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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은 흐른다

[eBook] 압록강은 흐른다

이미륵 저/이옥용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마스크를 쓰고 지낸지 6개월이 넘었다. 처음에는 낙관적이었다. 방역 수칙을 잘 지키고 서로를 위해 조심하는 마음을 가지면 코로나19가 빨리 물러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뉴스의 보도를 보면서 이제는 장기화를 준비해야 함을 느낀다. 코로나19의 종식을 바라며 초조해 하기보다 일상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힘을 길러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조급해하지 않고 차분한 시간 안에서 삶의 조각을 만들어 가야지 다짐한다.


어느 시대나 힘들지 않은 때가 있었을까. 대한민국의 역사는 고통과 극복의 시간을 반복한다. '나'가 아닌 '우리'의 시대로 눈을 돌리면 지금 겪는 어려움의 강도가 조금씩 약해진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시간 안에서도 꽃은 피고 어린아이들은 글자를 배우고 강가에 가서 수영을 하는 하루가 있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는다. 성적을 잘 받기 위해 역사 책에 나오는 연보를 외웠다.


아무 감정과 의미를 나누지 않고 연대기를 외워 나갔다. 침략이 있고 전쟁이 있었다. 승리를 하고 패배를 하는 과거의 시간. 고유 명사로 기록되는 인물의 업적을 외우고 다음 중 틀리거나 맞는 사실을 고르고는 끝이었다. 점수가 잘 나오는 것으로 그 순간의 값어치가 메겨질 뿐이었다. 의견이 없는 어른으로 순식간에 자라났다. 부당함과 불의를 목격하면서 책을 읽는 것으로 나를 지켜갈 수 있었다.


허구가 아닌 사실이 필요했다. 신문물을 서둘러 받아들이고 개화를 시작한 일본은 바로 옆 조선을 침략해 들어왔다. 무리하게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고 조선 정부로 하여금 강제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했다. 조선은 정신이 없었다. 쇄국 정책으로 일관한 흥선 대원군은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으나 변화의 바람은 거셌다. 여기저기서 개화를 외치고 있었다.


일본은 교묘한 술수로 조선을 점령해 나갔다. 러시아에 협조적인 명성 황후를 시해했다. 고종은 급기야 아관으로 파천해 갔다. 개혁을 이유로 다시 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스스로를 황제로 칭하고 대한 제국으로 국호를 바꿨다. 교과서와 역사 책에서 배운 연대기의 역사. 당시 사람들이 느꼈을 혼란과 두려움을 짐작하기에는 빈약했다. 나라가 이토록 어지러운 때에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며 살았을까.


조선이 아닌 대한 제국으로 바뀌고 나서 이년 뒤에 황해도 해주에서는 이의경이 태어난다. 대지주의 막내아들로 위로는 누나가 셋이었다. 어머니가 늦은 나이에 대원 어머니의 기도와 미륵불에 치성을 드린 후에 태어났다며 이미륵으로 불리기도 한 남자아이. 미륵은 훗날 3.1운동의 주동자로 몰려 머나먼 타국인 독일로 망명을 떠난다. 한국어가 아닌 독일어로 쓰인 자전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의 시작은 사촌 형인 수암의 기억으로 시작한다.


숨이 차고 얼굴에 뾰루지가 난다, 마스크를 쓰고 생활하면. 레벨 D 방호복을 입고 종일 환자를 돌보는 의료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 정도는. 사소한 짜증과 알 수 없는 이유로 불안을 느껴도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에 무척이나 긴 기쁨과 고마움을 느낀다. 나라를 빼앗기고 우리말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 아니다. 침착한 마음으로 타인을 미워하지 않는 관용으로 살아갈 수 있다.


이런 마음을 먹기까지 나보다 먼저 어렵고 고통으로 얼룩진 역사의 한복판을 살아간 누군가의 글을 읽었기에 가능했다.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는 과연 버틸 수 있을까, 포기하면 편할 텐데 하는 순간에 찾아온 희망의 책이었다. 나라를 잃어버린 채 압록강을 건너고 기차를 타고 유럽으로 건너간 청년. 독일어로 쓰인 『압록강은 흐른다』는 전혜린에 의해 다시 한국어로 번역되었고 한참의 시간이 강물처럼 흐르고 흘러 2020년에 닿았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시절에.


