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블로그 전체검색
참 괜찮은 눈이 온다

[eBook] 참 괜찮은 눈이 온다

한지혜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우리 가족이 살았던 마지막 집 뒤쪽으로는 기차가 지나갔다. 드라마를 보고 있을 때 정말 중요한 대사가 나올 때 기차는 지나갔다. 잠깐 배우의 입모양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기차가 지나가는 순간은 세계가 일시 정지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옥상에 올라가면 기차를 볼 수 있었다. 서울에서 출발한 기차는 드문드문 불빛을 안고 종착역인 이곳으로 달려왔다. 철제 대문을 밀면 왼쪽으로는 주인이 사는 커다란 기와집이 있고 오른쪽은 다른 세입자가 사는 집이 있었다. 중앙으로 걸어가면 작고 단단한 양옥집이 우리 집이었다. 아직 연탄을 넣어서 쓰는 그 집에서 우리는 일 년도 채 못 살았다.

엄마가 떠나고 연탄을 갈지 못해 냉방이 된 새벽에 눈을 뜨고 한참을 누워 있었다. 부엌에서 세탁기를 돌리는 소리 도마에 칼질을 하는 소리들이 그리웠다. 그런 소리들이 들리고 나면 엄마가 일어나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방바닥의 온기와 소리가 없는 아침은 서러웠다. 늦게까지 골목에서 놀고 있어도 저녁 먹으라고 부르는 엄마의 외침이 없는 겨울을 지나 봄이 왔다. 나중에야 들었는데 그 집의 보증금이 600만 원이었단다. 엄마가 집을 나가고 아빠는 주인집에 가서 월세로 돌리겠다면서 그 돈을 빼서 전부 써 버렸단다. 잠깐 화해를 했던 건가 엄마가 돌아오기도 했는데 다시 떠나버렸다.

어떤 기억은 시간이라는 망각의 힘을 빌려 추억이 된다고도 하는데 내겐 그 집에 살았던 기억은 결코 추억이 되지 못했다. 그리움조차도. 어느 날 학교에 갔는데 똑같은 옷만 입고 온다며 놀리고 엄마 없는 애라고 애들이 놀아주지 않던 기억을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까. 수학여행비가 없다고 하자 아빠는 자신의 친구 집에 가보라고 했다. 밤이 되도록 기다렸는데 결국은 받지 못했다. 유년을 지배했던 기억의 배경에는 허름한 옷을 입은 가난이라는 아이와 함께였다. 동생이 간식을 받았다고 빵을 주었는데 좀 더 달라고 하자 자신도 배가 고프다고 했던 찰나의 기억.

한지혜의 산문집 『참 괜찮은 눈이 온다』를 읽으며 기찻길과 연탄, 보증금 600만 원, 동생의 울먹거림, 엄마가 떠올랐다. 시간이라는 힘에 밀려 과거가 아닌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또다시 가을이고 나는 지나간 것들을 환기해 보는 것으로 책장을 넘긴다. 집이 아닌 방에서 방으로 이동한 아이는 책을 읽으며 문학이라는 희망을 가진다. 소설가 한지혜는 자신의 유년을 꺼내 보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여섯 식구가 살던 곳은 집이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한 곳이었다. 이사를 가자고 해서 가보면 그곳은 대문이 없는 비탈 위에 간신히 세워진 방이었다. 그 방에서 아이는 책을 읽는다.

아이어도 안다. 아이니까 더 잘 민감하게 느낀다. 자신의 집이 다른 집과는 다르다는 것을. 원하는 건 다 가질 수 없으며 무언갈 사달라고 조르는 것을 이제는 멈춰야 한다는 걸. 「숨어 있기 좋은 책」으로 『참 괜찮은 눈이 온다』는 시작한다. 현실과 동화는 다를 것이라고 믿었던 아이는 책으로써 자신만의 환상을 부풀린다. 책 많이 읽는 아이라는 뿌듯함을 가난한 부모는 대견해했다. 없는 형편에도 아빠는 책을 한 권씩 사 오고 동네 아주머니들 있는대서 보란 듯이 월부 책 장사한테 책을 주문해주는 엄마. 그들이 있어서 아이는 낭만을 꿈꾼다. 동화의 세계는 이곳과 다른 것을 꿈꾸게 했다. 『못나도 울 엄마』를 읽기 전까지는 그랬다.

