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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찬의 다시 보는 중세  (5) 성화상 논쟁

 

찬란했던 비잔틴 제국에 드리운 그림자

등록 :2016-07-14 20:31수정 :2016-07-14 20:51

 

박승찬의 다시 보는 중세
(5) 성화상 논쟁
성 소피아 성당의 금박 모자이크. 중앙에 있는 성모자에게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콘스탄티노플 도성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성 소피아 성당을 봉헌하고 있다.
성 소피아 성당의 금박 모자이크. 중앙에 있는 성모자에게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콘스탄티노플 도성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성 소피아 성당을 봉헌하고 있다.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성 소피아(Hagia Sophia) 성당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건축물 중 하나다. 중앙 돔의 높이는 55m가 넘고, 직경은 30m가 넘는다. 돔 아래 작은 창문으로는 마법과 같은 빛이 들어와 성당 전체를 가득 채운다. 성당을 장식하고 있는 금빛 모자이크들은 신비스러움마저 자아낸다. 한편 이슬람교 주요 인물들의 이름이 새겨진 8개의 서예 원판은 이와 묘한 대조를 보인다. 이처럼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유물이 뒤섞인 성 소피아 성당은 지난 1500년의 세월을 담은 타임캡슐인 셈이다. 몇 차례 재건 작업이 이루어졌지만 초기 모습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이 놀라운 건축물을 건립한 이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Justinianus I, 481~565)다. 당시 비잔틴 제국은 1만명의 인부를 성당 건축에 동원할 수 있는 재력과 더불어 뛰어난 건축 기술도 소유하고 있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자신 이전의 로마법 전체를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Codex Justinianus)을 통해 더욱 유명해졌다. 그 덕분에 비잔틴 제국은 로마 문화의 계승자가 되었는데, 비잔틴이란 단어는 콘스탄티노플의 옛 이름 비잔티움(Byzantium)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런데 이토록 찬란했던 비잔틴 제국이 왜 급속히 쇠퇴하게 되었을까?

 

비잔틴 제국 민심이반 원인 ‘성화상 논쟁’

 

비잔틴 제국은 서로마 제국의 멸망에 자극받아 군대에 강력한 힘을 실어주었다. 그러나 군대는 기대를 저버린 채, 그 힘을 정권 찬탈에 남용했다. 특히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죽은 뒤 1세기 동안 비잔틴 제국은 극심한 혼란에 시달렸다. 한 장군이 반란을 일으키면, 이에 대한 복수를 빌미로 또 다른 쿠데타가 이어졌다. 이렇게 혼란한 틈을 타 아바르족과 페르시아인이 국경을 자주 침범했으며, 북쪽에서 침입한 슬라브족은 아예 발칸 반도 지역에 정착했다.

 

비잔틴 제국의 정부는 권력 다툼에 몰두한 나머지, 외세 침략에 시달리는 국민들을 전혀 보호하지 않았다. 국민들은 이익만 탐하는 지도자들에게 완전히 등을 돌렸다. 그리하여 7세기에 이슬람 세력이 비잔틴 제국으로 쳐들어왔을 때, 목숨 바쳐 조국을 지키려는 국민들은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비잔틴 제국은 오늘날의 시리아와 터키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영토를 잃고 급격히 쇠퇴했다.

 

비잔틴 제국, 외세 앞 국민 보호 외면
거대 영토 잃고 급격한 쇠퇴 길 걸어

 

“성화상 공경은 우상숭배” 잇단 박해
교회 정치참여 차단 위한 정치적 성격

 

멸망 때까지 옛 영화를 회복 못한 제국
돈·권력 추구 행위야말로 ‘우상숭배’

 

비잔틴 제국의 민심 이반을 더욱 부추긴 사건이 바로 ‘성화상(聖?像) 논쟁’이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우상숭배를 금지한 유대 율법의 영향을 받아서 성상 만드는 일에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6~7세기에 이르자 성화가 교회, 수도원, 카타콤바, 가정집을 장식할 정도로 대중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신자들은 특정 성화들이 치유, 외적의 침입 방지, 이교도의 개종 등 주술적인 힘을 지닌다고 믿었다. 이처럼 성숙하지 못한 성화상 공경을 일부 신학자들이 비판하면서 성화상 논쟁이 시작되었다.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성 소피아 성당.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성 소피아 성당.

 

황제 레오 3세는 아랍인들의 침공을 막아낸 뒤 자신이 그리스도교의 구원자인 동시에 사제(司祭)이자 왕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성화상 공경을 반대하던 이교도들까지 포용한다는 명목하에 성화상 파괴를 명령했다.