전염병은 사람들을 흩어지게 만들었다.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일이 따가운 눈초리를 받는다. 가족과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여행지에 들러 사진을 찍는 일이 어렵고 무서운 일이 된다. 함께 가 아닌 각자의 시간으로 버티고 있다. 전염병을 주제로 한 소설과 영화에서는 인간은 쉽게 이기와 배타적으로 바뀐다. 현실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연대는 사라진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자란다.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어린 아기의 입에 마스크가 쓰여 있는 모습을 보면 짠하다. 그래도 아이는 말간 눈을 깜빡이며 세상을 향한 호기심을 감추지 않는다. 학교와 유치원에 가지 못한 아이들은 마스크를 쓰고 놀이터에서 논다. 돌고래 웃음소리를 마구 피어 올리며. 나라의 주인이 뒤바뀌리라는 흉흉한 소식이 들려옴에도 미륵의 유년은 아름다웠다.


비슷한 또래의 사촌 형 수암과 아버지 밑에서 글자 공부를 하고 잠자리채를 만들어 놀았다. 몰래 아버지 방에 들어가 서랍을 뒤지기도 했다. 장난으로 그랬지만 결과는 무서웠다. 수암 형은 서랍 안에 있던 위험한 알약을 먹어 죽을 뻔하기도 했다. 용케 살아났고 훈장 님을 모시고 제대로 된 글공부를 했다. 미륵은 총명한 아이였다. 책 읽는 것을 좋아했고 누나에게 이야기를 듣기를 청했다.


신식 학교가 들어섰고 미륵은 인생의 조언자이기도 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입학을 했다. 다정한 친구를 만나 공부에 도움을 받고 차근차근히 새로운 학문에 열을 올린다. 학교가 끝나면 아버지와 긴 대화를 나눴다. 아버지는 자상했다. 미륵이 학교에서 무얼 배우는지 궁금해하며 아들과 시간을 보냈다. 미륵은 공부를 하면서 조선이 아닌 더 넓은 세계가 있음에 감격해 했다.


책으로만 보고 이야기로만 들었던 유럽이라는 곳. 미륵은 두렵지만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미륵의 유년은 신학문을 배우고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별 탈 없이 흘러갈 수 있을 줄 알았다. 몸이 약해진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슬픔이 찾아온다. 그 즈음 일본이 무력으로 조선을 강제로 침략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일본인이 미륵의 집에 와 수색을 하고 두려움의 시간이 펼쳐진다.


어머니는 공부에 지친 외아들 미륵을 한적한 시골 마을인 송림 마을로 보낸다. 따분한 생활이 이어지고 미륵은 충동적으로 기차를 타고 북쪽 국경을 넘어가고 싶다는 열망에 휩싸인다. 잠깐의 가출을 하고 다시 마을로 돌아온다. 이때 미륵은 준비와 계획을 가지고 국경을 넘어 유럽으로 가고자 하는 꿈을 꾼다. 『압록강은 흐른다』의 배경은 정확히 일제 강점기이다. 역사 책으로만 배웠던 시대. 나라의 주인이 바뀌고 우리말이 금지되고 이름조차 우리 식으로 지을 수 없었던 시대.


『압록강은 흐른다』는 역설적이게도 아름다운 서정을 유지한다. 머나먼 타국인 독일에서 미륵은 꽤나 고향을 그리워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눈을 감으면 수암 형과 뛰어놀고 공부를 하던 시골집이 그려지자 미륵은 펜을 든다. 다시는 잊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그러지 않고서야 이토록 정겨운 풍경의 유년을 세세하게 그려낼 수 있단 말인가. 명절이 계속되는 동안 서당에 가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에 인생의 즐거움을 느끼는 미륵.


모국어가 아닌 독일어로 유년을 추억하는 『압록강은 흐른다』는 저 유명한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의 성장 소설에 비견될 정도로 깊이가 있다. 일제의 감시 때문에 돌아갈 수 없는 조국. 그곳에 남겨 두고 온 가족에 대한 애틋함이 그로 하여금 절절한 시절을 복기하게 한다.


송림 마을에 어머니가 찾아오고 미륵에게 다시 공부할 것을 권유한다. 영리한 미륵은 독학을 한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친구들에게 도움을 받는다. 의학 전문학교를 목표로 열성을 다하고 시험에 합격한다. 서울로 유학을 떠나고 의전에서 화학, 생리학, 해부학, 독일어 등을 배운다. 친구 익원과 밤을 지새우며 공부를 한다. 미륵의 인생에 결전의 시간이 다가온다.


