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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茶山)이 발견한 <우암연보(尤庵年譜)>의 오류

 

<냉담가계> 이상하, 257쪽

 

맹자는 “《서경(書經)》의 기록을 다 믿을 바에는 차라리 《서경》이 없느니만 못하다.” 하였거니와 글을 매우 신중히 쓰고 책을 함부로 내지 않았던 옛날에 기록된 글들도 다 믿을 수는 없다. 특히 조선후기 당쟁이 격화된 뒤로는 상대편을 비방하고 자기편을 두둔하는, 일방적인 내용의 글들이 많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연보에 중요한 사실이 잘못 기록된 것을 지적하고, 붕당이 나누어진 뒤로 나온 기록들은 대개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근래 <우암연보(尤庵年譜)>를 보니 아무래도 미심쩍은 곳이 있었습니다. 효종(孝宗) 무술년(1658, 효종 9) 겨울 11월에 여강(驪江)이 9품의 말단 벼슬아치로서 우암(尤庵)에게 발탁되어 여덟 품계를 뛰어넘어 진선(進善)1)에 특별히 제수되었으니, 우암이 이조(吏曹)를 맡은 지 겨우 50여 일 남짓 되던 때였습니다. <연보>에서 말한 말의(末擬)2)란 우리 조정의 인사행정 격식에서 명망이 매우 높은 사람을 모두 말망(末望)으로 단통(單通)하는 것이니, 지금의 소위 부응교(副應敎)를 말망단통(末望單通)한다, 부제학(副提學)을 말망단통한다 하는 것이 바로 그 법입니다.

  이 당시 효종은 어진 이를 얻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우암을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임명, 인재를 발탁하는 일을 맡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암이 이조를 맡은 지 수십 일도 지나지 않아서 맨 먼저 여강을 여덟 품계나 뛰어넘어 바로 진선(進善)에 의망(擬望)하였고, 이에 대해 의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자 여강을 체직한 다음 우암이 연석(筵席)에서 또 주청(奏請)하여 여강을 잉임(仍任)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이때에는 우암이 여강을 아직 배척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으며, 아직 배척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여강을 특별히 높은 자리에 발탁하여 나라 일을 함께 해보려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연보>에서는 이보다 6년 전인 황산(黃山)의 모임3)에서 이미 여강을 이단(異端),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하여 왕망(王莽)ㆍ조조(曹操)ㆍ동탁(董卓)ㆍ유유(劉裕)4) 등에 비겼다고 하니, 이럴 리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황산의 모임이 있기 12년 전에 우암이 벌써 <이기설(理氣說)>을 지어 여강을 이적금수(夷狄禽獸), 난신적자(亂臣賊子)라 했다고 했으니, 이럴 리가 있겠습니까? 참으로 그러했다면 그 사이 수십 년 동안 여강에 대한 우암의 언론은 줄곧 변함없이 여강을 난신적자라 하다가 갑자기 난신적자를 여덟 품계나 뛰어넘어 곧바로 진선(進善)에 임명하게 한 것이니, 매우 이치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대저 붕당(朋黨)이 나뉜 이래 기록들은 이와 같이 대부분 믿을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이미 십여 년 전에 여강이 난신적자임을 알았고 또 그가 개과천선했음을 분명한 알 수 있는 사실도 없거늘 막 이조를 맡자마자 여덟 품계나 뛰어넘어 발탁하여 세자(世子)를 보도(輔導)하는 자리에 제수했다는 것이 될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설혹 미촌(美村)5)이 밤낮으로 여강을 천거하지 않는다고 책망했다 하더라도 단순히 책망했다는 이유로 난신적자를 특별히 높은 자리에 추천할 수 있겠습니까? 또 여강이 미촌을 강도부노(江都?奴)6)라고 매도하자 이 때문에 미촌이 겁을 먹고 여강에게 빌붙었다고 한 것도 아마 사실이 아닐 듯합니다. 미촌 부자7)는 누구든 강화도 사건을 제기하기만 하면 반드시 절치부심하여 그 사람과 각립(角立)하였는데, 이러한 이유로 겁을 먹고 여강과 친밀해졌을 리는 없을 것입니다.