 

726년 시작된 ‘성화상 파괴운동’(iconoclasm)은 레오 3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에 의해 더욱 격렬해졌다. 광적인 성화상 반대론자였던 콘스탄티누스 5세는 753년 히에리아(Hieria)에서 338명의 주교를 모아 교회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주교들을 위협하여, 자신의 의도대로 “성화상 공경은 우상숭배”라는 결의를 이끌어냈다. 이를 근거로 성인 유해 공경, 성모 마리아께 기도드리는 행위까지 단죄하고 박해했다. 대다수의 주교들은 이에 굴복한 반면, 수도자들은 순교를 마다하지 않으며 반대했다. 그러자 성화상을 공경하던 백성들은 황제와 주교들을 불신하고, 성화상 파괴정책에 맞서 싸우는 수도자들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그 후 황제가 바뀌며 박해는 약화되었고, 어린 아들의 섭정을 맡은 황후 이레네(Irene)는 전임자들의 성화상 파괴정책을 중지시켰다. 황후 이레네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와 함께 로마 교황과 협상한 뒤,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를 개최했다. 이 공의회에서는 성화상 파괴자 단죄와 성화상 공경 교리가 확정되었다. 이를 위해 ‘흠숭’(欽崇·latreia)은 하느님께만 해당되고 ‘공경’(proskyn?sis)은 피조물에게도 해당된다는 구별법을 활용했다.

 

814년 레오 5세가 황제로 즉위하자 다시 한 번 박해의 광풍이 몰아쳤다. 그는 성화상 파괴주의자들인 군부가 세운 황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해는 오래가지 못하고 레오 5세의 뒤를 이어 황후 테오도라(Theodora)가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섭정을 하면서 막을 내렸다.

 

성화상 논쟁에는 민감한 신학적 주제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정치적 측면이 더 강하게 작용했다. 성화상 파괴운동이 벌어질 당시 비잔틴 제국은 외적에 맞서 전쟁을 치르느라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그래서 황제들은 수도원이 갖고 있던 광대한 토지와 면세권을 빼앗아 자금을 마련하려 했던 것이다. 또한 절대군주를 꿈꾸던 레오 3세는 자신의 권위에 예속되지 않는 수도원의 힘을 약화시킴으로써, 교회의 정치 참여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자 했다. 비잔틴 황제들은 이러한 목적으로 신학적인 논쟁을 이용했다. 성화상 논쟁은 우상숭배 등 교의적인 문제를 떠나, 교회가 전제정치로부터 벗어나려는 투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성화상 파괴운동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로 인한 혼란은 서방 교회와의 관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서방 교회의 로마 교황들은 성화상 파괴 중지 요구와 더불어, 비잔틴 제국 황제가 교의적 문제에 간섭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비잔틴 제국 황제는 교황들을 체포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했고, 남부 이탈리아의 교회 재산도 몰수했다. 이로부터 점점 커진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입장 차이는 후대에 동서방 교회를 분열시키는 계기가 된다.

 

성 소피아 성당에 있는 직경 7.5m의 서예 원판에는 알라, 무함마드, 정통 칼리프들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성 소피아 성당에 있는 직경 7.5m의 서예 원판에는 알라, 무함마드, 정통 칼리프들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박물관’이 되어버린 비잔틴 제국

 

성화상 논쟁으로 인해 비잔틴 제국 황제는 실권을 잃었고,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했다. 그 와중에 11세기 말 대규모 셀주크튀르크족이 비잔틴 제국을 침입하는 일이 벌어졌다. 막아낼 힘이 없었던 황제는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것이 십자군 전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은 보호받기는커녕 1204년 제4차 십자군 전쟁에서는 십자군의 공격 대상으로 전락하여, 치욕적인 약탈을 당하고 말았다. 그 후 비잔틴 제국은 1453년 오스만튀르크의 침입으로 멸망할 때까지 국가의 명맥을 유지하기에 급급할 뿐 예전의 영화는 결코 되찾지 못했다.

 

비잔틴 제국의 수도회 세력(Studiti)은 국가의 부당한 탄압에 맞서면서 단합된 힘과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이 세력은 이후 세속적인 권력뿐만 아니라 인간 이성 전반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따라서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추구한 서방의 스콜라철학과는 달리, 동방 교회에서는 헤시카스트 운동(Hesychasmus)이라는 극단적으로 명상을 추구하는 신비주의적인 경향이 주류를 이루었다.

 

비잔틴 제국은 더 이상 침체된 분위기를 혁신할 계기를 마련하지 못했다. 제국 자체는 천년 넘게 지속되었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6세기에 절정을 이룬 찬란한 문화를 간직한 채 과거에 갇혀버린 셈이다.

 

오늘날 성 소피아 성당이 그리스도교의 대성당도 이슬람의 모스크도 아닌, 박물관이라는 사실 또한 매우 상징적이다. 이 건물은 성상 공경과 성상 파괴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으면서 현대인들에게도 중요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성화상 파괴론자들은 성화상 공경을 우상숭배라고 폄하했다. 그러나 몇몇 비잔틴 황제는 정치적인 욕심 때문에 성화상 파괴 명령을 내렸으니, 이처럼 돈과 권력만을 숭상하는 행위가 오히려 더 우상숭배에 가깝지 않은가. 현대인들 역시 부(富)나 육체적 쾌락을 모든 것에 우선하는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면 우상숭배에 빠진 비잔틴 황제들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박승찬 가톨릭대 철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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