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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순례

헤르만 헤세의 장편소설 『동방순례』

 

"유리알 유희"의 모태가 되어준 헤세의 소설. 여행이라는 모티브가 명확하게 드러나면서 그 안에 담겨진 정체성에 대한 탐구를 깃들인다. 동방이라는 규명되지 않은 곳에 대한 이상과 향수를 통해 시공을 초월한 수행의 과정을 기록한 자성적인 자아찾기가 절제된 언어와 작가의 일관된 주제의식 속에서 음영을 조율하며 서서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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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이란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그 정당성을 인정하려는 모든 진지한 시도의 결과이지요. 절망이란 생을 덕과 정의와 이성으로 극복하고, 그 요구들을 실현시키려는 모든 진지한 시도의 결과이기도 하지요. 이러한 절망의 이쪽 편에는 어린아이들이 살고, 저쪽 편에는 각성한 자들이 살고 있지요..--- p.105


아주 천천히 그 상의 수수께끼가 풀리기 시작했다. 아주 느리게 점차적으로 나는 그 상이 무엇을 나타내고자 하는지를 깨달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인간 형상 중 하나가 표현하고 있는 것은 바로 나였다. 그런데 이 형상은 불안할 정도로 나약하고 거지반 비현실적이었으며 어딘지 지워져 희미해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전체적인 인상에는 무언가 확고하지 못하고 허약한 죽어가는 듯한 죽기를 원하는 듯한 그 무엇이 깃들여 있었다. 마치 이라든가 이라든가 혹은 그 비슷한 제목을 가진 조각 작품처럼 보였다. 이와는 반대로 다른 하나의 형상은 나의 형상과 합생하고는 있지만 그 색상과 모양이 생생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이 형상이 누구를 닮았는가. 그러니까 그것이 하인이자 최고 간부인 레오를 닮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시작했을 때, 나는 벽에 양초가 또 하나 꽂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거기에도 불을 붙였다.--- p.11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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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장편소설 『동방순례』(헤세 선집 9)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주)민음사는 1997년부터 헤세 문학 출판에서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독일 주어캄프Suhrkamp 사와 독점 계약하여 헤세 선집을 번역·발간하고 있다. 지금까지 『데미안』, 『싯다르타』, 『황야의 이리』,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수레바퀴 아래서』 등 헤세의 대표작들이 원문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현대적이고 아름다운 우리말로 번역되어 출간되었으며 『동방순례』는 그 아홉번째로 출간되는 작품이다.

작가 헤르만 헤세는 1899년 『낭만적인 노래들Romantische Lieder』로 데뷔한 후 1962년 사망할 때까지 시와 소설, 비평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글들을 발표하여 전세계의 독자들을 열광케 한 바 있다. 독일 내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널리 읽히는 그의 작품들은 금세기 최고의 고전들과 함께 필독서로 손꼽힌 지 오래다. 『동방순례』는 헤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수 있게 한 『유리알 유희』의 모태가 된 작품으로, 그는 『유리알 유희』의 서문에 <동방 순례자들에게 바친다>고 헌사를 쓴 바 있다. 헤세 문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되는 작품인 『동방순례』는 1978년에 최초로 국내에 소개된 이후 이번에 두번째로 번역·출간되는 것이다.

역자인 이인웅 외대 교수는 한국인 최초로 <헤르만 헤세 연구>로 독일의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최고 학점을 받으며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한국 헤세학회 회장을 역임하여, 우리나라 헤세 연구사에서 선두적 역할을 한 바 있다. 독일어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경쾌하면서도 유려한 이인웅 교수의 번역문은 그다지 쉽지 않은 이 책을 즐겁게 읽을 수 있게 한다.

이 작품에서 헤르만 헤세는 합리주의가 팽배하고, 날로 기계 문명의 이기(利器)에 잠식당하는 사회 속에서 스스로 품었던 꿈과 이상에 회의를 느끼고 절망에 빠져든 한 남자가 지난날에 겪었던 비교(秘敎)적인 경험을 영혼의 순례기로 쓰기 시작하면서 과거의 꿈과 이상이 지닌 의미를 되찾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주인공은 바로 헤세 작품의 화두라 할 수 있는 <자유로우면서도 세계와 조화를 이루는 자아>를 찾게 된다.

이 소설의 테마는 인간의 고독이다. 타인과 함께할 수 있는 유대감, 개인을 초월한 공동체를 향한 인간의 욕구이다. 아무것도 써내지 못하는 예술가의 고독으로부터 해방되고픈 욕구이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위해 헌신하기를 꿈꾸는 마음이다.

