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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이규보의 전북경물 한시(상)] 전주목 부임, 타향서 느낀 점 읊어

 

효자동 비석앞서 시 지어 / '남행월일기' 수필도 남겨

 

기고  |  desk@jjan.kr / 최종수정 : 2014.03.20  17:31:37

 

고려 고종조 이규보(1168- 1241)는 고구려 28왕 705년간의 역사를 읊은 대서사시를 남겼다, 그 중 고구려의 건국시조 주몽으로부터 유리에의 사위(嗣位)에 이르는 5언 282구의 시와 이에 겻들인 설화까지 모두 4,000여자가 넘는 장편시 <동명왕편>은 시인의 사명이 드러난 명편이다. 13차 몽고난으로 피폐된 민심과 나라를 걱정하면서 고려는 중국대륙을 호령했던 고구려의 후국이라는 역사적인 웅혼한 기상과 드높은 민족혼을 불러일으키고 싶은 작자의 철학이 오롯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여조의 성은 고(高)요 시호(諡號)는 동명인데 (麗朝姓高 諡東明}

활잘 쏘는 까닭으로 이름은 주몽이라 (善射故 以朱蒙名)

아버지는 해모수요 어머니유화(柳花)인데 (父解慕漱 母柳花)

하늘의 자손이며 하백(河伯)의 외손이라 (皇天子孫 河伯甥)

그동안 구전해 오던 고구려의 건국시조 동명왕의 설화를 엮은 장편의 서사시의 허두이다. 〈동명왕편〉 병서(幷序)에서 이규보는 〈구삼국사〉의 책속에 있는 동명왕 본기(本紀)를 보니 그 신이한 사적(事跡)이 세상에서 듣는 것보다 더했다고 하면서‘나는 처음 동명왕의 설화를 귀(鬼)와 환(幻)으로 생각했지만, 세 번이나 반복하여 읽은 끝에 점점 그 근원에 들어가니 귀(鬼)가 아니라 신(神)이며 환(幻)이 아니라 성(聖)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물며 국사는 사실 그대로 쓴 글이기 때문에 어찌 없는 사실을 전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김부식이 국사를 쓸 때에 자못 동명왕편을 생략하였으니 그는 국사란 세상을 바로잡는 글이니 이상한 일은 후세에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그런 것인가. 그러나 난 이것을 시로 엮어 천하에 펼침으로써 우리나라가 본디 성인(聖人)의 나라임을 널리 알리고자 했다’라는 자신의 저작의도를 세상에 천명하였다.

이는 몽고의 연이은 침략으로 피폐된 민족의식을 불러일으켜서 민족적 저항의식과 희망을 북돋우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해모수는 본디 하늘의 천제의 아들로 오룡차(五龍車)를 타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천자이다. 성 북쪽 청하(淸河)에 살았던 하백에게는 세 딸 유화, 훤화, 위화 등이 있었는데, 해모수가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들을 만났다. 그는 세 딸 가운데 유화를 데리고 하백에게 찾아가 결혼을 하게 해달라고 간청했으나, 하백은 해모수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뒤, 이 사람을 가죽가마에 태워 하늘로 보내려 하였다. 술에서 깨어난 해모수는 유화의 비녀를 뽑아 가죽가마를 찢고 혼자 하늘로 올라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하백은 유화를 꾸짖고 태백산 남쪽 우발수 물가에 유화를 버렸으나 강가의 어부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결국 금와왕에게 구함을 받아 주몽을 낳게 되었다.

이후 유화는 해모수로 인해 잉태한 주몽을 알로 낳았다. 한 되만한 큰 알인지라 마굿간에 버렸지만 말이 밟아 깨뜨리지 않았고, 깊은 산 속에 버려도 오히려 짐승들이 보호해줌으로써 결국 주몽은 알속에서 사람으로 태어났다. 왕재로 자라난 주몽은 부여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서 비류국 송양왕의 항복을 받고 고구려를 세워 동명성왕이 되었고, 동명왕의 아들 유리가 부왕을 찾아가 부러진 단도를 맞춰서(短刀附合) 왕위를 계승했다는 이야기로 펼쳐진 대서사시가 바로 ‘동명왕편’이다. 이 이야기는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권 13 고구려본기에 유리왕의 ‘황조가’와 더불어 전해온다.

