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전체보기
블로그 전체검색

"임나일본부설 추종 학자 일본에도 없다"

입력 2017.07.26. 17:08

 

[한겨레21] 도종환 장관 발언 팩트체크…
학계는 ‘임나일본부는 외교교섭단체’ 관점에서 실체 찾는 중

 

<한겨레21>과 젊은역사학자모임이 ‘진짜고대사’ 연재를 시작합니다. 앞으로 7회, 젊은역사학자모임 연구자들이 사이비 역사가가 사료 오독으로 오염시킨 한국 고대사의 진짜 모습을 드러낼 계획입니다. _편집자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6월1일 수석비서관·보좌관회의에서 “보통 가야사가 경상남도를 중심으로 경북까지 미치는 이런 역사로 생각들 많이 하는데 사실은 더 넓다. 섬진강 주변, 그다음에 또 광양만, 순천만 심지어는 남원 일대 그리고 금강 상류 유역까지도 유적이 남아 있는 넓은 역사”라고 말하며 가야사 연구와 복원을 국정과제로 포함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전북 남원에서 발굴 중인 ‘두락리 가야 고분군’의 모습. 남원시청 제공

 

지난 6월6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지명된 도종환 후보자의 <한겨레> 인터뷰가 역사학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그는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에서 임나를 가야라고 주장했는데, 일본의 연구비 지원으로 이 주장을 쓴 국내 역사학자들 논문이 많”으며, “가야사에서 일본 쪽 주장이 일리 있다는 국내 학자들이 있어서 쟁점이 생긴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도 장관의 발언은 그동안 역사학계를 식민사학이라 매도해온 사이비역사학의 주장과 다를 바 없었다. 역사학계가 도 장관 인사청문회 하루 전인 6월13일, 그를 비롯한 일부 국회의원의 사이비역사학 편향을 우려하는 성명을 발표한 계기였다. 도 장관은 “유사역사 추종자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지만, 그의 발언을 계기로 사이비역사학자 쪽에서 즐겨 사용하는 ‘임나일본부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도 장관의 발언은 사실일까. 학계에서 그간 진행된 임나일본부 연구 성과를 확인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임나일본부설이란 4세기 중엽 왜(일본)가 가야 지역을 정벌해 임나일본부라는 ‘지배기관’을 설치하고 이후 200여 년간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이다. 주장의 근거를 제공하는 기본 사료는 8세기 일본에서 편찬된 사서 <일본서기>이며, 임나일본부설을 학설로 구체화한 인물은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다.

 

스에마쓰 학설은 비판 받고 ‘폐기’ 

 

스에마쓰는 1949년 출간한 <임나흥망사>에서 4세기 이후 200여 년간 일본이 임나(가야)를 직접 지배하고 백제와 신라를 간접 지배했다는 역사상을 만들었다. 그는 ‘광개토대왕비’의 기사, 중국 사료인 <송서> 왜국전의 기록, ‘칠지도’의 명문(銘文) 등을 <일본서기>의 기록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자료로 이용했다. 스에마쓰의 연구는 일본에서 1960년대까지 움직일 수 없는 통설이었다.

그런데 1963년 스에마쓰의 학설은 바다 건너 외국에서 날아온 도전장을 받았다. 도전장을 던진 사람은 공교롭게도 스에마쓰가 경성제국대학에서 교편을 잡던 시절 제자인 북한의 김석형이었다. 김석형은 ‘삼한 삼국의 일본 렬도 내 분국(分國)들에 대하여’란 논문에서 <일본서기>에 기록된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은 모두 한반도의 본국이 아닌 이들 분국을 가리킨다고 주장했다.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한 게 아니라 한국이 일본열도를 지배한 것이라는 정반대의 주장이었다. 임나일본부 또한 기비(吉備·지금의 오카야마 지역)의 가야계 분국에 설치된 기관이라고 했다.