  종합해 말하면, 우암이 여강과 사이가 벌어진 것은 기실 기해예론(己亥禮論)8) 이후의 일로서 사적(事跡)이 명료하니 굳이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공정한 마음과 공정한 눈으로 보면 엊그제 일처럼 또렷이 알 수 있습니다. 편집의 어려움이 이와 같으니, 애석한 일입니다.


1) 진선(進善) : 조선시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속한 벼슬로 정4품의 청요직(淸要職)이다.
2) 말의(末擬) : 말망(末望)으로 비의(備擬)한다는 뜻이다. 관직에 한 사람을 임명하기 위해 세 사람을 추천하는데 이를 삼망(三望)이라 한다. 말망은 세 사람 중 끝자리에 이름이 적혀 추천되는 것이다.
3) 황산(黃山)의 모임 : 황산은 충청남도 연기군(燕岐郡)에 있는 황산서원(黃山書院)을 가리킨다. 송시열(宋時烈)이 47세 때 황산서원에서 유계(兪棨)ㆍ윤선거(尹宣擧) 등과 모여 황산서원에서 유숙하면서 송시열이 윤휴(尹?)가 《중용장구(中庸長句)》 주(註)를 고친 것에 대해 비판하였다. 《宋子大全附錄 2권 年譜1 癸巳條》
4)왕망(王莽)ㆍ조조(曹操)ㆍ동탁(董卓)ㆍ유유(劉裕) : 왕망은 전한(前漢) 말엽의 역적으로 평제(平帝)를 시해하고 나라를 빼앗아 신(新)이란 나라를 세웠다. 동탁(董卓)은 후한(後漢) 말엽의 역적으로 영제(靈帝)가 죽자 소제(少帝)를 폐위하고 헌제(獻帝)를 세웠다. 조조(曹操)는 후한 말엽의 역적으로 동탁이 제거된 뒤 실권을 장악하였다. 유유는 남조(南朝) 시대의 송 무제(宋武帝)의 이름이다. 그는 진 공제(晉恭帝)를 폐위하고 자신이 황제가 되어 송(宋)을 세웠다.
5) 미촌(美村) : 윤선거(尹宣擧 1610~1669)의 호이다.
6) 강도부노(江都?奴) : 병자호란 때 강도(江都), 즉 강화도(江華島)로 부인과 함께 피난갔다가 부인 이씨(李氏)는 자결하였는데 혼자 종의 복장으로 위장하여 살아난 윤선거(尹宣擧)를 비하하는 말이다. 부노(?奴)란 포로가 된 종이라는 뜻이다.
7) 미촌(美村) 부자 : 윤선거와 그의 아들 윤증(尹拯)을 가리킨다.
8) 기해예론(己亥禮論) : 기해년(1659)에 효종(孝宗)이 승하하였을 때 효종의 상사(喪事)에 모후(母后)인 자의대비(慈懿大妃) 조씨(趙氏)의 복상(服喪)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윤휴(尹?) 등 남인(南人)은 삼년설(三年說)을 주장하였고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西人)은 기년설(期年說)을 건의(建議)하여 기년설이 채택된 것을 가리킨다. 《燃藜室記述 31권 顯宗朝故事本末》

