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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시스, 배철현의 비극읽기] 슬픔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를 일러 국가라 한다

 

<4> 비극 주인공은 희생양이다
http://www.hankookilbo.com/v/75c5997469f5492f8cc1bfd5f35b0503

 

아테네의 공연장. 시민들은 여기에 모여 비극을 보고 함께 눈물 흘리며 공동체로서의 결속을 다졌다. 비극의 주인공은 희생양이었다.

 

우리는 함께 슬퍼할 줄 모르는 치명적인 병에 걸렸다. 어떤 과학자는 인간은 이기적인 유전자에 의해 조작 당하는 허수아비 유전체에 불과하다고 인간을 폄하한다.

 

찰스 다윈은 1859년에 저술한 ‘종의 기원’ 서문에서 인간을 “손톱과 발톱이 피로 물든 본성”을 지닌 동물로 정의했다. 19세기는 국가라는 개념이 등장한 이후,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을 기초로 한 자본주의가 개인 우선주의와 자국 우선주의를 낳았다. 국가는 무엇이며, 그 안에 거주하는 국민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한을 잃고 분노에 기댔다

 

국가에 대한 여러 가지 정의가 있겠지만, 나는 국가를 ‘집단적으로 당한 어떤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함께 슬퍼하는 공동체’라고 정의한다. 우리는 수천년 동안 지형적인 특수성 때문에 강대국에 둘려 수많은 외세의 침입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질곡과 회한의 세월을 견뎌왔다. 우리에겐 한(恨)이란 독특한 유전자가 있다. 우리는 이 유전자를 가지고, 경제적으로 행복하고, 정치적으로 성숙한 나라를 이루기 위해, 지난 40년간, 빠른 속도로 산업화, 민주화, 그리고 정보화를 이뤄 이 정도로 살게 되었다.

 

우리에게 다가온 갑작스런 경제적인 풍요는 우리 문화에서 함께 슬퍼하는 ‘한’을 몰아내고, 그 대신 개개인이 즉흥적이고 사사로운 일에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분노(憤怒)를 수용하였다. 이 분노에 쌍둥이 동생이 있다. 바로 망각이다. 망각은 과거를 송두리째 버리고, 그 순간 그저 웃고 떠드는 가벼움을 선사하였다. 우리가 매일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는 TV는 남을 흉내내거나, 남이 먹거나 노는 모습을 보고 웃거나, 현실을 망각하기 위한 판타지를 파는 프로그램로 가득 차 있다. 쉽게 화내고 가볍게 웃고 마는 문화, 스마트폰을 하루 종일 보는 문화가 급속도로 자리 잡았다. 함께 슬퍼하는 것이 어색하다. 국가적으로 아무리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도, 그 비극을 직접적으로 당한 당사자 이외에는, 대부분은 별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망각에 대한 저항, 그것이 비극의 기원

 

국가는 비극적인 사건을 충분히 슬퍼하는 정교한 의례와 문화를 통해 탄생한다. 비극적인 사건에 대한 기억이 공동체의 씨앗이다. 국가는 혈연이나 지연으로 엮어진 이익집단이 아니라, 슬픈 이야기를 공유하는 집단이다.

 

이스라엘 소설가 아모스 오즈는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국가는 피로 연결된 공동체가 아니라, 이야기를 공유하는 정신적인 공동체다.”

슬픈 이야기는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하나로 묶는 거룩한 끈이 된다. 이 끈으로 묶인 사람들은 공동체의 다른 사람이 겪은 비극적인 이야기를 듣고, 마치 자신이 그 비극을 당한 것처럼 함께 눈물을 흘린다.

 

서양문명은 비극적인 이야기를 자세히 기록하는 역사서술과 그 안에서 비극적인 이야기를 함께 상기하는 공동체적 노력으로 탄생하였다. 이 공동체적 노력이 기원전 5세기에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 등장한 ‘비극공연’이다. 아테네 지도자들은 의도적으로 ‘비극공연’이란 문화를 주도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다지고 서양정신과 문명을 탄생시킨다. 이들이 매년 춘분 때 개최한 ‘비극공연’은 문명국가로 태어나기 위한 통과의례였다.

          

최선을 자극하는 공정 경쟁, 그것이 민주주의

 

고대 그리스인들은 가장 감동적인 비극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공정한 경쟁’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였다. 고대 그리스어로 ‘경쟁’을 ‘아곤’(agon)이라 부른다. ‘아곤’은 이 당시 시작된 올림픽 경기, 전차 경주, 합창 경연, 그리고 비극 경쟁에 모두 사용된 핵심단어다. 오늘날 예를 찾자면, 올림픽 경기, 포뮬러 원 자동차 경기, 노벨문학상을 타기 위한 경쟁, 오페라와 발레 경연대회다. 이 문화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정신이 바로 ‘공정 경쟁’이다. 누구나 사회적 지위와는 상관없이 참여하여, 자신의 최선을 무대에 올린다. 공정한 경쟁을 통해 고대 그리스가 정치적으로 발견한 것이 바로 ‘민주주의’다. 20세기 초까지 거의 모든 국가들이 왕정국가였는데, 아테네인들은 이미 기원전 5세기에 새로운 정치제도를 실험하고 있었다. 그 근간이 바로 경쟁이었다. 우리는 자신의 최선을 보이는 비극배우, 작가, 운동선수, 가수를 보고 눈물을 흘린다. 그들은 우리 각자 안에 숨겨진 최선을 자극하여, 우리도 그런 삶을 살 수 있다고 격려하기 때문이다. ‘경쟁’을 통해 인간 안에 잠재된 탁월함과 최선이 발현된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무대에 올린 작품은 희극이자 비극이었다. 아테네 시민 거의 모든 사람들이 원형극장에 모여 함께 비극작품을 숨죽여 보았다. 이들은 대부분 참전용사들이다.

