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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페미니스트

[도서] 두 번째 페미니스트

서한영교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표지가 지나치게 단순하고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잘 봐준다 하더라도 하트를 느낌표나 물음표처럼 묘하게 비틀어놓은 듯했다. 책을 다 읽은 후에는 또다른 집사람이 잘 구분할 수 있도록 강렬한 대비를 의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한 해석일지라도 틀리지 않게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는 눈이 보이지 않기 시작하는 '애인'과 같이 '살기' 시작했고 아이를 낳았다. 둘 모두 집사람으로서 살림을 했고 생명을 길렀다. 그 시간들을 글로 적었지만 저자는 스스로를 '두 번째 페미니스트'라 말한다. 여성들이 겪는 일상적 차별과 폭력을 온전히 겪을 수 없는 남성이라서다.

 

저자는 문단에서의 한 사건 이후 남성으로 살아왔던 세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자신이 그 이상한 세계에서 너무도 편히 지냈다는 사실이 불편했고, 여성들은 그 세계 속에서 계속 상해가고 있는데 남성인 자신은 아무렇지 않다는 것이 이상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자신의 미세한 언어들을 점검했으며, 여성들과 두루두루 우정을 나누며 자신의 세계를 몇 번씩 반복해 뒤집어나갔다고 했다. 자신이 잠재적 가해자이자 직접적인 성차별의 수혜자의 위치에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페미니즘 공부를 통해 '나에게 부과된 남성, 학생, 노동자 같은 사회적 이름에 대한 이해가 곧 나에 대한 이해와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저자의 고백은 두 가지 측면을 생각하게 한다. 개인의 정체성은 그를 둘러싼 사회적 배경과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 여성 혐오가 기본으로 깔린 세상에서 서로 평등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발버둥쳐야 한다는 것. 공부를 했다고 하면서도 남성으로서 내 여자를 지켜야(=단속해야) 한다는 몹쓸 가부장적 무의식이 있었다고 하니,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야 오죽할까 싶다.

 

그는 10년 간 만나고 헤어졌던 '미인'과 '연인'의 관계를 맺었고 '애인'으로 정착시켰다. '위대한 사랑은 그 자신이 사랑할 자까지 창조한다'는 니체의 문장을 정확하게 이해할 만큼 연인을 통해서 구원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스스로를 극복하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면서 '혼인'을 했다. 다시는 입지 않을 웨딩드레스 대신 관 속에 누울 때도 입을 수 있는 '기억의 옷'을 입은 채로, 감정의 질서를 넘어선 존재의 결단이었다. 남성-공적 영역/여성-사적 영역으로 성 역할을 분배하는 공간 배치를 거부하고 서로를 '집사람'이라 불렀다. 집을 근거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 집을 길들일 줄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합리적으로 예측된 확률보다 불확실한 우연을 맞이하는 사랑의 기적'은 아이를 품고 세상에 내보내는 일로 이어졌다. 말도 어찌나 아름다운지 자장가를 두고 '삶에 숨어 있는 영원한 BGM'을 준비했다고 했다. 그런데 부모 역할을 준비하면서 사회의 이상한 기준과 비난을 새로이 맞닥뜨리게 되었다고 했다. 아이에 대한 합리적 관리(행복, 건강, 경쟁력)를 하는 것이 마땅히 부모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하면서도 그것을 정확하게 잘 수행하려는 사람들에게 헬리콥터맘, 몬스터 패런츠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육아와 가사노동은 엄마들에게 모조리 맡겨놓고 그런 엄마들에게 맘충이라고 하는 것을 가증스럽게 느꼈다. 저자는 말한다. '부모 노릇을 점점 어렵게 만들어 과도하게 안전/질병/실패에 대한 불안을 가중시키는 사회 자체에 오히려 헬리콥터 사회, 몬스터 사회라고 이름 붙여야 하지 않나. 그리고 이런 몹쓸 이름들은 왜 꼭 여성들에게만 붙나(p.62).'

