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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자유주의자 혁명을 꿈꾸다.

 

Gretech Corporation | GomPlayer 2, 1, 27, 5031 (KOR) | 2010:09:09 02:08:50


1618년 8월 24일 허균이 능지처참를 당했다.
그의 죄는 천지의 더러운 것이었다.

 

“역적의 우두머리 허균은 행실이 개, 돼지와 같다. 윤리를 어지럽히고 음란을 자행하여 인간으로서 도리가 전혀 없다.”고 광해군 일기는 전하고 있다. (광해군 일기 10년 9월)

조선은 죄인인 허균이 윤리를 어지럽히고 음란하게 굴어 인간의 도리를 지키지 못한다고 하였다. 사형집행은 일사천리로 이뤄진다. 적법한 재판과정도 없었다. 허균은 변론 한마디 못하고 사지를 찢기어 죽음을 당하고 만다.

조선의 자유주의자 혁명을 꿈꾸다. 허균

허균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홍길동의 저자이다.
허균은 문학가로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그 개인에 대한 역사의 평은 혹독하기만 하다.

“그는 천지간의 괴물이다.
그 몸뚱이를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고
그 고기를 씹어 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 일생을 보면 악이란 악은 모두 갖추어져 있다.“고 광해군 일기는 말하고 있다.
(광해군 일기 10년 9월 6일)

허균은 조선을 위협하는 대역 죄인으로서 서둘러 형이 집행되었고, 그와 관련한 사건은 3개월간 지속되었을 정도로 그 당시 큰 사건이었다. 경기도용인에 허균의 가족묘가 있다. 거기에 허균의 묘도 있다. 하지만 시신이 없는 가묘이다. 허균은 능치처참을 당하였기 때문에 그 시신조차 수습할 수 없을 정도였다.

허균에 대한 증오는 그에게만 극한 되지 않았다. 역적의 자손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던 후손들은 300년 넘게 이름을 숨기며 숨어 살아야만 했다. 조선은 역적을 구족까지 멸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인명을 소중히 하여 삼복계( 사형은 초삼, 재심, 삼심으로 반복하여 심리를 한 뒤 결정해야 한다는 조선시대의 형사 절차상의 제도)를 시행했다. 지금의 삼신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 당시 사형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죄인의 자백을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허균에게는 이과정이 생략되었다. 얼마나 사건을 서둘러 집행했는지 짐작해볼 수 있는 부분이다.

허균의 죄목은 광해군을 시해하려했다는 역모였다.
사건의 발달은 1618년 8월 10일 새벽 남대문에 흉방이 붙은 사건이다.
흉방은  불쌍한 백성을 위해 광해군을 없애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사건의 배후자로 허균이 지목되었다. 허균을 사형시키라는 대신들의 욕구가 거칠었다.
허균은 역적의 우두머리로, 금수이자, 괴물이며 그의 오망한 짓은 임금을 위태롭게 한다고 하였다.허균은 재판과정도 없이 서쪽 저자거리에서 능치처참을 당한다.

허균이 능지처참을 당하고 5년 뒤 인조반정이 일어난다.
광해군을 유배 보낸 인조는 역모죄로 처형되었던 사람들을 복권시켰다.
그러나 한사람 외예인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허균이었다.
허균은 조선이 끝날 때 까지 복권되지 않은 조선이 증오하는 인물이었다.

허균 과연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놀랍게도 그는 당대 최고의 천재였으며, 국제 감각을 갖춘 엘리트였다.
중국국가도서관에는 명나라 때의 특별한 책이 보관되어있다.
그 책이 바로 명나라 오명제가 쓴 조선시선이다.
조선시선에는 신라시대부터 16세기까지의 우리나라 한시 332편이 실려 있다.
신라시대 문인인 최치원과 백결로부터 고려시대 이규보, 정몽주 등을 비롯해 조선시대 정도전, 서거정, 김종식, 허매씨(허난설현) 등 108명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인들의 시가 실려 있다.