 

그의 주장은 스에마쓰의 연구와 마찬가지로 <일본서기>와 ‘광개토대왕비’ 등의 자료를 토대로 제기됐다. 스에마쓰의 연구를 안이하게 답습하던 일본 역사학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똑같은 자료에서 전혀 다른 결론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김석형의 <일본서기> 해석이 자의적이라 비판하던 일본 역사학자들은 그 비판이 동시에 스에마쓰의 연구에도 적용되는 ‘제 발등 찍기’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김석형의 연구가 제출된 뒤 한·일 역사학자들은 <일본서기> 기록을 이용하려면 좀더 엄밀한 사료 비판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했다. 그 결과는 임나일본부로 기록된 존재의 실체가 “일본이 설치한 지배기관이 아니다”라는 새로운 학설의 등장이었다.

 

천관우는 <일본서기>의 한-일 관계 기록에서 일본으로 된 ‘주어’를 백제로 바꿔 임나일본부는 백제가 가야의 여러 나라를 평정하고 설치한 군사령부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일본서기>에 백제의 군사령부가 임나일본부로 기록된 이유는 백제 멸망 뒤 일본에 와서 살던 백제계 왜인들이 <일본서기> 편찬에 참여했기 때문이라고 봤다.

 

김현구는 천관우의 백제군 사령부설과 같은 관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임나일본부 소속으로 기록된 인물들의 실체 규명에 노력했고 이를 통해 그들이 왜인 계통 백제 관료였다는 결론을 얻었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임나일본부의 실체는 백제가 가야 지역의 백제 직할령을 경영하기 위해 설치한 ‘백제의 지배기관’이었다.

 

1980년대 이후, 가야 지역의 광범위한 발굴 조사에서 가야의 독자성을 입증하는 유물이 확인됐다. 이를 토대로 가야의 독자성 연구도 활발해졌다. 가야사 전공 역사학자들이 가야사의 체계를 정립하면서 그간 가야를 지배 대상으로만 이해해온 한·일 양국의 임나일본부 연구에 ‘새로운 비판’을 할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일본서기>는 일본의 역사서임에도 백제 관련 내용이 대단히 많다. 그것은 <일본서기>에 백제계 사서가 인용돼 있기 때문이다. <일본서기>에는 백제계 사서의 백제 중심 인식과 <일본서기> 편찬 당시의 일본 중심 인식이 중첩돼 있다. 그 결과 <일본서기>에 기록된 가야사는 백제인의 시각과 일본인의 시각에서 이중적으로 굴절된 형태로 나타난다.

 

<일본서기>도 역사적 실체 찾기 위한 ‘사료’ 

 

역사학자들은 굴절된 <일본서기>에서 역사적 실체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이것이 역사 기록의 성격을 분석해 합리적으로 해석하는 ‘사료비판’ 작업이다. 그 결과 <일본서기>에 기록된 임나일본부의 실체를 ‘사신 또는 외교교섭단체’로 보는 연구가 제출됐고, 한·일 양국의 많은 역사학자가 이 관점에서 연구 중이다. 사신을 파견한 주체와 사신의 성격에 대해 한국과 일본 역사학자들 사이에 의견 차이가 여전히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적어도 현시점에서 스에마쓰가 처음 제기한 ‘일본이 설치한 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학설에 동의하는 학자는 한국이나 일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팩트체크’를 토대로 보면, 도종환 장관의 “가야사에서 일본 쪽 주장이 일리 있다는 국내 학자들이 있어서 쟁점이 생”겼다는 발언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에서 임나를 가야라고 주장했는데, 일본의 연구비 지원으로 이 주장을 쓴 국내 역사학자들 논문이 많”다는 도 장관의 발언은 학계의 연구를 오해한 결과다. 이는 사이비역사가들이 학계의 연구 성과를 왜곡한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역사학자들이 임나를 여러 가야 중 한 나라의 이름으로 이해한 것은 임나일본부설과 무관하다. 임나가 가야를 가리키는 말로 볼 수 있는 기록은 <일본서기>뿐만 아니라 한국과 중국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김유신의 후손인 진경대사의 탑비문을 보면 스스로를 ‘임나 왕족의 후손’(김유신은 김해의 금관가야 출신이다)으로 칭한다.

