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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쓸모

최태성 저
다산초당 | 2019년 06월

 

 

- 삼국유사.

유 遺 라는 한자에는 '버리다','유기하다'라는 뜻이 있어요. 유사 遺事 라는건 말 그대로 '버려진 것들을 모은 역사' 입니다. p18 … 일연 스님은 이 책을 쓰기 위해 청년 시절 무터 사료를 모았다고 합니다. 단군신화를 비롯해서 전서르 민담 등 정식 역사로 인정 받지 못한 이야기들을 모은거예요. 그걸 다듬고 정리해서 썼습니다. p19 … 삼국유사에 … 신라 경문왕은 왕관이 아닌 두건으로 귀를 가립니다. 두건을 만드는 기술자가 그 비밀을 알게되고, … 대나무 숲에 가서 소리를 칩니다. … 삼국유사에도 그리스 로마신화 처럼 흥미 진진한 이야기가 정말 많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요. p21

 

 

- 미다스 왕

 하는 일마다 성공하는 사람을 가리켜 '미다스의 손'이라고 하잖아요? 이 말은 그리스 로마신화에서 나온것으로, 어떤 물건이든 손만 대면 황금으로 변하게 만드는 미다스 왕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한데 미다스 왕은 황금 손으로만 유명한게 아니에요. 아주 긴 귀로도 유명했습니다. 당나귀 귀라고 하죠?. 미다스 왕은 당나귀 귀를 왕관 속에 감추고 지냈어요. 하지만 숨길 수 없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이발사였습니다.머리를 자를 때 왕관을 벗어야 했으니까요. 미다스 왕은 이발사에게 비밀을 지킬 것을 당부 합니다. … 그러나 이발사는 갈대숲으로 갑니다. 그곳에 구덩이를 파고 외치지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p20

 

- 무민

핀란드의 국민 캐릭터, 무민은 동물이 아니라 북유럽 설화에 등장하는 괴물 트롤이에요. 사실 우리나라 설화에도 인어공주에 비견할 만한 해녀 '아리'가 있고. 한국판 트롤이라고 할 수 있는 도깨비가 있습니다.

 

- 포항 영일만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연로랑과 세오녀는 신라시대 동해 바닷가에 살았던 부부 입니다. 어느날 연오랑이 바닷가에서 해초를 따다가 한 바위에 올라갔는데 갑자기 그 바위가 움직이더니 바다 건너 일본 땅까지 갑니다. 거기서 그는 왕이 되었지요.그 지역 사람들이 연오랑을 보고 특별한 사람이라면서 왕으로 앉힌거에요. 그럴만도 한게 바위를 타고 나타났으니까요. … 그런데 세오녀 입장에서는 남편이 사라진거잖아요. 당연히 남편을 찾아 나섰겠죠. 그러다가 커다란 바위 옆에 있는 남편의 신발을 발견합니다. 세오녀가 바위에 올라갔더니 그 바위가 움직여 연오랑이 있는 곳으로 갑니다. 그래서 세오녀도 그 곳의 왕비가 되었어요. 그 후에 신라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난데없이 해와 달이 뜨지 않는거에요. 그러자 점괘를 보는 관리가 이런 말을 합니다. "해와 달의 정기가 일본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바로 연로랑과 세오녀가 일본으로 갔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왕이 두 사람을 다시 데려오기 위해 일본에 사신을 보냅니다. 하지만 돌아올 리 없지요. 그 곳에서 왕이고, 왕비잖아요. 대신 그들은 "왕비가 짠 비단을 줄테니 그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라 그러면 해결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 제사는 지낸 곳이 현재의 포항 영일만입니다. p24

 

 

- 시치미

고려시대 귀족들이 들겨 하던 고금 스포츠 '매사냥', 사냥용 매가 굉장히 비쌌습니다. … 그래서 매 주인은 자신의 매에 하얀 깃털을 매달아뒀습니다. 자기 이름을 써서 달아둔 거에요. 한마디로 이름표였던 거죠. 이걸 떼면 도둑질 입니다. 이 이름표를 '시치미' 라고 합니다. 매가 비싸니까 어떤 사람들은 시치미를 떼어내고 그 매가 자기 것인 양 했습니다. 시치미를 떼고도 모르는 척했어요. 여기서 시치미 떼지 말라는 말이 유래된 겁니다. p31

 