대부분 문화가 중국에서 한반도로 전해지는 과정을 거치는데 우리의 문학작품이 중국의 전해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런 측면에서 조선시선은 한국의 문학작품이 중국으로 전해진 효시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하다.
조선시선이 전해지게 된 경위는 무엇일까? 이를  파악할 수 있는 일곱 글자가 책 끝부분에 적혀있다.'조선장원 허균서'라고 적혀있다. 이는 허균이 조선의 시를 중국에 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나고 있을 무렵, 조정은 문장이 뛰어난 허균에게 명나라 사신들을 맞도록 지시하였다. 이때 명나라 오명제가 원군과 함께 조선에 머물고 있었다. 허균은 자신의 집에 오명제를 초대했다. 오명제는 전쟁 통에도 조선의 시를 모으고 있었다. 허균은 자신의 머리 속에 있던 수백편의 조선의 시를 외워 오명제에게 소개한다. 오명제는 허균의 암송을 바탕으로 명나라에 돌아가 조선시선을 간행한 것이다.
조선시선에는 특히 눈길을 끄는 부분이 있다.

허균이 쓴 시에 놀랍게도 한글로 음이 달린 것이다.
조선 시인으로서 우리 문학에 대한 자긍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는 최초로 훈민정음이 중국에 소개되었던 것이다.

강릉시 초당마을, 허균의 아버지 허엽의 호를 따 마을 이름이 붙여졌다.
허균의 집안은 고려시대부터 이름난 문벌이었다. 허균의 아버지 허엽은 동인의 영수로 추대될 만큼 당대 가장 치성한 가문으로 손꼽혔다. 문장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아버지 허엽과 형 허성과 허봉 그리고 여동생 허난설헌은 허균과 더불어 5문장가로 불릴 정도로 당대 최고의 문장가 가문이었다.
허균은 20대 초반에 세상에 표절시가 돌아다닐 만큼 탁월한 문장가였다.
그의 문장은 그를 혐오하는 조선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문장실력이었다.
화답시를 즐겼던 중국의 사신들을 맞아서는 유교와 불교, 도교에 까지 두루 걸쳐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옛 책을 막히지 않고 줄줄이 외우는 허균의 지력을 다른 이들은 당할 수 가 없었을 정도였다.

어우야담에는 "이자는 사람이 아니다. 반드시 여우나 삵괭이 쥐 같은 짐승의 정령일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허균의 천재적인 지력을 놀라워했다.

허균의 그런 말재주와 문장력은 임진왜란을 겪고 있는 조선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었다.
명나라는 조선에 원군을 파견했고 조선은 사신들을 잘 접대해야하는 시대적 상황이 있었다.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면 조선의 운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다. 이후 허균은 사신의 일행으로 중국을 여섯 차례나 다녀온다. 뛰어난 문장을 바탕으로 한 외교 수완 더분이었다.

이를 수창외교(시를 주고받으며 서로 뜻을 통하는 조선시대의 외교방식 학식이 뛰어나고 시를 잘 짓는 문사들이 담당)라고 한다. 선조는 문장이 뛰어나고 국제 정세에 밝은 허균을 아꼈다. 사신을 잘 접대한 허균에게는 높은 벼슬이 내려졌다. 이렇게 허균의 천재성은 임진왜란이라는 조선의 위기 속에서 빛을 발했다.
그러나 허균은 오십 평생 무려 6번이나 벼슬에서 쫒겨 나는 아픔을 겪었다.
파직과 복직을 경험한 인물이 없다.

왜 기피 대상이 되어야 했을까?
그 이유가 흥미롭다.
서른 한 살이 되던 1599년, 지방 관리의 부정을 관찰하는 황해도부사로 부임했다.
그런데 이때 허균은 서울에서 황해도까지 평생알고 지내던 기생들을 데려갔다.
허균은 이로 인해 첫 탄핵파직을 받는다. 이일로 부임 6개월 만에 해임된 허균, 그의 품행은 일생동안 수많은 비난을 불러왔다. 세상은 그를 경망한 인물이라고 멸시했다.

성리학 지배질서의 유교사회에서는 그의 자유분방함을 용납하지 못했다.
선조실록 37년 9월 6일자에 보면, ‘상중에도 기생을 끼고 놀아서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라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허균은 세간의 비난에 전혀 게으치 않았다.