 

또 사이비역사가들은 역사학자들이 <일본서기>를 가야사 연구에 이용하는 자체를 식민사학 추종으로 연결한다. 국내 기록인 <삼국사기>의 사료적 가치가 훨씬 높은데도 이를 무시하고 <일본서기>만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야의 유적은 경상도뿐만 아니라 전라도 동부 섬진강 유역은 물론 금강 상류 유역에서도 발견된다. <일본서기>에는 <삼국사기>에 기록되지 않은 전라도 동부의 가야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일본서기>의 사료적 가치가 <삼국사기>보다 높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적절한 사료비판을 거치면 우리 역사를 알려주는 기록으로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이비역사가들의 역사학계 비판에는 이런 사료비판 과정의 이해가 전무하다.

 

이덕일의 오독이 낳은 오해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우리 안의 식민사관>(왼쪽)에서 김현구 고려대 명예교수(역사교육학)가 일본이 한반도 남부의 가야를 지배했다는 내용의 ‘임나일본부설’을 추종했다고 비판했다. 위가야 제공

 

문제는 사이비역사가들이 역사학자들의 연구 과정과 결론을 왜곡해 친일사학자, 식민사학자로 매도하는 데 있다. 최근 이덕일이 김현구의 연구를 임나일본부설 추종으로 비난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덕일은 그의 책 <우리 안의 식민사관>에서 김현구가 스에마쓰의 임나일본부설을 추종한다고 비난했다. 이덕일은 김현구의 연구가 “①한반도 남부에는 임나일본부가 있었다. ②그런데 임나일본부는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지배한 것이 아니라 백제가 지배했다. ③백제를 지배한 것은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다”로 요약된다고 주장했다. 즉, 스에마쓰의 주장을 비판하는 척하면서도 ‘식민사학’의 결론을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덕일은 그 근거로 김현구의 책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의 다음과 같은 내용을 들었다.

 

“백제와의 교류를 살펴보면, 왕복 39회에 걸쳐 사자를 교환하고 있는데 야마또 정권은 15회에 걸쳐 백제에 사자를 파견하거나 군사원조를 제공한 반면 백제는 24회에 걸쳐 야마또 정권에 선진문물을 제공하거나 사자를 파견하고 있다. 중국과는 전혀 교류가 없었다. 따라서 야마또 정권과 백제의 관계는 임나나 고구려·신라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긴밀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이 내용 어디에도 백제와 일본의 상하관계를 짐작하게 하는 부분은 없다. 이덕일은 김현구가 <일본서기>의 기록만을 근거로 백제가 일본에 자주 조공을 바쳤다고 적었으므로 ‘김현구는 백제를 일본의 속국으로 여겼다’고 단정한다. 김현구의 마음을 넘겨짚은 것이다. 그런데 김현구가 <일본서기>의 기록을 이용한 이유는 스에마쓰가 <일본서기>에 근거해 일본의 임나 지배를 주장했지만 바로 <일본서기>의 내용 분석을 통해서도 그의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데 있었다. 이는 김현구의 책을 읽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김현구는 백제와 일본의 관계에 대해서도 ‘우호관계’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임나 문제에 대해서도 야마또 정권이 직접 임나와 관계를 맺은 흔적은 거의 없고 오히려 백제를 도와주는 입장에 있었던 것으로 씌어 있다.”

 

김현구가 백제와 일본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명백하다. 하지만 이 부분은 이덕일의 책에는 나오지 않는다.

 

‘비주류’와 ‘사이비 역사학’의 차이점 

 

지난 6월14일 도종환 장관의 인사청문회에서 유성엽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장은 ‘주류’ 강단사학과 ‘비주류’ 사학 간의 균형을 맞춰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변했다. 맞는 말이다. 학문 영역에서 비주류라고 배척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단 그것이 학문 영역에 들어와 있을 때의 이야기다. 적혀 있지도 않은 속내를 짐작해서 적은 것과는 정반대로 결론을 호도하고 또 왜곡하는 관심법은 학문 영역이 아니다. 이덕일을 위시한 이들의 행태를 비주류가 아닌 사이비역사학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위가야 젊은역사학자모임 연구자

 

 
취소

댓글쓰기

저장
덧글 작성
0/1,000

댓글 수 0

댓글쓰기
첫 댓글을 작성해주세요.

PRID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