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토론토 대학 연구원으로 있을 때였다. 기막힌 요리를 내놓는 독일인 엄마와 함께 사는 쉰살 총각인 남편의 지도교수는 한달에 한번 꼴로 우리 가족을 집에 초대하곤 했는데, 남편이 내게 저녁초대 날짜를 말해줄 때마다 우리는 서로 한숨을 내어쉬곤 했었다. 바로 와인 때문이다. 프란시스(산타 할아버지 같은 배에 귀여운 눈을 가진 그 교수의 이름)는 와인 메니아로 항상 좋은 와인을 저녁 먹기전에 한병, 저녁 먹으며 한병, 디저트 먹으며 한병을 마시는데, 그러다보니 그의 저녁 식사 초대는 짧아야 여섯시간이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게다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온갖 소재의 이야기들에 맞장구를 치다보면 밥도 빨리 먹고 술도 빨리 취하는 우리나라 문화에 익숙해있던 우리로서는 와인과 함께하는 그 문화가 가끔은 버거웠었다.
이제 한국에 돌아온지 3년..와인 색의 이 책을 집어들며 순진한 표정으로 와인을 예찬하던 그가 그리워지는 건, 책의 많은 부분에서 인생과 와인을 빗대어 와인만큼 우리로 사람과 삶과 자연과 신의 관계를 이해하게 하는게 없다던 그의 말이 저자의 생각과 많이 닮아서인지도 모른다...
이 책은 가볍게 상대의 비위를 맞춰주며 대화해야하는 상대가 아닌, 내 눈빛 하나에도 그 의미를 읽어내주는 오랜 지인들과 그렇게 좋은 와인을 나누며 "제가 좋은 글을 봤는데요.."하며 말해주고 싶은 책이다. 저자가 달아놓은 소 제목들은 하나하나 따로 철학강의가 되어도 좋을 만큼 읽는이로 하여금 오래오래 생각하게 한다. 마치 와인 한모금을 입안에서 금방 삼키지 않고 굴리며 음미하듯이...이 책은 우리로 한순간의 삶도 의미없지 않음을, 겸허하게 최선을 다해 살것을 권유한다. 저자가 한 많은 인용중 하나를 적어본다.
"하나의 밀레짐은 한 해 동안 포도농부가 경함한 좋은 날, 나쁜 날, 실수, 불운, 놀라움, 행복들로 점철된 수천 개의 모험들이다. 밀레짐은 한해동안 펼쳐진 기쁨, 실망, 성공, 눈물, 희망의 역사다."
이제 이 책을 가졌으니 다시 프란시스를 만난다면 열시간은 거뜬히 유쾌하고 마음통하는 수다를 떨 수 있을것이다. 좋은 사람들과의 기분좋은 만남을 기대하며 몸이 들뜨게 만들어준 저자에게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