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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 '파티'에 재 뿌린 촘스키, 과연 그답다
[이 시대에 읽어야 할 명저 16 - 최종] 끝없는 도전, 아브람 놈 촘스키
11.06.06 10:56 ㅣ최종 업데이트 11.06.06 10:57 박찬운 (chanpark62)

나는 지난번 <이 시대에 읽어야 할 명저 강의>(이하 <명저강의>)를 통해 버트런드 러셀을 이야기했다. 그의 세 가지 열정은 우리 젊은이들에게 강한 영감을 선사한다. 오늘 나는 이 <명저강의>를 마무리하면서 또 다른 러셀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아브람 놈 촘스키(Avram Noam Chomsky)다. 20세기 전반이 러셀의 세기였다면 후반은 촘스키의 세기로 역사는 기록할 것이라 믿는다. 그의 끝없는 도전을 통해 우리는 지식인이 어떠한 사회적 책무를 가져야 하는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강의에서는 러셀 강의에서처럼 한 권의 책을 소개하기보다 다음과 같은 책들을 추천하고자 한다.

 

추천도서: <촘스키, 끝없는 도전>(로버트 바시키 지음, 장영준), <촘스키, 사상의 향연>(놈 촘스키 지음, C.P 오테로 엮음, 이종인 옮김), <지식인의 책무>(놈 촘스키 지음, 강주헌 옮김) 

 

지난 반 년간 이 <명저강의>를 애독해 준 독자 여러분과 소통의 장을 마련해 준 <오마이뉴스>에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 기자 말

 

촘스키, 축하 파티에 재를 뿌리다

 

  
지난 5월 1일 자정 오바마 미 대통령이 '오사마 빈 라덴'이 사살됐음을 공식 발표한 가운데, 이 소식을 접한 미국 시민들이 백악관 앞에 모여 환호하고 있다.
ⓒ 연합뉴스
오사마 빈라덴

9·11 사건을 일으킨 수괴로 일컬어지고 있던 오사마 빈 라덴이 지난 5월 1일(미국 동부 시간) 미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9·11이 일어난 지 10년 만이다. 미국은 온통 축제 분위기다. 이 소식을 접한 다수의 미국 시민들은 뉴욕 맨해튼 거리로 나와 환호성을 질렀다. "우리는 그를 잡았다!"(We got him!)

 

미국 정계도 축제 분위기다. 미 상원은 5월 3일 성공적인 작전을 펼친 미군 및 정보기관에 찬사를 보내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날 결의안은 모처럼 민주, 공화 양당이 정파적 입장을 접은 가운데 표결 참석 의원 전원(97명)의 만장일치 찬성으로 통과됐다. 결의안은 "빈 라덴을 사살한 임무를 수행한 군 및 정보기관 관계자들에게 존경을 보낸다"고 성공적인 임무 수행을 축하했다. 오랜만에 미국이 살판났다.

 

그런데 5월 7일 미국의 대안 언론인 <커먼 드림즈>에 글 하나가 실렸다. 글머리에 굵은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만약 이라크 특공대가 조지 부시의 집에 침투해 부시를 암살하고 그 시신을 대서양에 버렸다면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우리는 자문해야 할지도 모른다."

 

한 마디로 축하 파티에 재를 뿌리는 글이다. 누가 이런 글을 썼다는 말인가.

 

그 글의 주인공이 바로 놈 촘스키(Noam Chomsky)다. 그는 오사마 빈 라덴 사살 후 축제 분위기에 있는 미국 사회를 대해 일격을 가했다. 그는 이 짧은 글을 통해 미국 정부의 오사마 빈 라덴 사살은 계획된 살해이며, 이것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과연 촘스키다. 미국의 지성이자 양심으로 통하는 그가 결국 할 말을 한 것이다. 이런 말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안다. 보라, 우리의 주류언론을. 나는 위 사태가 발생하고 몇 주가 지난 현시점에서 주류언론이 미국의 행위가 명백히 국제법을 위반하였다고 지적한 기사를 보지 못했다.

 

미국의 오사마 빈 라덴의 살해는 두 가지 면에서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었다. 첫째는 미국이 파키스탄의 동의 없이 그 영내에서 군사작전을 폈다는 것이다. 이는 국제법상 용납할 수 없는 영토주권의 침해이다. 둘째는 비무장의 상태에 있는 오사마 빈 라덴을 생포할 수 있었음에도 의도적으로 사살하였다는 점이다. 그가 아무리 9·11테러의 주범의 용의자라 하더라도 이 같은 행위는 누구나 재판받지 않고서는 처벌되지 않는다는 국제인권법의 원칙을 어긴 것이다.

