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신비롭고, 그래서 단 하나의 초상화가 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신비롭고, 그래서 단 하나의 초상화가 되지 않는다. 롤랑 바르트도 [밝은 방]에서 비슷한 말을 했다. 그는 쉽게 해석되는 이미지를 스투디움이라 하고, 언제나 모호한 이미지를 풍쿠툼이라 했다. 진정한 이미지는 단연 풍크툼이라고. 이 풍크툼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을 무뎌지지 않게 하고 예민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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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적인 풍쿠툼의 얼굴은 먹을 때마다 맛이 다르다. 그러니 계속 뜯어먹게 된다.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만날 때마다 그 얼굴에 반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사람의 신비스러움 때문에 그 사람에게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항상 우리에게 낯선 의미를 전송하는 얼굴. 우리는 그 얼굴에 매료되느라 전 생애를 탕진한다.> (<모든 순간의 인문학>, 한귀은, 한빛 비즈, 83쪽)
여기에서 '탕진한다'는 말이 부정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바친다'로 바꿔보면 어떨지?
그렇게 고친 다음에 나는 바르트의 이 개념을 다음과 연결시켜 보았다.
<신은 뚜렷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자유롭게 신을 사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이 그의 빛과 사랑으로 우리를 압도할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신은 보이지 않도록 숨어 있다가 인간을 구속하지 않는 여러 방식으로
은밀하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 <신의 탄생>, 프레데릭 르누아르, 246쪽 )
보이지 않는 얼굴과 항상 신비로운 얼굴!
뚜렷하게 드러내지 않는 얼굴로 오시는 분이기에
우리는 그 분 얼굴에 더 매료되는 것은 아닐까? 해서 전 생애를 바쳐 탐구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