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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약재 김구용(惕若齋 金九容 : 1338∼1384) |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이고 자(字)가 ‘경지(敬之)’․호(號)가 ‘척약재(惕若齋)’․초명(初名)이 ‘제민(齊閔)’인데, 첨의중찬(僉議中贊)을 지낸 방경(方慶)의 현손(玄孫)이고 아버지는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상락군(上洛君) 묘(昴)이며, 좌정언(左正言)을 지낸 김제안(金齊顔 : ?∼1368)의 형(兄)임

 

 

공민왕(恭愍王) 때 16세(歲)로 진사(進士)에 합격(合格)하자 왕명(王命)으로 모란시(牡丹詩)를 지어 일등(一等)을 하여 왕(王)으로부터 산원직(散員職)을 받았고, 18세(歲)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덕녕부주부(主簿)를 거쳐 민부의랑겸성균직강(民部議郎兼成均直講)이 되었으며, 공민왕(恭愍王) 16년(年 : 1367) 성균관(成均館)이 중건(重建)되자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 1337∼1392)․박상충(朴尙衷 : 1332∼1375)․도은 이숭인(陶隱 李崇仁 : 1347∼1392) 등과 성리학(性理學)을 일으키고 척불숭유(斥佛崇儒)의 선봉(先鋒)이 되었음

 

척약재(惕若齋)는 우왕(禑王) 1년(年 : 1375) 삼사좌윤(三司左尹)으로 있을 때, 이인임(李仁任 : ?∼1388) 등 권신(權臣)들이 북원(北元)이 보낸 사절(使節)을 맞으려 하자, 이숭인(李崇仁)․삼봉 정도전(三峰 鄭道傳 : 1342∼1398)․양촌 권근(陽村 權近 : 1352∼1409) 등 당시 친명파(當時 親明派)와 함께 도당(都堂)에 상서(上書)해 이를 반대(反對)하다가 죽주(竹州)에 유배(流配)되었는데, 뒤에 여흥(驪興)으로 옮겨 강호(江湖)에 노닐며 거처(居處)하는 곳을 ‘육우당(六友堂)’이라 이름하고, 시(詩)와 술로 날을 보냈음

 

우왕(禑王) 7년(年 : 1381) 풀려나와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에 임명(任命)되자 왕(王)의 절제(節制) 없는 거둥을 경계(警戒)하는 글을 올려 직간(直諫)하였고, 이듬해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전교시판사(判典校寺事)가 되었음

 

명(明)나라와의 외교관계(外交關係)가 원만(圓滿)하지 못하던 1384년(年) 행례사(行禮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갈 때, 국서(國書)와 함께 백금(白金) 1백 냥(百 兩)과 세저(細苧)․마포(麻布) 각(各) 50필(匹)을 가지고 갔는데, 요동(遼東)에서 체포(逮捕)되어 명(明)나라 수도(首都)인 난징[남경(南京)]으로 압송(押送)되었다가, 명(明)나라 태조(太祖)의 명(命)으로 대리위(大理衛)에 유배(流配)되던 도중(途中) 노주(瀘州) 영녕현(永寧縣)에서 병사(病死)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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