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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휴는 주자의 주석과 다른 해석을 저술한 탓에 귀양을 가고 사약을 받은 것이 아니다. 윤휴의 『중용신주(中庸新注)』에 대해 사문난적이라는 송시열의 비판은 효종 4년(1653)경에도 있었다. 그런데 숙종이 즉위하고 서인이 실각한 뒤 남인 정권에서 윤휴가 우참찬으로 있다가 귀양을 간 것은 다른 이유였다.

후사가 없던 숙종이 건강이 악화되자 조정에서는 병권을 둘러싸고 김석주(金錫胄) 등의 외척과 허적(許積)을 비롯해 정권을 잡고 있던 남인들의 대립이 치열했다. 윤휴는 체찰부(體察府)를 다시 설립해 허적에게 당연직으로 도체찰사를 맡게 하고, 자신은 부체찰사를 맡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를 안 숙종은 김석주를 부체찰사에 임명했다. 윤휴는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후일 이 사건이 사사(賜死)되는 이유가 된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윤휴가 체찰부 설치를 추진하던 무렵, 귀양 가 있던 송시열은 주자의 저술을 정리, 재해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송시열은 숙종 원년(1676) 장기로 귀양을 갔다가 거제로 옮겼다. 그동안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典箚疑)』를 지어 주자의 저술 중에서 의심나는 곳을 모아 정리했고,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을 만들어 『주자어류』도 교감하고 정리했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은 주자의 사서 집주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논의를 주자 저술 전반으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주자의 재해석을 위해서는 이런 저술에 대한 정리작업이 수순이기도 했다. (193~1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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