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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왕의 꿈>의 선덕여왕(홍은희 분).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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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19일 방영된 KBS <선덕여왕> 제29부에서는 선덕여왕의 즉위 장면과 함께 다음과 같은 해설이 나왔다.

"우리 역사상 최초로 기록된 여왕 등극은 신라뿐 아니라, 장자상속의 유교 통치질서가 확립된 중국과 동아시아에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여왕의 등극이 동아시아에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는 해설은, 얼핏 들으면 맞는 말인 것 같다. 이런 말이 그럴싸하게 들리는 것은 '옛날 사람들은 남존여비의 유교적 관념에 젖어 있었을 것'이라는 우리의 선입견 때문이다. 하지만, 위의 해설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선덕여왕이 등극하기 39년 전인 593년에 왜국에서는 추고여왕(소위 '추고천황' 혹은 '스이코 천황')이 즉위했다. 그는 628년까지 무려 36년간이나 권좌를 지켰다. 628년이면 선덕여왕이 등극하기 4년 전이었다.

신라와의 관계가 밀접한 왜국에서 이미 오래 전에 여왕이 출현했기 때문에, 선덕여왕이 즉위할 당시의 동아시아에서 여왕의 등극이 충격적인 사건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당시의 신라인들이 여왕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점은,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사실을 통해 쉽게 입증된다.

건국 초기부터 '여성의 리더십' 인정했던 신라

신라에서는 이미 건국 초기부터 여성의 리더십이 확립되어 있었다. 시조 박혁거세의 딸인 아로 공주가 국가 최대의 종교의식인 박혁거세의 제사를 주관한 사실에서 나타나듯이, 여성도 제사장 혹은 사제의 역할을 수행했다. 팔월 한가위에 즈음한 길쌈 시합을 주관한 것도 여성이었고, 화랑제도의 전신인 원화제도를 이끈 것도 여성이었다.

또 신라에서는 여신이 국가적으로 숭배를 받았다. 박혁거세의 부인인 알영, 제2대 남해왕의 부인인 운제, 충신 박제상의 부인인 치술은 국가적 차원의 신으로 숭배를 받았다.

한편, 위작 논란이 있는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신라에는 박씨·석씨·김씨라는 3대 왕족 외에 대원신통·진골정통이라는 2대 왕비족이 있었다. 모계 중심으로 계승되는 왕비족이 있었다는 것은, 여성의 혈통을 신성시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오래 전부터 여성의 리더십이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라인들은 여왕의 출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들이 그것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이야기는 '옛날 사람들은 남존여비의 유교적 관념에 젖어 있었을 것'이라는 우리의 선입견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

물론 신라인들이 여왕과 남자 왕을 똑같이 생각한 것은 아니다. 남자 왕위계승권자가 없는 부득이한 상황에서 여왕이 출현했다는 것은, 신라인들이 여왕보다는 남자 왕을 더 선호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여왕의 등극을 '차선책'으로 인식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들이 여왕의 등극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음을 뜻하기도 한다.

 일본 최초의 여왕인 추고 여왕의 무덤. 오사카부 미나미카와지군 소재.
ⓒ 위키피디아 백과사전 일본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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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한국인들은 유교의 영향을 크게 받은 탓에, '여자냐 남자냐' 하는 성별 가르기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여성 지도자'를 대할 때도, '지도자'란 측면보다는 '여성'이란 측면에만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은 선덕여왕에 대한 관점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많은 한국인들은 선덕여왕 시대가 여왕의 시대라는 점만 주목할 뿐, 그 시대가 갖는 정치적 의미에 대해서는 별로 주목하지 않는다.

예컨대, 선덕여왕이 세금을 면제해주고 복지정책을 시행한 사실을 두고, 이를 여성 특유의 모성애가 발휘된 결과로 이해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런 정책이 남자 왕들의 시대에도 흔히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선덕여왕을 이해하다 보면, 여성이기 이전에 '통치자'였던 선덕여왕의 시대가 갖는 정치적 의미에 대해서는 둔감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하다 보면, 수박 겉핥기식으로 그를 이해할 수밖에 없다.