- 구진천

신라 문무왕때 사람. 무기를 만드는 기술자.  무기 중에서도 '쇠뇌'를 만드는 장인이었다. 쇠뇌는 활에 석궁처럼 방아쇠 장치를 달아서 큰 화살을 멀리 쏠 수 있게 만든 무기인데 당시 신라의 쇠뇌는 성능이 엄청나서 1000보나 날아갔다고 합니다. …  1000보라고 하면 700미터에 가까운 굉장한 거리입니다. … 구진천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했느냐면 중국에서도 구진천을 데려가려고 난리 였습니다. 구진천이 살았던 시대에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삼국을 통일 했습니다. …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669년에 당나라 황제 고종이 신라에 구진천을 내놓으라고 요구 합니다. 당나라 군사들이 전쟁 중에 보니까 신라에서 사용하는 쇠뇌가 무척 좋았던 겁니다. '와 저게 뭐야? 저걸 누가 만들었대?' 하고 알아보다가 구진천이라는 기술자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죠.p61…  신라는 구진천을 보내기 싫었지만 당의 요구를 거절할 힘이 없으니 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구진천이 끌려가고 … 당 고종은 얼른 쇠뇌를 만들어 바치라고 명령을 내렸지요. 구진천은 명령대로 쇠뇌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쇠뇌를 시연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당나라 황제와 고위 관료들 앞에서 구진천은 쇠뇌를 들고 방아쇠를 당겼다가 놓았습니다. '팡!' 하는 소리가 나는 동시에 모두들 먼 곳을 바라봤겠지요. 화샇이 멀리 날아갈까 잔뜩 기대하면서, 그런데 화살이 30보도 못 가서 뚝 떨어져 버린거에요. 이때 황제는 화를 냅니다. "1000보보다 더 멀리 쏠 수 있는 쇠뇌를 만들어야 할 판에 30보라니?" 그때 구진천의 대답은 참 재미있습니다. "신라의 나무가 아니라 당나라의 나무로 만들어서 그렇다고' 이야기 하거든요. p62 … 결국 당나라는 신라에서 나무까지 들여옵니다. 다시 시연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황제는 또 기대합니다. 신라의 나무로 신라 기술자가 만들었으니 군사들이 봤던 대로 엄청난 위력이겠지? 하지만 이번에도 화살은 60보 정도 날아가다가 떨어졌습니다. 구진천은 이번에도 나무 핑계를 댑니다.신라의 나무가 바다건너 오면서 습기를 잔뜩 머금어 제대로 완성되지 않았다고 말하지요. 구진천에 대한 기록은 여기까지 입니다. … 중요한 사실은 670년 당나라에는 화살을 1000보나 날릴 수 있는 쇠뇌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구진천은 끝내 쇠뇌를 만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p63 

 

- 초계문신제도

정조는 왕이 되자마자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정치 개혁을 위해 애씁니다. 신하들이 호시탐탐 자신을 노리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세력을 키우려면 자기를 따르는 사람이 있어야겠지요. 그래서 세운 것이 규장각입니다.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은 정조가 자기 사람을 키우기 위해 만든 기관이었습니다. 정조는 당파나 신분에 관계없이 젋고 똑똑한 관료들을 뽑아서 규장각에 배치했는데, 이것이 바로 초계문신제도입니다.개혁정치를 함께하기 위해 이미 과거에 합격한 사람 중 37세 이하의 인재를 뽑아 3년 정도 특별 교육을 한 것이지요. 그중에는 박제가, 유득공 같은 서얼 출신도 많았습니다. … 초계문신의 대표 인물은 바로 다산 정약용입니다.  p68

 

-정약용

정약용은 정조가 키운 학자 입니다. 그에게 정조는 스승이자 멘토였어요. … 정약용은 다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한 조선의 르네상스인이었습니다. 실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 바탕은 유학에 있어 관련 서적을 여러권 집필하였고 정치와 법, 의학과 지리학, 언어학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거중기와 녹로를 발명해 수원화성 건설에 혁혁한 공을 세웠고 시인으로서 여러 작품을 남기기도 했죠.또 500여권이 넘는 책을 썼으니 뛰어난 작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다재다능한 정약용에게도 약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종교가 그의 아킬레스 건이었어요.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인데 정약용의 집안은 천주교를 믿었거든요. … 정조는 그 사실을 모른척 했지만 계속해서 올라오는 탄핵 상소를 외면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정약용을 내치기로 합니다. 너무나 아끼는 신하지만 계속 붙잡고 있으면 오히려 정약용에게 독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거죠. 그래서 미리 정약용에게 언질을 줍니다.

 

" 내가 내일 호통을 치면서 너를 자를 거다. 그럼 우선 잘못했다고 해라, 물러나서 기다리면 내가 너를 다시 부를 것이다." p70

 

정약용은 정조의 편지를 받고 물러납니다.… 관직에서 물러난 정약용은 왕이 다시 자신을 불러줄 날만 기다리며 지냈습니다. 그가 조정에서 물러난 뒤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 추측할 수 있는 증거가 있어요. 자신의 남양주 생가에 걸어놓은 현판이죠. "여유당"이라고 쓰인 현판인데 … 노자의 <도덕경>에서 나오는 글귀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 사방을 경계하고 신중하게 하루를 보내라는 의미로 써둔거에요. … 자신을 단속하며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는데 드디어 정조의 편지가 도착합니다.  