 

국내에서도 미국의 행위가 국제법에 위반된 용납될 수 없는 행위라고 보는 시각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이러한 주장들이 주류언론에 의해 제대로 소개조차 안 되는 것은 어떤 연유인가. 우리의 주류언론은 왜 이런 진실을 말하지 않을까. 주류언론에 종사하는 언론인들은 대개가 일류대학을 나온 사람들이요, 외국물을 먹은 이들이다. 한 마디로 잘 나가는 이 땅의 선민들이다. 그럼에도 왜 이들은 진실을 말하지 않을까.

 

지식인의 책무를 생각한다

 

나는 촘스키를 보면서 지식인의 책무를 생각한다. 도대체 지식인이라는 게 무엇이고 이 시대에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가. 지식인은 그게 운인지 자신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인지는 모르지만 한 사회에서 특별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하는 사람들이 분명하다. 어쨌거나 그들은 좋은 교육을 받았고 사회로부터 특별한 혜택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닌가.

 

  
책 <지식인의 책무>(놈 촘스키 저/강주헌 역) 겉그림.
ⓒ 황소걸음
지식인의 책무

촘스키는 지식인의 책무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지식인의 책무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라고.(<지식인의 책무>, 15쪽)

 

그는 이어서 이렇게 부연한다.

 

"도덕적 행위자로서 지식인이 갖는 책무는 '인간사에 중대한 의미를 갖는 문제'에 대한 진실을 '그 문제에 대해 뭔가를 해낼 수 있는 대중'에게 알리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지식인의 책무>, 16쪽)

 

촘스키는 '행동하는 지식인'이라는 신념 하에 지난 반세기 동안 한결같이 쓴소리를 하면서 살아왔다. 그렇다 보니 그에겐 온갖 괴상한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좌파 중의 좌파요, 빨갱이 중의 빨갱이다.

 

그럼에도 그는 신념을 꺾지 않고 살아왔다. 우리가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미국과 같은 자유의 나라에서 이런 오명을 쓰고 산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독재국가에서 탄압받고 사는 지식인보다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조그만 돛단배를 생각해 보라. 바로 그가 촘스키다.

 

촘스키는 누구인가

  
▲ 촘스키 무엇을 위해 그토록 도전하는가
ⓒ Duncan Rawlinson
촘스키

아브람 놈 촘스키(Avram Noam Chomsky)는 1928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아버지 윌리엄 예브 촘스키와 어머니 엘시 시모노프스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대인 가정의 일반적인 교육과도 달리 특별한 부모에 의해, 특별한 교육을 받았다.

 

촘스키는 펜실베이니아 대학 시절 언어학 교수인 젤리그 해리스의 영향으로 언어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1955년 같은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생성문법 이론과 보편문법 이론으로 1960년대 이후 학계로부터 폭넓은 명성을 얻게 되었다. 특히 그는 생성문법이론을 인지과학분야로 확대하여 연구하였고, 20세기 후반 이 분야를 연구하는 학자들이라면 누구라도 그의 특별한 지적 빚을 입지 않은 사람은 없을 정도이다.

 

그는 29세라는 이른 나이에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의 부교수에 임명되었고, 그 이후 유성처럼 빠르게 교수로 승진한다. 32세에 정교수가 되었으며 37세에는 석좌교수직에 올랐고, 47세에는 가장 탁월한 교수에게 주어지는 영예인 인스티튜트 프로페서에 임명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는 어릴 때부터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가졌기에 언어학자라는 틀 속에 자신을 가두지 않고 살아왔다. 1960년대부터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수많은 저술과 비평을 통해 세계 도처에서 자행되는 강대국의 폭력과 인권유린을 고발함으로써 '세계의 양심'이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 이로 인해 그는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고 우상화되기도 했다. 또 논쟁과 체포와 중상모략이 그에게 끊임없이 가해졌고, 그의 글은 검열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그의 전기를 쓴 로버트 바스키는 그에 대해 이 시대에 사람들이 위인을 이야기할 때 갈릴레오, 데카르트, 뉴턴, 모차르트 또는 피카소를 이야기한다면, 미래에는 촘스키를 이야기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인문사회 과학 분야뿐만 아니라 과학 분야에 이르기까지 가장 학문적으로 인용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1980년부터 92년까지 인문 예술 인용지수에서 4천 회를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비롯하여 가장 자주 인용되는 인물 리스트에도 여덟 번째 순위에 올라있다. 과학 인용지수(SCI)에 따르면 1974년부터 92년까지 1619회 인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한 마디로 촘스키는 이 시대의 언어학자, 인지과학자, 기초과학자, 철학자, 정치사상가, 사회 운동가 등등 실로 다양한 영역에서 언제나 논쟁의 중심이 된 인물이다. 그가 왕성한 활동을 한 20세기 후반은 촘스키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촘스키는 어떻게 그런 사람이 되었는가

 

촘스키를 생각하면 나는 늘 의문이 든다. 어떻게 그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이런 의문을 품고 그의 전기를 유심히 읽어 보았다. 유년 시절부터 보여준 영특함에서인가, 아니다. 천재라고 해서 모두가 세상을 보는 예민함과 통찰력이 있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에겐 무엇인가 남다름이 있고, 그것은 남다른 그의 과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게 무엇일까.

