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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풀어쓴 도덕경

[도서] 시로 풀어쓴 도덕경

노자 저/전재동 역

내용 평점 3점

구성 평점 3점

시로 풀어쓴 도덕경

 

하나, 도덕경의 는 기독교의 말씀인가?

 

노자의 도덕경을 읽는 방법이 여럿 있는데, 기독교 측면에서 읽을 때에 흔히 범하기 쉬운 실수가 한 가지 있다. 바로 도덕경의 도()를 기독교의 말씀으로 읽으려 한다는 것.

이는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바로 요한복음 11절을 해석하면서 이미 그런 학습을 했기에 그렇다.

 

요한복음 11절은 다음과 같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구절을 번역 또는 해석하는 과정에서 말씀은 로고스(logos) 또는 도()로 이해되었다.

그런 것을 알고 있으므로, 도덕경에서 ()’라는 말을 만나면 강한 유혹을 느낀다. ‘말씀으로 번역하고 싶은 욕구, 그게 마치 믿음에 충실한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기독교 관점에서 재해석한 동양고전을 모토로 하여 이 책을 집필하였”(16)다는 말에서 그런 조짐을 보았다. 그렇다면 혹시 저자도 그런 유혹을 받았을지도 않았을까, 하는,  

 

그런 나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1장 첫 구절부터 그랬다.

 

도가도비상도 (道可道非常道)

보통 도덕경을 번역하는 경우, 이 부분의 번역은 를 그냥 라 번역한다.

(최진석) 도가 말해질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고 (도덕경, 21)

(기세춘) 이미 가르쳐 말한 도는 참도가 아니다. (노자강의, 340)

 

그러나 이 책은 도를 말씀으로 번역한다.

<말씀은 진리다 라고 하면 되느냐? 그러면 늘 있은 도는 이미 아니다.>(21)

 

다른 곳에서도 그런 번역은 이어진다.

4-1 (도덕경 4장 첫부분 번역)에서도 도를 말씀으로 번역한다.

도충 이용지(道沖 而用之)

<말씀은 그 속에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말씀을 사용하면 무진장이다.>(31)

 

저자의 그런 번역을 무어라 평가할 수는 없다. 그것은 저자의 주관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저자가 미리 밝혀놓지 않았는가? 기독교 관점에서 재해석했다는 것을.

 

, 본문 해석에 있어서 이런 구분 필요하다

 

본문의 구성은 다음과 같이 되어있다. 

해석을 먼저 윗부분에 하고, 밑에 원문을 실어 놓았다.

그러니까, 윗부분이 해당 원문에 대한 해석인 셈이다.

 

그런데 그 해석부분이 원문의 내용을 초과한다. 

예컨대, 2-4 (27)를 보자.

 

<큰 공을 세우고도 거기서 발 뻗지 않고

그 안에 들어앉아 살지 않으시며

결코 사라지지 않는 공로를 떠나지 않는다.

내가 한 일 덕이라고 교만하지 않는다. (A 편의상 구분하기 위하여)

 

하늘같은 분이 땅에 머무시면서

이 모든 것이 다 내것이다 주장하지 않고

있는 것도 없는 듯이 사시고

없는 것도 있는 듯이 사신다 (B)

 

있고 없고를 뛰어 넘으시고

가진 것 못 가진 것에 구애받지 않으시니

도는 늘 스스로 만족하신다

도를 알면 모든 것을 가진다. (C)>

 

그리고 그 밑에 적어 놓은 원문은 이렇다,

 

공성이불거 부유불거 시이불거

功成而弗居, 夫唯弗居, 是以不去.

 

이 부분을 보통의 번역으로 살펴보자.

 

(기세춘)

<공을 이루어도 머물지 않는다. 대저 (현상의 삶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삶을) 떠날 일도 없다.> (99-100)

 

(최진석) <공이 이루어져도 그 이룬 공 위에 자리잡지 않는다.

오로지 그 공 위에 자리잡지 않기 때문에 버림받지 않는다.> (35)

 

따라서 도덕경 중 해당본문에 대한 번역은 이 책에서 번역으로 제시한 A 에 해당한다,

나머지 B C 부분은 원문의 해석이 아니다. 이 해석에 덧붙여 놓은 해설 격이 되겠다.

 

그래서 이 책에서 시도하는 도덕경 해석은 도를 넘는다.

원문 자체를 해석해 놓은 다음에, 저자가 기독교 관점에서 재해석하려 했다면, 해석과는 별도로 그 밑에 주석이나 해설란을 만들어 거기에 저자의 생각을 표시했으면 어땠을까?

그게 도덕경의 원문의 취지를 기독교적 관점으로 살리는 길이 아니었을까?

 

그런 나의 생각은 다음과 같은 곳에서 확연하게 알 수 있다.

 

3-3 (30) 

<언제나 백성들로 하여금 알 것도 없고

탐낼 것도 없도록 하고

헛똑똑이들 장난질 못하게 하면서

지나치게 바라지 않도록 해야 한다. (A)

 

국민을 속여서도 안되지만

터무니 없는 기대를 가지게 해서는

더욱이 나라 다스림이 어렵게 된다

국민은 수걱수걱 자기 일을 하게 한다 (B)

 

진나라 여불위의 여씨춘추는

상업의 발달이 나라 경제를 든든히도 하지만

이윤 때문에 경쟁이 너무 심하게 될까

정치가는 생각해야 한다 했다. (C)>

 

원문은 다음과 같다.

常使民無知無欲, 使夫智者 不敢爲也, 爲無爲, 則無不治.

 

이 부분을 다른 번역으로 살펴보자.

(최진석)

<항상 백성으로 하여금 무지 무욕하게 하고,

저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로 하여금

감히 무엇을 하려고 하지 못하게 한다

무위를 실천하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다.> (51)

 

백보양보해도, 이 책의 번역부분중 C에 거론된 여불위의 여씨춘추는 등장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그 부분은 도덕경의 해석이 아니라, 저자의 보충 해설에 해당된다.

 

그래서 이 책에서 그런 혼란이 생기지 않도록 어떤 구분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해석과 해설, 그것을 구분하는 일. 그것이 독자들로 하여금 혼동을 하지 않고, 도덕경을 제대로 이해하게 하는 방법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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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워블로그 아그네스

    노자의 도는 항상 헷갈리네요.
    제가 지닌 도덕경의 해설자는 도를 기와 유사한 걸로 풀이하더군요.^^

    2016.04.18 13:08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seyoh

      도를 기로 해석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이해가 되는데, 그것을 말씀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것은 지나친 아전인수가 아닌가 해서, 서평에 몇 마디 적어 놓았습니다,
      경전의 해석은 일단 객관적인 해석이 선행되어야 그 후, 그 속에서 다른 교훈을 끌어내도 좋을 듯 한데요~~

      2016.04.18 13:42

PRIDE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