3.1운동에 참가해 시위 전단을 나눠주는 일을 한 것이다. 일제는 폭력적으로 시위를 진압했고 미륵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어머니는 미륵이 도망을 가야 한다고 말한다. 채비를 하고 미륵은 압록강을 건너 기차를 타고 독일에 당도한다. 여권을 받기까지의 기다림의 시간이 길었을 뿐 미륵은 무사히 망명에 성공한다. 『압록강은 흐른다』를 지배하는 차분한 어조는 엄혹한 시대적 배경임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안정감을 준다.


고통을 과장하거나 비애를 강조하지 않는다. 이미륵의 연보를 살펴보면 그는 끊임없이 공부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좋은 직업을 가져 큰돈을 벌 수 있는 배움이 아닌 자신이 원하고 필요한 공부를 한다. 소설에는 생략이 되어 있지만 그는 유럽으로 가기 전까지 상하이 임시 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한다. 대지주의 막내아들이라는 탄탄한 배경이 있었지만 자신의 안위에 연연하지 않는다.


하루빨리 조국의 독립이 오기를 바랐다. 『압록강은 흐른다』를 읽으면 느낄 수 있는 낭만은 시대를 불문하고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추억 때문이다. 사물을 분간하고 세상과의 교감이 이루어지는 태초의 기억을 가지고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부모 형제와 함께 한 시간. 모르는 것이 있으면 알려주고 사랑의 손길로 나를 어루만져 주던 기억. 타인으로부터 받았던 대가 없는 선의와 친절이 회상의 순간에 자리 잡고 있다.


거대한 역사의 줄기 안에서도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고 살아간다. 서로를 향한 사랑을 주고받는다. 시련으로 가득한 역사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폭력과 무자비의 시간 안에서도 친구의 공부를 도와주고 지주의 가족과 소작인의 가족을 일가친척이라고 생각한다. 신분의 구별 없이 동네 아이들을 모아 공부를 배우게 한다.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의지로 힘들게 들어간 학교의 공부를 주저 없이 포기한다.


독립운동사를 배우면 가슴이 뜨거워진다. 그들에게도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 이루고 싶은 개인의 꿈이 있었다. 가족을 지키고 싶었다. 그 모든 것을 놓아둔 채 오로지 빼앗긴 조국의 해방이라는 이념 하에 자신을 희생한다. 척박한 땅으로 강제로 쫓겨 가면서도 놓지 않은 해방의 꿈. 그들의 눈물과 투신이 있었기에 지금의 나는 우리말로 이런 글을 쓴다.


본명 이의경. 필명이자 아명 이미륵. 끝내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타국에서 숨을 거둔 한 남자를 애도한다. 다감한 말투를 쓰고 겸손과 예의로 주변인을 대하는 사람. 그가 그런지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압록강은 흐른다』에 쓰인 표현들. 남의 허물이 아닌 좋은 면을 보려고 노력했던 부분. 어려움을 느껴도 공부를 포기하지 않는 집념의 기록을 보면 눈치챌 수 있다.


2020년은 어떻게 기록될까. 코로나19라는 무시무시한 전파력을 가진 전염병으로 전 세계가 고통받았다고 쓰인다. 매일 확진자 수를 확인하고 외출보다는 거리 두기를 통한 집에서의 활동이 늘어났고. 마스크 쓰기가 의무화되었고 매일 학교를 가는 게 낯선 일이 되었다고도. 역사는 이런 사실을 종합적으로 나열해 놓을 테지만 쓰이지 않을 여분의 역사가 더 중요해진다.


미륵이 그랬던 것처럼 압록강을 건너 중국과 유럽을 가지 못하는 약간은 이해하지 못할 2020년. 독립을 했지만 이념의 대립으로 어쩌다 같은 민족끼리 총칼을 겨눴고 분단이 되었다. 이별의 시간을 살아가면서도 평화와 화해를 기원하는 우리들이 있다. 미움과 불신의 시간을 넘어 곧이어 하나 됨을 염원하는 우리들이 있다. 손 소독제를 챙겨 바르고 마스크를 쓰고 학교에 가는 아이들이 있다.


구구단을 외우고 고조선과 단군왕검으로 이루어진 우리 역사의 시작을 배우는 아이들이 있다. 비록 마스크에 가려 얼굴 전체를 보진 못하지만 반짝이는 눈을 보며 내일을 맞이하기 위해 희망을 연습한다. 100여 년 전에 미륵이 그랬던 것처럼 불투명한 미래를 두려워하기보다 주어진 오늘을 묵묵하게 받아들인다. 이겨낼 수 있다는 최선의 용기를 나누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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