닌의 사고에 집착하는 비올레타에게 앞으로 나갈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삶이란 이어달리기와 같아, 비올레트. 내가 누군가에게 바통을 넘기면, 그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바통을 건네지. 내가 너에게 바통을 넘겨줄게. 언젠가 너도 다른 누군가에게 바통을 건네도록 해.” (383쪽)

 

그러나 비올레트와 다르게 필리프는 묘지지기의 삶에 적응하지 못했다. 묘지를 관리하는 일은 비올레트만으로 충분했기에 그는 예전처럼 오토바이를 타고 여자를 만났다. 그의 외출은 실종으로 이어졌다. 죽음이 정착하는 묘지를 살피고 기록하는 비올레트에게 사랑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유언을 위해 묘지를 찾은 남자 쥘리앵의 등장으로 사랑이 다시 시작된다. 경찰인 쥘리앵은 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자의 곁에 묻어달라는 어머니의 일기장을 비올레트에게 건넨다. 그 일기장에는 자신의 사랑에 대한 기록과 죽은 남자의 묘를 찾을 때마다 만난 묘지지기인 자신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발레리 페랭은 비올레트를 중심으로 남편 필리프와 쥘리앵과 그녀의 어머니, 레오닌 죽음의 진실에 관한 이야기를 풀리지 않는 매듭처럼 엮었다. 소설 곳곳에서 모든 죽음을 애도하며( ‘모든 죽음은 누군가의 사건이니까요.’ (49쪽)), 죽음과 삶을 사유(‘우리는 목숨을 구하는 방법은 배우지만, 자신 혹은 타인의 삶을 되살리는 방법은 배우지 못한다.’(496쪽))하고 통찰한다. 동시에 아름다운 한 편의 연애소설이자 끝을 예상할 수 없는 추리소설의 형식도 지닌 놀라운 소설이다. 부서질 것 같은 비올레트의 생이 단단해지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삶의 목적과 신비를 배운다. 저마다 생의 비밀을 간직하며 순환하고 있다는 사실도 함께 말이다. 상실과 회복을 반복하는 모든 생을 위로한다. 좋은 소설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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