 

‘비극’(悲劇)이란 한자는 비극공연의 목적을 담고 있다. ‘슬픔’을 의미하는 ‘비’悲에는 자신이 당한 어려운 처지에 대한 감정적인 반응이나 신세한탄을 넘어서는 숭고한 의미가 숨어있다. ‘자신이 아닌’(非) 타인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으로 ‘생각하는 어진 마음’(心)이다. ‘비극’이란 연극공연을 통해 타인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으로 만들려는 공동체적 수련이다.

 

불교에서도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 체득한 네 가지 마음이 있다. ‘자비희사’(慈悲喜捨)다. 함께 사랑하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용서하여 평정심을 가지는 마음이다. 네 가지 마음에 두 번째가 바로 ‘비’悲다.

‘비’悲는 원래 산스크리트어 ‘카룬나’(karuna)를 한자로 번역하면서 만들어진 단어다. ‘카룬나’는 상대방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으로 여기는 마음일 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슬픈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미리 그 환경을 조성하려는 노력이 담긴 배려의 마음이다. 마치 어린아이를 돌보는 어머니의 마음이다. 아이가 아플 때, 그 순간 어머니가 느끼는 마음이다.

          

비극의 주인공은 희생양

 

고대 그리스인들은 ‘비극’을 ‘트라고디아’(tragodia)라고 불렀다. 영어 ‘트래지디’(tragedy)가 이 단어에서 유래하였다. ‘트라고디아’의 원래 의미에 대해 여러 가지 설명이 있다. 그 설명들 중 하나가 ‘염소(트라그)를 위한 노래(아오이디아)’다. 비극 경연대회는 아테네 시민들이 모두 참여하는 종교축제였다. 아테네인들은 원형극장에 함께 모여, 자신들이 알게 모르게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기억하고 용서를 빌었다. 그들이 저지른 잘못을 용서받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제물이었다. 염소는 그들의 잘못을 대신 짊어지는 동물이다. 그런 동물을 흔히 ‘희생양’이라고 부른다. ‘희생양’이란 영어단어 ‘스케이프고트’(scapegoat)의 정확한 번역은 ‘희생염소’다.

 

비극공연이라는 희생제사 의례에 참여한 관객들은 비극공연의 주인공을 ‘희생염소’라고 여겼다.

 

관객들은 비극의 주인공이 겪는 비극을 관찰하면서, 두 가지 감정에 휩싸인다. 첫 번째는 주인공의 비극이 자신에게도 똑같이 일어날 수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관객이 비극공연에 몰입하면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으로부터 탈출하는 ‘황홀경’을 경험한다. 관객이 배우와 자신을 ‘하나’라고 묶는다. 그 순간에 비극이 가져다 주는 ‘공포’가 관객에게 고스란히 엄습한다. ‘공포’는 황홀경을 가져다 주는 선물이다.

두 번째는 ‘공포’를 통해 배우의 감정이 나의 감정이 된다. 이런 감정의 완벽한 전이를 ‘연민’이라고 부른다. 관객이 ‘연민’의 단계에 도달하면, 주인공의 희노애락이 바로 관객의 희노애락이 된다. 고대 아테네 시민 모두가 비극공연을 보면서, 집단적으로 공포와 연민을 느낀다. 그들은 ‘공포와 연민’을 통해 공동체 정체성을 획득하여, 자신들이 지닌 불필요한 죄책감을 씻어버린다. 우리는 이 씻어버림을 카타르시스라고 부른다.

          

최초의 비극 아이스킬로스의 ‘페르시아인들’

 

최초의 그리스 비극작품은 기원전 472년에 아테네에서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초연된 ‘페르시아인들’이다.

 

고대 그리스에 위대한 세 명의 위대한 비극작가들이 있다. 시대순으로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다.

그리스 비극은 대부분 그리스 신화나 전설에 등장하는 내용을 각색한 작품이다. 그러나 ‘페르시아인들’만은 예외다.

‘페르시아인들’은 고대 그리스의 최초의 작품이자 아테네와 그리스가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기 시작한 역사적인 사건을 다룬 유일한 작품이다.

 

아이스킬로스는 기원전 480년에 일어난 페르시아 제국과 아테네를 중심으로 결성된 그리스 연합군이 살라미스 해협에서 격돌한 ‘살라미스 해전’을 다뤘다. 작가 아이스킬로스는 기원전 490년, 그 유명한 ‘마라톤 전투’에서 참전 군인이었다.

아테네는 아이스킬로스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후원자를 지목한다. 그 후원자가 바로 아테네 민주주의를 완성시킨 페리클레스다. 후원자를 ‘코레고스’(choregos)라고 부른다. 코레고스는 무대장치, 배우, 합창대, 오케스트라 월급 등 비극이 무대에 올리는데 필요한 모든 비용을 지불한다. 아이스킬로스와 페리클레스의 만남으로 아테네의 기적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그리스인들이 한 명도 등장하지 않으며, 더욱이 자신들의 원수인 페르시아인들만 등장하는 ‘페르시아인들’을 통해 무엇을 전달하려 했을까?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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