이 책을 읽은 뒤 우리는 시간을 초월한 종교와 철학과 예술의 세계로부터 현실의 일상으로 귀환한다. 인내와 유머, 인식을 향한 새로운 의지를 품고서. 또한 자신의 궁핍함과 혼란,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으로 무장한 채로.
―헤르만 헤세

헤세의 전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 의식이라 할 수 있는, 한 인간이 존재 내부의 근원적인 불안, 고뇌, 방황을 넘어서 성숙된 자아로 나아가는 과정이 『황야의 이리』와 『유리알 유희』에서 그 어느 작품보다 특유의 아름답고 설득력 있는 필치로 그려지고 있는데, 그 같은 자아 찾기의 노정이 바로 『동방순례』에서 묘사된 순례자들의 여정이다.


주인공 HH―헤르만 헤세Hermann Hesse―가 행한 여행의 목적지인 <동방>은 <영혼의 고향이자 청춘, 어디에나 있으면서도 아무 데도 없는, 모든 시간이 하나가 되는 곳>이다. HH의 동방순례는 현실적인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어느 시대 어느 곳으로든 마음 내키는 대로 갈 수 있고, 나의 현재와 과거 속 인물들뿐만 아니라 이미 오래전에 죽은 예술가나 철학자, 사상가들(예컨대 조로아스터, 노자, 플라톤, 보들레르 등)과 함께 그들의 작품 속의 인물들까지도 만날 수 있는 사유의 여행이다. 그런데 견디기 어려운 일상이 반복되는 현실 속에서 이 같은 동방순례의 기억을 되새김으로써 HH는, 그리고 헤르만 헤세 자신은, 고통스런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꿈과 현실 사이의 조화를 찾는다는 점에서 전일성(全一性)이라는 후기 헤세 문학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렇다면 이 책이 일반 독자인 우리에게 호소하는 바는 무엇일까? HH가 젊은 날에 행한 동방순례 여행은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 유대감>, <공동체를 향한 인간의 욕구>, <헌신하기를 꿈꾸는 마음>으로, 지금처럼 이기적이지 않았던 과거 언젠가 순수한 마음으로 타인을 위해, 사회를 위해 살고자 했던 시절의 한없이 꿈에 들떠 현실의 그 어떤 난관도 헤쳐나갈 수 있었던 마음의 자세를 소설 속의 주인공인 HH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상기시킨다. 그 누군가, 그 무엇을 위해 헌신하며 살고자 했던 젊은 날의 기억을 되살아나게 함으로써 우리는 이 책을 읽은 후 헤세가 말하듯 <자신의 궁핍함과 혼란,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으로 무장한 채로> 현실로 돌아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동방순례는 현실과 환상 사이를 오가며, 진정 순수한 나를 찾는 여행에 독자들을 동참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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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에서 화자인 나 HH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결맹 동지들과 함께 떠났던 동방으로의 순례 여행을 회고하면서 그에 대해 써서 남기고자 한다. 여행기를 써나가면서 그는 과거에 행한 여행에서 겪었던 신비한 경험들, 즉 시공을 초월한 불후의 인물들과의 만남에서 오는 경이로움, 어떤 공동체 속에 강하게 결합되어 있음으로 해서 생기는 유대감, 이제는 사라진 유년기의 꿈, 젊은 이상 등등을 되돌아본다.

2장에서는 그 같은 환상적인 여행에 종말을 고하게 된 원인인 <레오>라는 인물의 실종에 대해 언급된다. 누구보다 강한 의지를 가지고 여행중이던 HH는 그가 사라지자 모든 일에 흥미를 잃고 결국 동방순례를 그만두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결맹에서 떨어져 나온 후, 그에게 결맹이, 당시의 순례 여행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깨닫는다. 무서운 고독과 괴로움으로 몸부림치던 HH는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순례기를 열정적으로 쓰려 하나 도대체 당시의 경험을 제대로 글로 옮길 수가 없어 결국엔 펜을 놓는다.

3장에서는 그 대책으로, 괴로웠던 전쟁 때의 경험을 글로 옮김으로써 영혼의 짐을 떨쳐버린 친구 루카스를 만나러 가고 그와의 만남을 통해 결명에서 사라진 레오를 찾을 실마리를 발견한다.

4장에서 HH는 레오의 집을 찾아가 그를 만나지만 그는 전혀 HH를 알아보지 못한다. HH는 이미 순례 여행 때의 순수했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었다. 헛되이 집에 돌아온 HH는 미친 듯이 레오에게 후회와 간청 어린 편지를 열 편 스무 편 반복해서 써서 부친다. 마지막 장에서는 레오가 HH를 찾아와 결맹으로 그를 데리고 간다. 이젠 완전히 와해된 줄 알고 있던 결맹이 여전히 굳건하다는 사실에 놀라며 HH는 자신이 결맹에서 낙오되고 결맹의 존재를 믿지 못한 잘못을 지적당하고 뉘우침 속에 완전한 자아를 찾는 과정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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