혁신을 준비했던 선덕여왕 시대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중 하나는, 선덕여왕의 시대가 혁신을 준비하는 시대였다는 점이다. 그 시대의 특징 중 하나는 김춘추-김유신 콤비의 대약진이었다. 이 콤비는 외교 및 군사 방면에서 여왕의 치세를 뒷받침했을 뿐만 아니라 훗날 신라가 고구려·백제를 역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런데 김춘추와 김유신은 일종의 아웃사이더들이었다. 신라 사회의 주역으로 떠오르기 전까지 두 사람은 소속 집단 내에서 비주류에 머물러 있었다.

선덕여왕과 6촌 관계인 김춘추는 왕족이기는 하지만 왕위계승권이 없었다. <삼국유사> '기이' 편이나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그의 할아버지인 진지왕은 왕위에서 쫓겨났다. 폐위된 왕의 손자였기 때문에 그는 왕위계승권을 가질 수 없었다. 목숨을 부지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처지였다.

진평왕이 사망하고 선덕여왕이 등극할 당시에 김춘추는 서른 살이었다. '폐위된 왕의 손자'라는 꼬리표가 없었다면, 그가 얼마든지 진평왕의 뒤를 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김춘추는 그런 것을 꿈조차 꿀 수 없는 처지였다.

김춘추의 입지가 불리했다는 점은, 나라를 위해 공을 많이 세웠는데도 선덕여왕 시대는 물론이고 진덕여왕 시대에도 후계자가 되지 못한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진덕여왕이 사망한 직후에 섭정으로 추대된 알천이 김춘추를 추천하는 극적 사건이 연출되지 않았다면, 김춘추는 왕좌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선덕여왕의 양 날개인 김춘추(왼쪽, 최수종 분)와 김유신(오른쪽, 김유석 분).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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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신라의 귀족이기는 하지만, 가야 출신의 비주류 귀족이었다. 웬만큼 노력해서는 귀족사회의 핵심부로 진입할 수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그는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은 군공을 세워야만 여타 귀족들과 같은 위치에 설 수 있었다. 그가 그렇게 열심히 전쟁을 한 동기 중 하나도 거기서 찾을 수 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출세하기 힘들었던 김춘추와 김유신이 선덕여왕의 치세를 보좌했다는 것은, 여왕이 구세력보다는 신세력을 통해 왕권강화를 꾀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선덕여왕이 정치혁신에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뜻하기도 한다.

이런 정치실험에 힘입어 선덕여왕 시대에는 신구 양대 세력이 양립했고, 뒤이은 진덕여왕 시대에는 신세력이 구세력을 능가했다. 진덕여왕 사망 직후에 구세력의 원로인 알천이 섭정 직을 고사하고 신세력인 김춘추를 추천한 것은 이 같은 역학구도의 변화를 반영한다.

이렇게 신구 세력의 교체를 이룩한 덕분에, 신라는 고구려·백제와의 역학구도를 바꾸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정치혁신을 통해 싱싱한 지배층을 배출했기 때문에, 고구려·백제와의 대결에 좀더 활력적으로 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당나라와의 나당동맹이 큰 역할을 했지만, 지배층의 교체가 신라의 대약진에 밑거름이 됐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에서 나타나듯이, 선덕여왕은 김춘추·김유신으로 대표되는 신세력의 입지를 굳혀줌으로써 이 그룹이 훗날 지배권을 차지하고 신라를 혁신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단순한 여왕이 아니라, 정치혁신의 발판을 다진 군주였던 것이다.

이렇게, 신세력의 발판을 만들어주고 혁신의 기틀을 세운 여왕은 선덕여왕 이후에 등장하지 않았다. 그 후의 진덕여왕이나 진성여왕은 그만한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따라서 제2의 선덕여왕은 그 후로 등장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제2의 선덕여왕은 적어도 2018년 2월 25일까지는 한국사에 출현할 가능성이 높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신세력과 힘을 합쳐 권력을 잡거나 유지한 여성 통치자는 아직까지 대한민국에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2013년 2월 25일 이후로 정치적 변화가 발생한다면, 2018년 2월 이전에도 제2의 선덕여왕은 얼마든지 등장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단순히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는 제2의 선덕여왕이란 명예를 누릴 수 없다. '여성'에 더해 '혁신'이란 키워드까지 겸비해야만 그런 영예를 누릴 수 있다. 누구라도 제2의 선덕여왕이 되고자 한다면, 신세력이 아닌 구세력과 '맞짱'을 뜰 준비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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