“남녀 간의 정욕은 하늘이 주신 것이요. 인륜과 기강을 분별하는 것은 성인의 가름침이다. 나는 성인의 가르침을 어길지언정 하늘이 내려준 본성을 어길 수는 없다”라고 허균은 말했다.

허균은 오히려 언제 어디서 어떤 기생을 만났으며, 잠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까지 세세하게 기록했다. 체통과 체면을 중시했던 양반 지배사회에서 허균의 솔직함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성리학이 아니면 이단으로 취급 받던 시기 허균은 승려들과도 허물없이 어울렸다.  특히 사명당과는 형제와 같이 지냈다. 사명당은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우고 당상관의 위계를 받은 인물이다. 허균은 18살에 사명당을 만나 그가 열반할 때 까지 깊게 교류했다. 사명당의 비문은 허균이 사명당의 제자들로부터 부탁을 받아 쓴 것이다.

유교사회 조선에서 유학자가 불교에 심취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위험한 일이었다. 결국 불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수안 군수에서 파직되었고, 삼척부사에서도 임명 13일 만에 쫓겨났다. 하지만 허균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세상을 살고자 했다. 관직생활 20여 년 동안 3번의 유배와 6번의 파직을 당한다. 허균은 스스로를 不如世合한다고 여겼다. 세상과 화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세상과 화합하지 못하는 허균의 행보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북경의 남당 서양의 선교사 마테오리치가 세운 성당이다. 1614년과 1615년 허균은 사신으로 두 차례 북경에 머물렸고 이곳에서 천주교를 접하게 된다. 조선으로 돌아가는 길에 허균은 서양지도와 천주교 찬송가인 12궤장을 가져간다. 그는 조선의 성리학체재에 안주하지 않았다. 북경은 조선이 세계를 만나는 유일한 창구였다. 사신으로 명나라를 드나들던 허균은 이곳에서 조선에서는 구할 수 없는 책들을 사 모은다. 두 차례의 사행 길에서 무려 은 1만냥이 넘는 돈을 주고 4천여 권의 책을 사온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사신들에게 출장비를 별도로 주지 않았다. 인삼을 가져가서 팔 권리를 주었다. 그래서 사신들은 인삼을 판 돈으로 대부분 골동품과 같은 사치품을 사왔는데 허균은 그 돈으로 무려 4천여 권의 책을 사온 것이다. 그렇게 구해온 책 중엔 명나라 양명학자 이탁오의 책도 있다.

이탁오는 허균과 공통점이 많은 인물이다. 불교를 믿었고 마테오리치를 만나 천주교를 믿었다. 그 역시 유교의 이단아 취급을 받았다. 이탁오는 중국의 유가적인 역사관을 비판하며 당시의 지배질서에 반기를 들었다. 주자학의 절대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라며 주체적인 자각을 강조했다.

성리학과 비교해서 이탁오의 학문은 주체성과 자유와 해방을 추구하고 전통에 대한 부정이 강한 학문이었다. 그의 새로운 사상은 매우 급진적이었고 당시 많은 시민계층의 의식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은 이탁오을 괴물이라고 비난했고 박해를 받던 그는 결국 자결했다. 이탁오의 책은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선 이후에도 여전히 금서로 남았다. 허균은 그런 이탁오의 책까지 서슴치 않고 구해 읽었다. 조선의 유교사회에서 이탁오의 책을 보았다는 자체만으로도 위태로운 일이었다. 허균은 스스로 조선의 이단아가 되어갔다.


전북 부안군 우반동 부임 9개월 만에 공주목사에서 파직되고 나주목사의 임명마저도 취소된 허균은 부안으로 내려갔다. 마침 부안 현감이 허균을 위해 글을 쓸만 한 거처를 제공했다. 당시 그가 머물렀던 정사암, 바로 홍길동전은 이곳에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서자인 홍길동이 부패한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 실제로 허균은 서자들의 후견인이었다. 삼척 부사에서 13일 만에 파직당한지 7개월 뒤 허균은 공주목사로 부임했다. 부임하자마자 그가 한일은 서얼 친구들을 관아로 불러 모으는 것이었다. 허균은 그들이 식솔들까지 모두 돌볼 정도로 서얼 친구들을 극진히 대했다. 하지만 세상은 허균이 공주관아에 삼영을 설치했다고 그를 헐뜯었다. 삼영이란 그가 절친하게 지냈던 서얼 이재영과 윤재영, 심우영의 이름을 따 비아냥거리는 말이다. 명문가의 자손이었던 허균은 어떻게 서얼들과 절친해졌을까?

