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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아의 나라

[도서] 리아의 나라

앤 패디먼 저/이한중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출판사 반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상상해보자. 당신에게는 가족이 있다. 집도, 땅도, 마을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온 나라가 전쟁통이 되어 살기 위해서는 세간도 추억도 하다못해 자식까지도 버려가며 낯선 땅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당신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말도, 문화도, 생활도 그 어느것도 이해할 수 없으며 그 땅의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당신의 언어, 가치관,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 도움을 청할 길이 없다. 능력있던 가장도 모든 일을 해치웠던 지혜로운 어른도 한순간에 온종일 집에만 처박혀 멍하니 앉아있다. 때때로 도움이나 제도가 필요한 일이 생기면 손짓발짓을 해가며 온갖 눈총과 한숨 끝에 맞는 건지 아닌건지 모를 뭔가를 구해와야 한다.
어찌저찌 먼저 정착한 먼 친척과 같은 민족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집 한칸을 구해 살아가던 나날, 아이가 아프다. 사랑을 다해 키우던 아이가 눈을 뒤집고 숨을 못 쉬며 온몸을 경련한다. 병원에 갔더니 나의 믿음과 지식은 전부 무용한 것이 되고 말도 생김도 다른 이들이 떼로 몰려와 아이를 이리 뒤집고 저리 헤집어가며 온갖 장치를 매달아놓는다. 듣기로는 저 백인들이 사람 장기를 먹는다고 한다. 혹자는 우리 민족의 수를 줄이기 위해 아이를 낳지 못하도록 수를 쓴다고도 한다.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다. 뭔가를 열심히 말하고 윽박지르는데 서로가 서로의 그 무엇도 이해하지 못한다. 서명을 하라니 한다. 그 알 수 없는 문자의 나열, 이 땅에 오기까지 수십수백번도 더 했다. 했다. 내가 알기로 가장 필요한 방법이 있는데 그건 안 된다고 한다. 저들이 주는 약과 주사와 처치가 아이를 아프게 한다. 내가, 온 우주만큼 사랑하는 내 아이를 학대하고 있다고 한다. 잠시 집을 비운 사이 남의 집에 훔쳐다놓고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해댄다. 영영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단다.

이 상황에서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당신의 믿음과 언어, 정체성을 모두 버려야 한다. 거부는 없다. 저항할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당신에게는 지켜야 할 가족이 있고 모두가 이 땅의 이방인이다. 사실상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보편적이며 누구에게나 쉽게 납득 가능한, 당연한 것이라고 여긴다. 과연 그럴까? 내가 정당한 성원으로 여겨짐을 믿어 의심치 않는, 이 합리적이고 타당한 세계는 누구에게나 그러한 곳일까? 그렇지 않다. 당장 낯선 장소에만 가도 사람은 적응에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나마 조금 긴장하는 정도로 해결되는 것은 그 장소, 그 상황이 그나마 이해 가능한 시스템에 속하기 때문이다. 범위를 넓혀보자. 해외에 가기 전 우리는 도착지의 문화나 언어를 미리 학습한다. '덜' 당황하기 위함이다. 만일 그럴 시간이 없다면? 생각해본 적도 없는 가치관이나 절차를 요구한다면? 뭔가를 설명하려고 애쓰다 결국 찌푸려지는 미간을 하루, 이틀, 일주일, 반년... 수도없이 마주해야 한다면? 평생을 당연한 것으로 믿고 살아온 삶의 방식을 보고 충격을 금치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고 비명을 지르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살아야 한다면? 그러고도 나의 세계가 당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이 책의 주인공처럼 서구사회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몽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 언제든 갑작스레 낯선 상황에 놓인다면 맞닥뜨릴 수 있는 문제다.

사람은 그가 속하고 오랜 시간을 살아온 문화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사람의 일 또한 그러한 까닭에 질병 또한 문화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적어도 환자 개인 또는 그 보호자가 질병을 이해하는 관점은 그가 속한 문화, 그의 위치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4장에서 볼 수 있듯 의료현장에서 발생하는 문화 충돌에 대해 다수 혹은 강자의 입장에 있는 이들은 어떻게 우열을 배제하고 의료대상자와 보호자를 존중할 수 있는가? 또 어떻게 치료적 협력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가?
현대 서구 의료 체계, 그 중에서도 대형병원은 환자보다는 의료진 및 기관을 중심으로 한다. 환자 또는 보호자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맥락 안에 있든 간에 의료현장에서 주도권을 갖기는 쉽지 않다. 이것은 분명 효율성을 높이고 각종 변수의 위협을 제거하는 데에 적합하다. 그러나, 환자에게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시스템 앞에서 단순한 몸 또는 부위, 질병으로 존재하는 환자에게는 그 자신의 배경이 있다. 그는 사람이다. 6장과 7장에서 볼 수 있듯 문화적 배경과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다중압박상태에 놓이는 의료대상자 및 보호자에 대해 공공의료시스템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그들의 장기적인 건강을 위해 사회복지시스템은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어떤 것에 집중해야 하는가? 만일 문화적 신념이 효과적인 치료방침과 충돌할 때 의료진은 어떤 태도로 대상자들을 대해야 하는가?

