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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6

집은 스스로의 세계다.

오직 자신의 힘으로 조용히 내일의 각오를 다진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희망할 때 

그 시작점은 언제나 집이었다.

p39

...해가 저문 시각의 집은 누구든 원할 때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는 장소와 다름없음을. 어쩌면 '자기의 방'이 될 수도 있었을 공간은 두 사람분의 옷과 책, 온갖 잡동사니를 보관하는 것 외에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오직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순간이라곤 화장실로 들어가 빈 벽을 마주하거나, 이불 안으로 조용히 몸을 파묻을 때뿐이다.

 나는 섣불리 절망하는 대신 상상력을 발휘하기로 했다. 철저하게 이기적인 나만의 일을 계속하기 위해 남편의 코골이 또한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를 마쳤다. 그러기 위해선 약간의 눈속임이 필요했다. 취향의 물건으로 파티션을 치고, 화분으로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긋는 일. 작은 리추얼 역시 느슨한 상상의 세계를 견고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됐다.

p42

집은 스스로의 세계다. 스스로 밥을 지어 먹으며 체력을 비축하고,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나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정리 정돈에 심혈을 기울인다. 오직 자신의 힘으로 조용히 내일의 각오를 다진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희망할 때 그 시작점은 어제나 집이었다.

 빈 종이 위에 집이라는 단어를 크게 써본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자연히 떠오른다. 오늘 하루를 고요히 응시할 수 있는 잠시간의 여백과 허무맹랑한 꿈, 약간의 백색소음 그리고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비밀 같은 것들이. 어느 책상에 앉아 그 비밀을 정성스럽게 써나가는 나의 뒷모습을 상상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p48

 당연한 것들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이미 가진 것을 내버려두지 않고 지켜내려고 애쓰는 동시에, 잊어야 할 것은 포기하고 내버릴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사람과 사랑, 추억, 성취를 비롯해 집 또한 그런 존재 같다.

 의미없는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마음이 가장 드라마틱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ㅇ ㅗ늘도 나의 집에서 나만의 오늘을 산다. 계속 반복되는 하루이기를. 별일 없이, 아픔 없이, 흔들림 없이. 매일매일 같은 각오로 살 수 있기를.

p51

 ...하루의 중간을 잠시 잘라 생각도 함께 끊어낸다. 그러나 너무 깊지 않게, 길지 않게.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 잠시 전원을 끄고 잠이 든다. 하루를 두 번 사는 기분으로, 혹은 지친 삶을 잠시 멈추듯.

p52

...갑작스러운 변화나 운명처럼 찾아온 기회 같은 것은 없었다. 고시원에서 시작해 반지하, 옥탑방을 거쳐 조금씩 쾌적해진 것처럼 내 삶도 아주 천천히, 완만한 그래프를 그리며 나아졌다. 가끔 집을 둘러보면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신기하다. 이 모든 게 온전히 나 스스로 채우고 지켄 것이라니. 나 참 기특하다. 열심히도 살았네.

 혼자 일하고 혼자 사는 사람은 매일매일을 쪼개어 살아야 한다. 자신만의 규칙과 방식을 정해놓지 않으면 쉽게 무너진다. 잘하고 있는지 판단할 길이 없어 자주 흔들리고, 매달 지불해야 할 돈에 비해 부족한 수입을 마주할 때마다 불안함에 떤다. 앞으로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을 것 같은 공허함을 느끼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를 쓴다. 나의 정체성은 여전히 모르겠다. 인간 자체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은 접어두고 직업만으로 나를 나타내기에도 '그림을 그리는''글을 쓰는'사람, '작가'라는 소개...그 무엇도 명확히 나를 지칭하기에는 과하거나 부족한 표현 같다. 하지만 무엇이든 어떠랴, 꾸준히 지속하다 보면 뭐라도 되겠지. 아무것도 아니면 또 어떤가, 뭐든 하고 있음이 분명한데.

1. 마감 일정은 반드시 지킬 것.

2.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최대한 맞추는 동시에 '내 결과물'의 만족도를 유지할 것.

3. 집과 복장의 청결, 식사는 꼭 챙길 것.

4. 피곤해도 작업 책상과 일정 계획을 꼭 정리하고 하루 업무를 끝낼 것.

5. 어떻게든 최선을 다할 것.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믿고, 나는 그저 나의 최선을 행하려 한다.

 간혹, 정말 '돈을 벌기 위해서'하는 일들도 있다. 언제나 흥미롭고 멋진 일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돈 때문에 아무 관심도 없는 것을 무념무상 그리면서 문득 '내가 지금 뭘 그리고 있는 건가?'싶은 순간이 오기도 한다. 그럴 때는 이렇게 되뇐다. '이건 노동이다, 나는 창작자이기도 하지만 노동자다. 정당한 대가를 받고 정확한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한다.'모든 걸 충족할 수는 없다. 삶은 보통 그렇게 동전의 양면처럼 좋은 것과 싫은 것이 공존하고, 행복과 불행이 번갈아들며 나를 시험한다.

 ...그런 식으로 일의 틈새에 생활을 끼워 넣는다. 환경을 쾌적하게 유지하는 데도 좋지만, 정신적인 환기와 몸의 리프레시에도 꽤 도움이 된다. 인간관계에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듯, 나의 일상에도 적당한 리듬을 줘야 한다.