그것은 손곡 이달을 스승으로 섬기며 비롯되었다. 이달은 조선의 이태백으로 비유될 만큼 뛰어난 시인이었다. 하지만 이달은 서자라는 신분 때문에 관직을 포기하고 한평생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허균은 스승의 모습을 통해 조선의 모순을 일찍부터 실감했다.

허균이 전남지방으로 유배 가서 쓴 성소부부고(장독대를 덮을만한 하찮은 글이라는 뜻)에는 시, 수필, 편지 등이 실려있다. 특히 이 책의 마지막에 있는 논설엔 허균의 개혁사상이 잘 드러나있다. 인재를 버린다는 유재론에서는 신분제에 대한 비판과 조선사회의 개혁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나라를 다스리려면 인재가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나라가 작아서 인재가 드물다. 그런대도 대대로 벼슬하던 집안이 아니면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높은 벼슬에 오를 수 없다. 한사람의 재주와 능력은 하늘이 준 것이므로 귀한 집 자식이라 해서 재능을 많이 주는 것도 아니며 천한집 자식이라고 해서 인색하게 주는 것도 아니다.”라고 적었다. 허균의 유재론은 신분평등을 주장하는 선구자적 역할을 이었다고 평가된다.

허균은 새로운 세상을 갈망했다. 그 목마름에서 나온 것이 바로 서얼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홍길동전이다. 홍길동은 전남 장성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실존 인물이다. 실록은 홍길동을 연산군 시절 조정을 괴롭힌 유명한 도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허균은 그러한 홍길동을 100년이 지난 조선 중엽 그의 한글 소설에서 부활시켰다. 서얼이 이상 국가를 건설하는 홍길동전 여기에는 조선의 모순을 안타깝게 비판하는 허균의 조선에 대한 개혁사상이 그대로 살아있다.

재능에 천함이 없다는 유재론과 더불어 세상을 바꾸는 힘이 바로 민중에 있다는 호민론이 바로 그것이다. 허균은 호민론에서 천하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임금이 아닌 백성이라고 했다. 그는 백성을 세 부류로 나눴다. 관리가 시키는 대로만 하는 항민, 세상을 원망만 하는 원민,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행동으로 나서는 호민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가장 두려운 자는 호민이다. 호민은 잠자는 민중을 이끄는 지도자이다. 임금과 지배세력이 백성을 없이 여기고 착취하면 호민이 앞장서서 원민과 항민을 선동에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초래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허균은 홍길동이라는 호민을 통해 신분차별이 없는 사회를 꿈꾸었던 것이다.

임금이 백성을 위하지 않고 자기 욕심이나 채운 나라가 망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 호민론
나라를 훌륭히 다스리는 것은 임금의 굳은 의지와 결단에서 나올 뿐이다. - 정론

이렇게 백성을 두려운 존재로 보며, 임금과 지배세력을 비판하던 그가 갑자기 다른 행보를 보인다. 경기도 여주군 남한강 이곳에서 조선을 흔드는 사건의 전초가 시작된다. 스스로를 강변칠우 혹은 죽림칠현이라 부르던 일곱 명의 서자가 있었다. 이들은 윤리가 없는 집이라는 무륜당을 짓고 시대를 한탄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일곱 명의 서자들은 모두 고관의 자제들이다 재능도 있었지만 첩에 자식이라는 이유로 벼슬길에 나갈 수 없었다. 조선으로부터 소외, 그것은 서얼들을 난을 일으키는 이유가 되었다. 그것이 바로 칠서의 난이다.

문경세재,  홍길동의 활빈당이 나오는 이곳에서 서울과 동래를 오가는 은 상인을 공격 은 칠 백냥을 강탈한다. 거사자금을 모으려는 사건이었다. 조선은 건국초기부터 서얼에 대한 차별이 심했다. 서얼금고법을 통해 서얼들의 벼슬을 제한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병력이 부족하자 나라에서는 서얼들을 적극적으로 등용시켰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난리가 끝나자 조정은 다시 이들이 벼슬을 빼앗았다.

