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전체보기
블로그 전체검색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신비롭고, 그래서 단 하나의 초상화가 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신비롭고, 그래서 단 하나의 초상화가 되지 않는다. 롤랑 바르트도 [밝은 방]에서 비슷한 말을 했다. 그는 쉽게 해석되는 이미지를 스투디움이라 하고, 언제나 모호한 이미지를 풍쿠툼이라 했다. 진정한 이미지는 단연 풍크툼이라고. 이 풍크툼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을 무뎌지지 않게 하고 예민하게 만든다.

....(중략)

매력적인 풍쿠툼의 얼굴은 먹을 때마다 맛이 다르다. 그러니 계속 뜯어먹게 된다.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만날 때마다 그 얼굴에 반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사람의 신비스러움 때문에 그 사람에게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항상 우리에게 낯선 의미를 전송하는 얼굴. 우리는 그 얼굴에 매료되느라 전 생애를 탕진한다.> (<모든 순간의 인문학>, 한귀은, 한빛 비즈, 83)

 

여기에서 '탕진한다'는 말이 부정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바친다'로 바꿔보면 어떨지?

 

그렇게 고친 다음에 나는 바르트의 이 개념을 다음과 연결시켜 보았다.

 

<신은 뚜렷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자유롭게 신을 사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이 그의 빛과 사랑으로 우리를 압도할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신은 보이지 않도록 숨어 있다가 인간을 구속하지 않는 여러 방식으로

은밀하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 <신의 탄생>, 프레데릭 르누아르, 246)

 

보이지 않는 얼굴과 항상 신비로운 얼굴!

뚜렷하게 드러내지 않는 얼굴로 오시는 분이기에

우리는 그 분 얼굴에 더 매료되는 것은 아닐까? 해서 전 생애를 바쳐 탐구하는 것이 아닐까?

 

 

 
취소

댓글쓰기

저장
덧글 작성
0/1,000

댓글 수 4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아자아자

    그렇게 대입을 시키셨군요 ㅎㅎㅎ
    자신이 은애하는 분을 그렇게 하고픈 마음 조금은 이해되네요.

    2015.01.23 12:23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seyoh

      앞 뒤 인용문의 연결이 납득이 되는지 궁금해요.

      2015.01.23 12:47
    • 파워블로그 아자아자

      일단은 비종교인이다보니 편견이 좀 있지요.
      그렇지만 그 분을 이렇게 대입하고픈 마음은 이해가 갑니다.
      이해인 수녀의 시를 읽다보면 그 대상이 이해인 수녀는 천주님을 대상으로 했겠지만,
      우리네에겐 남녀의 애틋한 시로 해석되는데 무리가 없었어요.

      2015.01.23 12:54
    • 파워블로그 seyoh

      롤랑 바르트의 글은 그냥 일반적인 사랑 이야기예요
      그것을 제가 종교적인 것으로 끌어다가 해석하고
      두번 째 인용글과 연결을 시켰지요...그러니 님이 한 것과 역순으로 동일해요

      2015.01.23 12:56

PRID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