 

"보름뒤에 너를 부를테니 준비하고 있으라."p71

 

그런데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들려옵니다. 정조가 세상을 떠난거에요. 약속한 날을 딱 하루 앞두고요. 정조가 승하한 날이 정약용을 다시 부르기로 한 전날입니다.

 

… 정조 승하 이후 신유박해로 수많은 천주교인이 처형당하고, 정약용 또한 유배를 갑니다. 자신은 이미 천주교와 인연을 끊었다는 간곡한 호소가 받아들여져 겨우 사형을 면하였지만 후에 맏형인 정약현의 사위가 일으킨 역모 사건에 연류되었다는 이유로 강진으로 유배지를 다시 옮기게 됩니다. 가문은 폐족이 되었고, 자그만치 18년동안 귀양살이를 합니다.그 뒤에 여유당으로 돌아와 다시는 조정에 발을 들이지 못한 채 그 곳에서 18년을 보낸 뒤 일생을 마칩니다. p72 

 

18년 동안 쓰여진 500여권에는 양 뿐만 아니라 분야도 방대합니다. 지방 수령이 지켜야할 <목민심서>, 제도의 개혁 원리와 방안을 다룬 <경세유표>, 형벌의 운영에 관한 <흠흠신서>, 고조선부터 발해까지 역대 왕조의 영토를 연구한 <아방강역고> 등이 대표적인 저서입니다. 이외에도 의학서, 어원 연구서, 시지브 충수를 분석하거나 아이들을 위해 한자를 쉽게 가르쳐주는 책 등 몇가지로 설명하기 힘들 만큼 다양합니다. p73

 

기록에 따르면 정약용은 복숭아뼈에 세 번 구멍이 났다고해요. 양반다리를 하면 복숭아뼈가 눌리잖아요. 책상앞에서 그 자세로 움직이지도 않고 밤낮으로 글만 쓴겁니다. 나중에는 복숭아 뼈가 아프니까 일어서서 선반위에 책을 올려두고 공부하며 글을 썼다고 해요. p74

 

- 황룡사9층목탑

선덕여왕은 위기상황에서 황룡사 9층목탑을 지어 올리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황룡사 9층 목탑은 높이가 80미터 정도 되는 어마어마한 탑이었습니다. 80미터면 아파트 3층에 달하는 높이입니다.… 몽골 침입때 불타지 않았다면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건축물이 되었을 겁니다. 완성된 9층 목탑에는 층마다 신라를 괴롭힌 주변국들의 이름을 새겼다고 합니다. 1층부터 차례로 일본, 당, 오월, 탐라, 백제, 말갈, 거란, 여진, 고구려의 이름을 넣었어요. p86

 

Q. 왜 주변국들의 이름을 탑에 새겼을까요? 한마디로 언젠가 신라의 발아래 두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 실제로 선덕여왕은 이 탑을 완공한 뒤에 이렇게 선언합니다. "우리가 삼국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p87

 

- 김춘추 (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은 신라 조정의 비주류 였습니다. 김춘추는 왕족이기는 했지만 할아버지가 폐위를 당해 어찌보면 폐족이라고 할 수 있었어요. 게다가 대야성의  성주는 김품석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이 김춘추의 사위였습니다. 요충지를 빼앗긴 것만으로도 질타의 대상이 될텐데, 대야성 전투는 김품석 때문에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김품석이 부하의 부인을 탐했고 이를 원망하던 부하가 백제군과 내통한 것이 패전의 원인이 되었거든요. 김춘추도 그 전투로 딸을 잃는 슬픈 상황이었지만 사위의 잘못으로 중요한 성을 잃었으니 김춘추를 향한 반대파들의 정치 공세가 적지 않았습니다. p89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를 이용해 인쇄기를 발명한 사람,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대량인쇄 할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프레스'입니다. 프레스는 포도주나 올리브유를 만들기 위해 열매의 즙을 짜는 압착기를 말합니다. 구텐베르크는 여기서 영감을 얻습니다. 금속활자는 구텐베르크가 조폐국에서 일할때 금화나 은화에 문양을 새기는 것을 보고 아이디어를 가져왔다고 알려져 있고, 인쇄에 필요한 종이는 이미 중국에서 발명되어 있었습니다. 중국의 제지 기술이 세계 각지에 전해지면서 유럽에서도 종이를 만들어 사용했어요. … 구텐베르크가 자신의 인쇄기로 가장 먼저 인쇄한 책은 바로 성경입니다.『 구텐베르크 42행 성서』… p109