이규보는 32세 때인 신종 3년(1200년) 당시 무단정권의 실력자인 최충헌의 시회(詩會)에 불려나가 그를 칭송하는 시를 써서 벼슬을 얻었고, 이후 전주목에 부임하였다. 이때 전주의 속현들을 둘러보며 역사적인 〈남행월일기〉라는 기행적 수필을 남겼다.

9월 23일 처음 전주로 들어오면서 말 위에서

 

‘북당에서 눈물 흘리며 어버이를 작별하니/

어머니를 모시고 관직나간 고인처럼 부끄러운데/

문득 완산의 푸른 빛 한 점을 보니/

비로소 타향객인 줄 알겠네

(北堂揮涕忍辭親 輦母之官愧古人 忽見完山靑一點 始知眞箇異鄕身)’라 읊은 7언절구가 전해온다.

 

그리고 지금의 전주 효자동을 지나다가 그 곳에 있는 무명의 효자비로 인해 효자리가 되었다는 5언고율시

‘비석 세워 효자라 표했는데/

일찍이 이름을 새기지도 않았네/

어느 때 누구인지 알 수도 없으니/

어떠한 효행인지 모르겠네

(立石標孝子 不曾鐫姓氏 不知何代人 孝行復何似)’라 읊기도 했다.

전주는 완산(完山)이라 일컫기도 하는데 옛날 백제의 땅이다. 인구가 많고 집들이 즐비하여 옛 나라의 풍(風)이 있는 까닭에 그 백성들이 치박(稚朴)하지 않으며 아전들이 다 점잖은 사인과 같아서 행동거지가 자상함이 볼만하다.

중자산이란 산이 있는데 나무가 가장 울창하여 이 고을에서 크고 웅장한 산이다.

소위 완산이란 산은 다만 나지막한 봉우리일 뿐, 한 고을이 이로써 이름을 얻은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12월 기사(己巳)에 비로소 속군들을 두루 다녀 보았다. 마령(馬靈), 진안(鎭安)은 산골에 있는 옛 고을인데 그 백성들이 질야(質野)하다. 얼굴이 잔나비 같고 배반(杯盤)과 음식이 만맥(蠻貊)의 풍모가 있는데, 꾸짖거나 나무라면 마치 놀란 사슴처럼 금방 달아날 듯하다. 산을 따라 감돌아가서 운제(雲梯)에 이르렀다. 운제로부터 고산(高山)에 이르기까지 위태로운 봉우리와 드높은 고개가 만인이나 높게 솟아있는데 길이 매우 좁아서 말을 타고 갈 수가 없었다.

(중략)· 〈남행월일기〉

전주는 본래 신라 때부터 ‘완산’,‘완산주’라고 불러 왔는데, 이전에는‘온다라’, ‘온드르’라 했던 것을 신라 경덕왕 때 한자로 지명을 바꾸면서 비롯된 이름이었다. 이규보는 전주에는 중자산이란 웅장한 산이 있는데도 전주부의 남천너머 나지막한 봉우리에 불과한 ‘완산’의 이름을 굳이 취하여 전주의 지명으로 삼았는지 참으로 이상한 일이라 하였다. 그리고 〈남행월일기〉라는 기행수필에 전주에 속해있는 속현들 예컨대 마령, 진안, 운제, 고산, 예양, 낭산(朗山), 금마(金馬), 이성(伊城) 등을 두루 둘러보며 그 지방의 산천과 인심, 음식, 풍물 등을 유려한 기행수필로 엮어내었다.

 

http://www.jjan.kr/news/articleView.html?idxno=499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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