서얼금고법의 폐지는 조선의 시스템을 붕괴 시키는 것이었다. 16세기 성리학 중심의 신분질서에 서얼은 양반, 중인, 상민, 천민 중 기술직 중인과 더불어 중인에 해당하는 것으로 양반중심의 지배질서가 강하되어가는 조선의 사회계급상황에서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칠서의 난은 곧 개치국사라는 사건으로 번진다. 이들은 문초하는 과정에서 광해군을 없애려는 역모가 밝혀진 것이다. 선조에 이어서 등극한 광해군 그는 서자였다. 선조가 죽자 광해군은 그를 지지하는 대북파의 지지를 얻고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을 제치고 왕위에 오른다.

영창대군의 세력은 줄곧 광해군의 왕위에 걸림돌이 된다. 대북파는 역모사건을 빌미로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유배시키고 뜨겁게 불이 달궈진 방안에 갇혀 죽임을 당한다. 이로서 대북파는 대북독주 체제를 강화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개치국사의 시발점이 된 칠서의 난의 배후로 바로 허균이 지목을 받게 된다. 

심우영을 비롯해 일곱 명의 서자들이 허균과 절친한 사이이었기 때문이다. 신변이 위험해진 허균은 조정의 최고 실세들과 손을 잡고 자신에게 유리한 정세를 모색한다. 광해군과 집권파의 신임이 필요했던 허균은 인목대비 폐모론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인목대비는 정통성이 취약했던 광해군에게 가장 큰 정치적 걸림돌이었다. 폐모론을 확산시키기 위해서 허균은 자신의 집에서 유생들을 먹이고 재우면서까지 상소를 작성했다. 위기는 기회가 되었다. 허균은 이일로 왕권강화를 꿰하던 광해군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된다.

광해군 10년 8월 이른 새벽, 남대문에 흉방이 붙는 사건이 발생한다.
개치국사 오년 뒤의 일이다. 흉방은 백성들을 위해 광해군이 제거될 것이라는 거사를 천명한 글이었다. 흉방이 허균의 조카이자 친복인 하인준의 소행으로 밝혀지자 허균은 역모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투옥된다. 하지만 허균이 투옥된 사실이 알려지자 성균관 유생들은 죄없는 사람을 가뒀다며 항소했고 거리로 떼 지어 몰려다니며 백성들을 선동했다. 허균을 탈옥시키려는 움직임도 일었다. 

하급 아전들과 노비, 무사 등 소외받고 있었던 자들이 주축이었다. 이들은 의금부 감옥 앞으로 모여들어 옥문을 부수고 허균을 데려가자고 소리쳤다. 군중들은 나졸과 옥문을 향해 돌을 던졌고 겁에 질린 나졸들은 달아나기까지 했다. 허균의 주변인을 대상으로 진상조사가 시작되었다. 고문 끝에 허균에 역모를 꾸몄다는 자백이 나온다. 스스로 왕에 오르려 했다는 것이다. 대신들은 대질심문도 필요 없이 허균을 당장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광해군은 정확한 진상조사를 명했다. 하지만 역적 허균을 하루빨리 죽여야 한다는 대신들의 상소만 쌓일 뿐이었다. 자백이 나온 지 3일 만에 허균의 사형이 집행된다.

허균에게는 변론의 기회조차도 없었다. 본인의 자백도 판결문도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조선은 쫓기듯 황급히 허균을 능지처참시켰다. 허균은 비록 대역 죄인으로 죽었지만 그를 따르던 민중들이 많았다. 잘려나간 허균의 머리를 가져가려다 심문을 당한 자도 있었다. 그 뒤로도 3개월간 허균을 따르던 자들은 계속해서 잡혀 들어갔고 귀향을 가거나 고문 끝에 죽었다.

조선사회에 절대권위에 도전했던 허균, 결국 조선을 변혁시키겠다는 그의 꿈은 실패했지만
백성을 으뜸으로 삼는 그의 개혁사상은 지금 이순간 까지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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