[近觀尤菴年譜, 有不能無疑者, 孝宗戊戌冬十一月, 驪江以九品末官爲尤菴所拔擢, 超八階特拜進善; 此時尤菴掌銓?五十餘日也. 其云末擬者, 我朝政格, 凡極望之人, 皆以末望單通; 今所謂副應敎末望單通, 副提學末望單通, 乃其法也. 此時孝宗側席求賢, 而以尤菴爲天官?宰, ?掌其事; 乃尤菴掌銓不過數旬, 首以驪江超八階直擬進善, 及有人言而遞, 尤菴又筵奏仍任, 則此時尤菴未及?棄, 可知. 不唯未及?棄, 抑將超遷冥升, 與共國事, 可知. 乃於六年之前, 黃山之會, 已以驪江爲異端, 爲斯文亂賊, 比之於莽卓操裕, 有是理乎? 又黃山十二年之前, 尤菴已著<理氣說>, 以驪江爲夷狄禽獸亂臣賊子, 有是理乎? 誠如是也, 前後數十年之間, 尤菴言論, 一直無變, 以驪江爲亂賊, 而忽以亂賊超八階直拜進善, 太不近理. 大抵朋分以來, 文字之多不可盡信, 有如是矣. 旣於數十年前知其爲亂賊, 彼人亦無改過遷善之明驗, 而掌銓之初, 超八階而擢用, 授之以輔導春宮之職, 可乎? 設使美村日夜?責, 豈可以?責之故超遷亂賊乎? 且云“驪江罵美村爲江都?奴, 以此之故, 恐怯蝨附於驪江.” 亦恐不然. 美村父子, 一有人提起江都之事, 則必切齒腐心, 與之角立; 以此生怯, 與之親密, 亦恐無此理. 總之, 尤菴之有隙於驪江, 實在己亥禮論之後, 事跡瞭然, 不必諱也. 臨之以公心公眼, 歷歷如昨日事. 惜乎! 編輯之難, 有如是矣.]

 
-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이여홍에게 보낸 편지(與李汝弘)〉《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연보(年譜)를 읽다가 발견한 오류를 지적한 것이다. 여강(驪江)은 백호(白湖) 윤휴(尹? 1617~1680)를 가리킨다. 백호가 남한강 가인 경기도 여주(驪州)에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이다. 우암과 백호의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658년에 우암이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9품의 말단 벼슬아치인 백호를 추천하여 정4품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진선(進善)에 천거하였는데, 이 사실을 두고 <우암연보>에서는,

  “윤휴(尹?)가 주자(朱子)의 《중용장구(中庸長句)》의 주(註)를 고친 뒤로 선생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배척하였다. 이런 까닭에 이조판서가 되어 인사행정을 맡은 뒤로도 윤휴를 등용할 뜻이 없었다. 이에 선생을 질책하는 말이 사방에서 이르렀고 윤선거(尹宣擧)는 심지어 편지를 보내어 윤휴를 등용하지 않는다고 질책하였고, 혹자는 곧바로 대사헌에 제수하지 않은 것을 잘못이라 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사람들의 비난이 비등하여 상황이 매우 위태하니, 선생이 마침내 윤휴를 진선(進善)의 말망(末望)에 올려 낙점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당시 여론이 또 여덟 품계를 뛰어넘어 제수하여 규례에 어긋났다고 비난했기 때문에 선생이 계청(啓請)하여 체직했다가 다시 입대(入對)해서 계청하여 잉임하게 하였다.”

  하였다. 우암이 백호를 탐탁찮게 여겨 삼망(三望) 중 말망(末望)에 이름을 올렸다는 것인데, 다산은 이에 대해 명망은 높고 자급(資級)은 낮은 사람을 특별히 발탁할 때 말망에 이름을 올려서 낙점을 받는 관례가 있다고 반박하였다. 즉 일종의 인사행정에서 특별 채용의 절차이지 백호를 탐탁찮게 여겨 말망에 이름을 올린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우암연보>에 의하면, 이보다 6년 전에 우암은 시남(市南) 유계(兪棨)ㆍ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와 함께 황산서원(黃山書院)에서 유숙하면서 백호에 대해 비판하였다는 것이다. 그 기록에서 중요한 부분만 발췌해 보자.