눈을 뜨면 날마다 새로운 날이지만 실상 삶의 관성은 어제를 포함한 기억 속에 있다. 살아봤던 시간의 습관으로 살아보지 않은 시간을 더듬어 가는 것, 현실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과거인 그런 게 삶이라는 생각도 든다.
(한지혜, 『참 괜찮은 눈이 온다』中에서)

꿈을 꾸고 싶어서 책을 읽었지만 그 안에서 마주한 건 허구 역시 현실에 기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날카로운 진실이었다. 아이는 이제 다른 의미로 책을 읽고 세상의 비의를 알아간다. 자신이 상상한 다락방이 아닌 곳으로의 이사. 대문이 없는 집에 사는 것이 부끄러워 선생님이 데려다준다고 해도 한사코 거절. 신춘문예에 당선이 돼 놓고도 상금을 혼자 쓰고 싶어서 가족을 시상식에 초대하지 않은 놀랍고도 솔직한 일화. 기혼 여성 소설가로서 '아이는 어쩌고?'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구하기. 아빠가 쓰러지고 이 년 동안 병간호를 하며 경험해야 했던 절망의 시간.

『참 괜찮은 눈이 온다』에는 꺼내 보이고 싶지 않던 순간을 기꺼이 내 보이며 삶이 주는 고통에 당신이 굴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응원이 담겨 있다. 글이라는 게 참 좋은 게 부끄럽고 한심했던 과거의 이야기도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쓰는 순간을 거치면 그럼에도 빛나는 기억으로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날이라고 생각하며 어제를 지운 듯이 살아갔다. 세련되어 보이고 싶은 마음에 허세를 부리며 내가 아닌 척 꾸며 보았지만 과거는 악착같이 나를 따라왔다. 한지혜는 자신이 살았던 골목의 기억을 들려주는 것으로 과거를 부정하며 살아간 나의 시간을 되돌려 놓았다.

이 책을 읽고서 나는 주어진 현재를 사랑하고 과거를 긍정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너를 이해한다는 충고가 아닌 네가 살아온 과거는 절대 부끄럽고 나약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아주는 포옹을 선물 받았다. 이리 와, 힘껏 껴안아 주는 것으로 생이 가져다준 불안과 미움, 어리석음을 외면하지 않고 바로 볼 수 있었다. 한지혜는 엄마가 미웠다고 썼다. '너무 미워해서 후회할 염치도 없을 만큼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싸웠'다고. 그다음 문장은 이것이다. '그랬더니 남는 게 후회가 아니라 두려움이다.'

나와 동생을 두고 한 번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엄마. 다시 돌아왔지만 끝내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어 다시 떠난 엄마. 이제는 돌아올 수도 없이 떠난 엄마. 『참 괜찮은 눈이 온다』에서 내가 그토록 쓰고 싶었던 문장인 엄마가 미웠다를 읽으며 오늘은 '엄마 그때 화내고 성질내서 미안해요'를 연필로 꾹꾹 눌러 써본다. 미움의 다른 이름은 미안해라는 것을 겨우 깨닫는다. 눈이 드문 남쪽 나라에 사는 나는 습관처럼 찾아온 아침을 맞이한다. 창가에 비스듬히 꽂힌 햇빛 한 줌은 괜찮아, 괜찮아라고 속삭이는 것 같아서 웃어 본다. 『참 괜찮은 눈이 온다』는 삶과 불화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소중한 책이다. 



 
취소

댓글쓰기

저장
덧글 작성
0/1,000

댓글 수 2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시골아낙

    보스님의 리뷰는 슬픈데 보석같아요

    2019.10.30 19:25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돼쥐보스

      못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2019.10.31 12:56

PRID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