 

- 박지원

청나라에 방문한 박지원은 문화충격을 받아요. 오랑캐의 나라인줄 알았는데. 직접 가보니 굉장히 발전한 나라였기 때문이죠. 일례로 박지원은 청나라의 수레를 보고 놀랍니다. 수레에다가 짐을 실어서 물자를 교류하는 모습을 보고는 우리나라는 왜 저렇게 하지 않을까 의문을 가져요. 그런데 다른 사신들은 상업이 발달한 것 조차 우습게 봅니다. 오랑캐들이라서 돈만 탐낸다고 생각한 거예요. 조선의 양반은 상업을 천시했잖아요. 조선은 산이 많아서 길이 많이 나지않았으니 수레도 필요없다는게 그들의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박지원의 관점은 달랐습니다. 수레를 만들면 길이 만들어진다는 거에요. 배울 점이 있으면 배워야 한다는게 그의 생각이었습니다.하지만 조정에서는 명분과 자존심이라는 색안경을 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 김육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 '대동법의 아버지' p181

(* 대동법 : 쌀로 세금을 내는 제도 / 공납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개혁안 / 광해군때 경기도만 시행)

사실 광해군은 대동법을 적극적으로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왕은 기본적으로 선대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요. 경기도에서 대동법을 시행한 것도 영의정 이원익이 강력하게 밀어붙인 결과입니다.  경기도에서 시행되던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데 무려 100년이 걸립니다. 한 세기가 흐른거죠. 그 긴 시간 동안 대동법 확산을 위해 인생을 바친 사람이 김육이에요. 김육은 1580년에 태어났습니다. 김육이 열두 살때 임진왜란이 터져서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10대에 소년 가장이 되었는데 곧이어 어머니도 돌아가십니다. 힘든 상황에서도 과거에 합격해 스물 네살에 성균관에 들어갔어요. 4년이 지나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김육을 비롯한 성균관 유생들은 <청종사오현소>라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김광필, 정영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이렇게 다섯명의 학자를 문묘에 모시자는 내용이었어요. 당시 북인의 수장이었던 정인홍은 이를 반대했고, 광해군은 정인홍 편을 들어주었어요. 심하게 반발한 유생들은 처벌을 받았습니다. p185 … 김육도 대과 응시 자격을 빼앗겼지요. 더 높은 관직으로 나아갈 방법이 없어진거예요. 영창대군이 살해 되는 등 조정에 혼란이 더해지자 김육은 성균관을 박차고 나와 귀농해버립니다. 가족을 데리고 가평의 잠곡이라는 곳으로 갔어요.  벼슬을 잃고 부모도 없으니 무슨 돈이 있겠어요. 집 지을 돈도 없어서 땅을 파고 움막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2년을 고생한 후에야 겨우 집을 마련했다고 해요. 그러고는 숯장사를 합니다. 나무를 태워 숯을 만든다음 한양으로 가져가서 팔았어요. … 김육의 눈에 들어 온 건  … 백성들의 비참한 처지였어요. 매일 한양을 오가며 봤던거에요. 굶어죽은 시신이 거리에 널려있는 걸 보면서 김육에게는 좌우명이 하나 생깁니다. '애물제인(만물을 사랑하여 사람을 구제하자는 뜻)'

공납 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도 이 시기였어요. 직접 노동하고 세금을 내면서 제도의 모순을 절실하게 느낀 것이죠.  잠곡에서 10여 년의 시간을 보낸 뒤에 김육에게 기회가 찾아옵니다. 인조반정이 일어나 세상이 바뀐것이죠. … 김육에게 곧바로 관직 제의가 옵니다. 관직 생활을 하는 내내 김육의 주 관심사는 공납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관직이 낮아서 그럴만한 힘이 없었어요. … 결국 과거 시험을  또 봅니다. 결과는 장원이었어요. 그럴 수 밖에 없었는게 최종 시험에는 '현실 문제에 대책을 논하라' 는 문제가 나오거든요.… 호란 이후 정세가 안정되기 시작하자 바로 대동법이야기를 꺼냅니다. … p187 … 인조가 사망하고 70세의 나이가 된 김육은 새로 즉위한 왕 효종에게 사직 상소를 올립니다. 효종은 업무 능력이 뛰어난 김육을 붙잡습니다.  …효종이 자신의 사직 상소를 일곱 번이나 물리치고 계속 벼슬을 내리자  조건을 내겁니다. 대동법을 확대 시행해주면 일을 하겠다고 한거에요. 이렇게까지  나가니까 드디어 충정도에도 대동법이 시행됩니다.  호서대동법이 시행되고 … 이번에는 대동법을 전라도까지 확산시키기 위해 김육은 또 상소를 올리기 시작합니다.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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