 

첫 번째는 부모로부터의 영향이다. 그는 뛰어난 부모를 두었고, 그것은 그의 영특함을 지식인의 특별한 책무로 바꾸어 놓는데 기초를 쌓아 주었다. 촘스키의 아버지 윌리엄 촘스키는 20세기 초 러시아를 떠나 미국으로 망명한 사람으로 고학으로 대학을 마치고 히브리어 학자가 된 사람이다. 그는 중세 히브리어에 관한 연구를 하여 탁월한 히브리어 문법학자가 되었고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범학교인 그라츠 칼리지에서 45년간 교수로 생활하다 은퇴하였다. 촘스키가 일찌감치 언어학자로 성공하게 된 계기는 아버지 윌리엄 촘스키의 영향이 크다.

 

어머니 엘시는 촘스키가 사상가, 교육자, 운동가로 성장하는 데 아버지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녀는 예민한 정치적 감각으로 촘스키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눈앞에 보이는 사회적 상황을 뛰어넘어 정치적 활동과 참여의 영역을 꿰뚫어볼 수 있도록 격려해 주었다.

 

아버지 윌리엄 촘스키는 타계하기 전에 자신이 살아온 인생 목표를 말한 적이 있다. 그가 말한 인생의 목표를 들어보자.

 

"성실하고 자유롭게 그리고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인간, 세상을 개선하고 승화시키는 데 관심 있는 인간, 인간의 삶을 좀 더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만드는 일에 참여하는 인간, 이런 인간을 가르치는 것이 나의 인생의 최대 목표였다". (<촘스키, 끝없는 도전>, 27쪽)

 

  
책 <촘스키, 사상의 향연 : 언어와 교육 그리고 미디어와 민주주의를 말하다>(놈 촘스키 저/이종인 역) 겉그림.
ⓒ 시대의창
촘스키, 시상의 향연

촘스키의 친구이자 그의 선집을 엮은 오테로는 이 부분에서 이렇게 말한다.

 

"윌리엄 촘스키는 적어도 한 가지 점에서는 그 목표를 달성하는 데 성공했다. 바로 자신의 아들 놈 촘스키를 그렇게 교육했다." (<촘스키, 사상의 향연>, 29쪽)

 

내가 보기엔 윌리엄 촘스키는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촘스키에 대한 교육이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아버지 촘스키가 원했던 그런 인간이 아들 촘스키에게서 그대로 나타났으니 말이다.

 

두 번째는 촘스키의 어린 시절의 교육이다. 촘스키의 오늘을 만든 것은 그의 유년 시절의 독특한 교육이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윌리엄 촘스키는 아들을 필라델피아에 있는 템플 대학이 운영하는 오크 레인 컨트리 데이 스쿨로 보낸다. 이곳은 당시 듀이의 교육철학을 철저히 따르는 학교로 유명하였다. 교육이란 자아실현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지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촘스키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적어도 아이들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경쟁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곧 자신과의 경쟁이라는 것이죠.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긴장을 하거나 상대적으로 평가받는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습니다. …" (<촘스키, 끝없는 도전>, 35쪽)

 

오크레인 시절 촘스키는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데 그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학교신문에 글을 쓰는 것이었다. 열 번째 생일이 지난 직후 그가 쓴 글이 스페인 내전으로 바르셀로나가 함락당한 사건에 대한 논설이었다. 당시 그 사건은 그의 삶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그는 회상한다. 열 살에 스페인 내전에 관한 논설을 쓰다니! 우리로선 깜짝 놀랄 일이다.

 

하지만 촘스키는 고교시절 유년 시절과 다른 교육환경에 빠지는데 그것은 지우고 싶은 과거가 되었다. 그가 다닌 필라델피아의 센트럴 하이스쿨인데 이곳은 높은 학업 성취도를 자랑으로 여기는 명문 고교였다. 하지만 촘스키는 여기에서 다른 학생들보다 우수한 성적을 거두지만 회의에 빠지기 시작한다. 경쟁교육에 의문을 던진 것이다.