가사노동과 정서노동을 분담한 만큼 출산도 함께 준비했다. 그러나 육아 경험담을 검색하더라도 자기 키워드 밖의 정보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어서 부분적이고 파편적이었다고 했다. '정보의 바다가 아니라 각자의 바다만 있었다(p.97).' 전문과와 의사의 소견에 모든 결정을 맡기지 않고 차라리 주변의 조언과 오래된 지혜에 귀를 기울였다. 스승과 동료와 지지 집단을 만들었다. '이렇게 곁이 두꺼울수록 크게 넘어지지 않고 지나치게 당황하지 않을 수 있다. 곁의 두께를 충분히 확보하면 무엇을 하건 안정감이 든다(p.77-78).' 적어도 100일은 충분히 애인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육아휴직을 신청했다. 회사는 그의 요청에 퇴사라는 답변을 돌려주었다. 그렇게 시작된 남성 주부의 본격적인 돌봄.                      

 

'수술실에 들어간 당신을 기다리며 벼락 모양으로 혼자 병실에 앉아 남편이라는 이름으로는 죄짓지 않겠다고 다짐'한 저자는 수술을 마친 애인에게 '괜찮아?'라고 말하려다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고 했다. 아이를 마주하면서 생각으로는 도저히 가닿을 수 없는 질감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자주 깨닫게 되었고, 그 돌봄의 세계감을 통해 함부로 취급되고 있는 생물들의 비명 소리를 듣게 되었다고 했다. 사사로운 문제가 발생하면서 서로에 대해 여유가 없어졌음을 감지하기도 했고, '그 여유라는 것은 상대방을 헤아리고 있을 때에나 나오는 것이어서 이는 곧 서로를 보살피고 있지 못하다는 말과도 같았다'는 것을 직면하기도 했다. 난관을 헤쳐나가기 위해 집사람 회의를 열게 된 계기였다.                     

 

구체적인 돌봄을 몸으로 살아내면서 1만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는 인류의 모국어 '밥 먹자'를 생각했고, '어머니의 수고만으로 차려지는 집밥을 이제 그리워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돌봄은 돌아보는 것이고, 보는 것이고, 돌아버리는 것임을 경험했다. '발바닥의 세계를 혓바닥으로 탐구'하는 아기와 함께 4대문(현관문, 창문, 베란다 문, 냉장고 문) 안에 갇혀서 퇴화되는 기분을 느꼈고, 아이를 그리워하고 싶어했다. 아이와 전혀 분리되지 못했으므로 '아이를 그리워하고 싶다'고 쓴 부분에서는 지난 시간이 떠올라 울컥했다. 육아가 삶의 한계를 다루는 기예임을 요가를 하면서 깨달았고, 육아는 나를 위하지 않고 나의 이름을 지우며 나로 수렴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그리고 저자는 고백한다. '시를 쓰는 대신 시를 살고 있음을 처음으로 알았다.'

이 모든 과정을 아름답게만 포장하고 싶지 않다. 서로 사랑하고 함께 살아내는 모습이 아름다웠던 것이지, 한 사람의 희생이 담보로 되는 돌봄은 거부하고 싶다.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같이 성장하고 싶어서다. 한편 최근의 소설과 에세이에서 날카로워진 말과 행동을 '마음이 뾰족해졌다'고 표현하는 경우를 많이 봤고 식상하게 느껴졌는데, 이 책에서 모서리에 대해 공감되는 문장을 만나 반가웠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애인은 나를 격렬히 앓고 있는 중이었다. 왜 나는 항상 누군가 찔려 고통에 신음하고 있을 때가 되어서야 나를 알아차리는 걸까. 내 모서리는 왜 항상 뾰족하기만 한 것인지. 달라져야 했다.' 투명하게 자기를 되돌아보는 태도, 자기를 박박 긁어낸 시간들 때문에 가능한 문장이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 글을 써준 두 번째 페미니스트에게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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