우암이,

  “하늘이 공자를 이어 주자를 세상에 낸 것은 실로 만세의 도통(道統)을 위해서다. 주자 이후로 하나의 이치도 드러나지 않음이 없고 하나의 글도 밝혀지지 않음이 없거늘 윤휴가 스스로 자기 견해를 세워 마음대로 자기 주장을 내세운다.” 하니,


 미촌이
“의리는 천하의 공물(公物)인데 지금 희중(希仲 윤휴의 자)으로 하여금 감히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이에 우암이,

  “공은 주자는 고명하지 못하고 윤휴가 도리어 더 낫다고 여기는가? 또한 윤휴처럼 참람된 놈을 고명하다고 한다면, 왕망(王莽)ㆍ동탁(董卓)ㆍ조조(曹操)ㆍ유유(劉裕) 같은 역적들도 모두 너무 고명해 그러한 것인가? 윤휴는 실로 사문난적이니, 무릇 혈기(血氣) 있는 사람들이면 모두 죄를 성토해야 한다. 《춘추(春秋)》의 법에 난신(亂臣)과 적자(賊子)를 다스릴 때는 반드시 먼저 그를 편드는 자부터 다스리게 되어 있으니, 왕자(王者)가 나타나게 된다면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하니, 미촌은 “그대는 희중을 너무 두려워한다.”하였다.

  이와 같이 <우암연보>에는 황산서원에서의 대화를 매우 사실적으로 기록해 놓았지만 다산은 앞뒤의 사실이 서로 맞지 않다고 보았다. 그런데 <우암연보>에는 심지어 황산서원의 모임이 있기 12년 전에 우암이 벌써 <이기설(理氣說)>을 지어 백호를 이적금수(夷狄禽獸), 난신적자(亂臣賊子)라고 했다고 기록해 놓았다. 다산은 우암과 백호의 사이가 벌어진 것은 황산서원의 모임이 있은 지 7년 뒤인 1659년 기해예론(己亥禮論) 때 서로 의견이 엇갈린 뒤부터라고 단정하였다. 즉, 그 이전에는 두 사람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지만 우암이 사문난적으로 몰았던 백호와 사이가 좋았다고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암의 사후에 <연보>를 쓰면서 사실을 날조했다는 것이다. 다산은 당쟁이 생긴 뒤에 씌여진 기록들은 대부분 믿을 수 없다고 결론지었는데, 적확(的確)한 지적이라 생각된다.

  당쟁이 사라진 지 오래지만 그 여파는 지금도 남아 있다. 아직도 지연과 혈연에 따라 퇴계니 율곡이니 존모하는 선현(先賢)이 나뉘고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도 포폄이 달라진다. 딴은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와 굳어진 생각일 터이니, 어디 쉽게 바뀔 수 있겠는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조선시대 당쟁의 기억은 머지않아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어지겠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오히려 지역과 이념의 대립이 또 다른 격한 싸움판을 만들고 있다. 사람의 생각도 에너지라 그 보이지 않는 파장이 쉽게 그치지 않고 역사의 굴곡을 따라 흐르는가보다.

  글은 말보다 정제되어야 했다. 말을 할 때는 가끔 실수하고 또 그 자리에서 고칠 수도 있지만 글로 기록되면 많은 사람에게 전파될 수 있으므로 더욱 조심해야 한다. 요즘은 글이 말보다 더 가벼워졌다. 차라리 남 앞에서 말을 할 때는 조심해도 혼자서 글을 쓸 때는 오히려 더 방자해져서 자기 불만과 편벽된 생각을 쉽게 쓴다. 그리고 그 글을 또 다른 외눈박이들이 자꾸 퍼 나르니, 이래서야 싸움이 격렬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글은 자기 견해를 드러낸 데 그치지 않고 또 다른 사실을 만들어내며 종잡을 수 없는 싸움을 부추길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글쓴이 : 이상하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교무처장
주요저서
- 한주 이진상의 주리론 연구, 경인문화사
- 유학적 사유와 한국문화, 다운샘(2007) 등
주요역서
- 읍취헌유고, 월사집, 용재집,아계유고, 석주집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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