이 책은 비극인가. 그러하다. 그것도 아주 큰 비극이다. 누구의 잘못인가? '감히' 고마워할 줄 모르는, '미개하고 비문명적인' 몽족 이주민의 탓인가? 과연 그럴까? 애초에 그들은 왜 자급자족하던 땅에서 벗어나 이곳까지 떠밀려왔는가? 왜 알지도 못하는 언어의 나라로 도망치고 쫓겨와야 했는가?
민족으로서의 몽족의 역사는 가히 피란과 자구의 삶이라고 할 만하다.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리면서도 굴복과 동화를 거부했던 이들은 미국에 '비밀군사'로 이용되었고, 그 결과 수많은 이들이 난민이 되어 미국으로 몰려왔다. 살기 위해서, 또 마땅한 대가를 받기 위하여. 그렇게약속했기 때문에, 우리의 목숨을 걸고 당신들의 전투를 대신 치렀으니 응당 신의를 지킬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문제는, 달리고 떠내려가며 당도한 나라가 입을 싹 닦은 정부와 그런 일이 있었던 줄도 모르는 대다수의 국민, 알지만 그래도 우리 사회에 오지는 말라는 파렴치한으로 구성된 곳이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아기가 울면 아편을 물에 타서 먹었어요. 이기가 잠잠해져서 군인들한테 들키지 않게요. 아기 소리 매문에 알려지면 다 죽을 수 있으니까요. 아편을 타 먹이면 아기는 대개 곯아떨어져요. 하지만 잘못해서 너무 많이 먹이면 죽을 수도 있어요. 그런 일이 아주 많았어요.” (…) 몽족의 경우 아편 과다 복용으로 아기가 죽는 일은 워낙 자주 일어나서 신문 머리기사를 장식하거나 세상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한 나라에 애도의 물결이 이어지기는커녕 살다 보면 있을 수 있는 일로 무덤덤하게 가족과 친지에게 알려지는 정도였다.(p.270)

어쩌면, 아니 분명히 이것은 받아들인 나라의 시스템이 미흡했기 때문이다. 그렇게까지 거창하게 말하지 않아도, 마땅히 환대해야 할 이웃을 이웃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시 머물렀다 가는, 돈만 축내는, 사람이 아니라 어떠한 '대상' 정도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과 생각이 다른 사람간의 소통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조율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것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럴 시간과 비용과 기회가 충분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든 될거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 결과가 이것이다. 이 책에서 리아, 한 아동과 그의 가족으로 대표되는 모든 비극들이다. 우리에게는 책임이 있다. 억울한가. 과연 그럴까?
이제 우리는, 적어도 한국은 다민족국가임을 부정하는 것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되었다. 꾸준히 제기되었으나 그저 모르쇠하며 단일민족의 순수성으로 대중을 동원하기에는 개개인이 마주하는 사회의 모습이 이미 그렇지 않게 되어버렸다. 몽족을 대하는 미국인들의 태도, 그들의 혐오범죄가 남 일처럼 느껴지는가? 그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한다고 치자. 어느 누가 선뜻 환영하겠는가? 적어도 목소리 큰, 다수라고 여겨지는 권력집단은 아닐 터이다. 당장 온 나라를 시뻘겋게 뒤덮는 십자가는 그러려니 하면서도 모스크 하나 들어선다는 데 온 나라가 뒤집어져가며 악을 쓰지 않는가? 이주노동자에게 정당한 임금을 지불하고 난민을 환대하는 것에도 하늘이 무너질세라 반대하지 않는가? 자치권을 줄 수 없다면, 우리와 다른 문화적 배경을 지닌 이들이 다르게 살아가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면 사회는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는가? 이전에, 그들이 나와 같은 권리를 보장받는 것에 크나큰 위협을 느끼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이 책을 단순히 의사소통과 협력에 실패해 가능성을 놓친 비극적 케이스로만 기억할 수도 있다. 반대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전보다 더, 앞으로는 더욱 다채로워질 사회는 소통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책을 읽을 모두가 곱씹어보기를 바란다. 잠을 설치고 막막함에 몸부림치며. 내가 아닌 그들이 그러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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