 

하나의 에피소드가 학교 축구팀 응원과 관련된 문제였다.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왜 나는 우리 학교의 축구팀을 응원하고 있는가? 사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고, 그들도 나를 모른다. 나는 그들에 대해 관심도 없고, 이 학교를 싫어한다. 그런데 왜 내가 학교의 축구팀을 응원하고 있는가? 하지만 우리는 그런 식으로 행동합니다. 그렇게 하도록 훈련받았으니까요. 우리 몸속에 그렇게 배어 있는 겁니다. 이것이 곧 맹목적인 애국심과 복종으로 발전하게 되지요." (<촘스키, 끝없는 도전>, 45쪽)

 

이런 그이기에 촘스키는 평생 편을 갈라 응원하는 것에는 흥미를 갖지 못했다. 이처럼 촘스키가 생각하는 교육의 최대문제는 학생들의 동기결여가 아니라 교육체계의 모든 단계에서 그들의 동기를 짓누르는 억압적인 교육구조였다. 그에게 있어 좀 더 좋은 교육이란 사람을 자유스럽게 놓아두는 것이다. 동기를 부여하여 교육을 받는 사람이 무엇인가를 선택해 가는 것이 교육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자유롭게 생각하는 독립적인 인간이 탄생하는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과 촘스키

 

촘스키를 이해하는 데 있어 버트런드 러셀을 아는 것은 필수적이다. MIT 연구실의 촘스키 연구실에는 러셀의 대형 포스터가 있다. 그리고 러셀의 평생의 좌우명이었던 그의 세 가지 열정('이 남자를 사랑한다, 이 사람처럼 죽고 싶어' 참고)이 쓰여 있다. 그러니 러셀의 좌우명이 촘스키의 좌우명이기도 한 것이다.

 

  
책 <촘스키, 끝없는 도전>(로버트 바스키 저/장영준 역) 겉그림.
ⓒ 그린비
촘스키, 끝없는 도전

바스키는 러셀의 이런 영향을 이렇게 그의 전기에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러셀은 촘스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첫째, 그는 철학과 논리학에서 촘스키의 사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둘째, 촘스키와 마찬가지로 민중해방의 대의명분에 깊은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셋째, 그는 학자로서 대학세계에 깊이 관여했던 동시에 억압받는 하층민을 위해 일선에서 행동했으며, 넷째, 자신의 명성이나 자유가 위태로워지는 경우에도 자신의 신념을 견지했다." (<촘스키, 끝없는 도전>, 59~60쪽)

 

아마도 촘스키는 어린 시절부터 러셀을 자신의 롤 모델로 설정했음이 분명하다. 그랬기에 그는 평생 러셀처럼 살고자 했다. 젊은 시절 순수한 학자(러셀은 수학자, 촘스키는 언어학자)에서 인생을 시작하였으나 결국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사회 운동가가 되었으니 말이다.

 

촘스키가 러셀을 얼마나 존경하고 닮고자 하는지는 그가 러셀과 동시대의 인물인 아인슈타인을 비교한 다음 말에서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대략 같은 세대에 속하는 두 거인인 러셀과 아인슈타인을 비교해 봅시다. 그들은 인류가 중대한 위험에 직면했다는 것에는 의견을 같이했지만, 대응 방식은 서로 달랐습니다. 아인슈타인의 경우, 프린스턴 대학에서 비교적 안락한 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사랑하는 연구에 몰두하고, 간혹 엄숙하게 한 마디씩 던지는 것이 전부였지요. 반면에 러셀은 데모를 주동하고, 경찰에게 끌려가기도 했으며, 당대의 문제에 관해서 평범하게 글을 쓰거나, 전범들에 대한 재판을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결과는 어떻습니까? 러셀에게는 그때나 지금이나 욕설과 비난이 쏟아지는데 반해, 아인슈타인은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놀라운 일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촘스키, 끝없는 도전>, 60~61쪽)

 

  
▲ 러셀과 아인슈타인 20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지성이다. 하지만 그 위대성에도 차이는 있다.
러셀과 아인슈타인

촘스키는 결코 아인슈타인이 될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러셀의 뒤를 밟을 뿐이다. 비록 그에게도 러셀과 같이 욕설과 비난이 쏟아지더라도 그것을 회피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촘스키와 리영희

 

촘스키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에겐 어떤 인물이 있는가 생각해 본다. 정확히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작년에 타계한 리영희 선생이다. 선생이야말로 한국의 촘스키다. 그가 가진 지식인의 책무에 대한 인식은 촘스키가 가진 지식인의 책무와 너무나 흡사하다.

 

  
리영희 선생님이 임헌영 씨와 대담 형식으로 출판한 책 <대화>.
ⓒ 한길사
리영희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책 <대화>에 나오는 이 부분을 읽어 보자.

 

"나의 삶을 이끌어준 근본이념은 자유와 책임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더욱이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는 믿음이었다.

 

이 이념에 따라, 나는 언제나 내 앞에 던져진 현실 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또는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기권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식인'의 배신으로 경멸하고 경계했다" (<대화>, 서문).

 

리영희 선생은 지식인 개인의 자유를 생명보다 귀하게 여겼고, 이런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를 엄중한 도덕적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우리에게도 이런 사상의 은사가 있었음에 다시 한 번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박찬운은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의 인권법 교수이자 변호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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