  또한 물을 자주 마시고, 영양제를 챙겨 먹고, 군것질을 한다. 휴식처인 집을 직장으로 두었기에, 출근 시간도 퇴근 시간도 정해져 있기 않기에, 지치지 않으면서 늘어지지 않으려면 중간중간 회피할 수 있는 것들을 장만해둬야 버틸 수 있다. 나를 등 떠미는 것도, 나를 일으켜 세우고 돌보는 것도 모두 나다.

......오늘 한 일, 오늘의 루틴, 일어난 시간과 잠드는 시간, 이번 주 일정과 당장 내일 반드시 해야 할 일들까지 모두 손으로 적는다. 휴대폰 달력에 정리해두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펜으로 한 자 한 자 눌러써서 그 일과를 기억하고 떠올리는 것부터가 준비운동 같은 것.

 밤을 길게 두면 외로워진다. 아침의 마음을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 밤의 시간을 최소화하고, 아침을 길게 살아야 한다. 무엇보다 가자아 중요한 것은 최선을 다하는 것. 대충하지 않지만 너무 무리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으로 하되 할 수 없는 부분에는 욕심내지 않으며, 그 경계를 지켜 시작하고 마무리를 지을 줄 아는 것이다. 늘어진 잠옷을 입고 떡진 머리를 한 채 일을 하고 있지만, 나는 분명 프로페셔널한 직업인임을 상기하며 일에 매진한다. 앞으로 10년, 20년, 30년......계속 나의 일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꾸준히 최선을 다하면서 나의 자리, 나의 직장, 이곳에서 오랫동안 일하고 싶다.

p65

잘 하고 있다고, 잘 살고 있다고. 다 괜찮을 거라고, 괜찮다고. 

 세상이 때로 너무 잔인할 때 나는 집으로 도망친다. 집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다. 떠날 곳도, 돌아올 곳도 결국 집이다. 이곳이 있기에 내가 있다.

p74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나는 루틴에 몸을 싣고 하루를 보내는 이런 날을 꽤 좋아한다. 그건 그 하루가 안정적이고도 평화롭게 굴러갔다는 뜻이므로.

p78

..."애가 어린이집을 안 갔어....."라고 공허한 눈으로 말하는 친구가 있다면 말줄임표 사이의 개고생을 상상하며 따뜻하게 안아줍시다. 그 친구가 이야기하다 갑자기 울어도 너무 놀라지는 마시고요.

p86

자신을 파악해 취향과 역사에 집중해보고

혀재의 스스로를 가장 기분 좋은 상태로 놓아두는 것.

집이 지금 이 순간의 형태로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p93

...말끔하게 정리와 정돈과 청소가 되었다는 것은 내가 정한 위치에 모든 것이 용도에 어울리게 줄을 맞추어 같은 성질끼리 분류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그 모든 것을 내가 잘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p105

...어디서건 다치지 않고 안심하며 평온한 삶을 지속하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목표만 먼저 설정하면 본질을 놓치기 쉽지만, 본질을 먼저 생각하면 생각을 전환하기가 쉽다. 나에게 브레멘은 잡지에서 보는 남향의 크고 아름답고 초록이 가득한 집일 수도 있었지만 이제 나는 그곳에 가지 않고도 만족하는 법을 안다.

 스스로에게 집이 가진 의미를 물어 가장 자신에게 맞는 것을 찾는다면 꼭 크고 군더더기 없이 세련되게 꾸민 집이 아니어도, 매 순간을 온전한 만족으로 누릴 수 있다고 믿는다. 과거와 현재를 매만지며 폼 나는 이름도 붙여주고 또 외면할 것은 적당히 외면하면서 한구석 나만의 시를 즐기는 생활.

나에게 집은 그렇게 나와 사이좋게 타협한 행복의 이름이다.

p107

집에서의 생활을 단단히 만들어 삶의 무게중심을

안으로 이동시키는 일은 어디로 도망치지 않아도

괜찮은, 밖에서 나를 증명받지 못해도

변치 않을 거라 믿어지는 일상을 만드는 일이었다.

p12

 각자에 대해 너무 많이 간섭하지 않으면서도 서로를 꽤나 믿음직하게 여기고, 이해관계를 기반으로 두지 않되 적당히 목적지향적인, 처음 접한 21세기형 이웃들의 존재가 나는 자주 고맙다. 그들과 동네에서 앞으로도 이런저런 작은 일을 벌일 수 있음을, 가끔 서로 약간의 신세를 질 수 있음을, 나 또한 줄 수 있는 도움이 있음을 수시로 감각하면서, 동네에 대한 소속감과 든든한 마음을 다져가고 있다.

p128

 집에서의 생활을 단단히 만들어 삶의 무게중심을 안으로 이동시키는 일은 어디로 도망치지 않아도 괜찮은, 밖에서 나를 증명받지 못해도 변치 않을 거라 믿어지는 일상을 만드는 일이었다. 요즘의 나는 적당한 책임감을 가지며 일하되 너무 무리해서 잘하려 하지 않고, 적당히 내가 먹을 만한 음식을 만들어 나눠 먹고, 산책하고, 이웃을 만나는 일상에 뿌리내리고 있다. 이런 매일 덕분에 자꾸만 다른 것에 기웃거리고 싶던 마음이 간결해졌다. 남의 삶을 덜 부러워하게 됐고, 누가 뭘 배우는지, 어떤 것을 읽는지, 늘 미어캣처럼 살피던 시선이 둔감해졌다. 불안이 줄고, 불안해서 하던 소비가 줄고, 소비가 줄어드니 경제적 걱정도 막연했던 크기에서 손에 잡히는 크기 정도로 줄었다.

 당연히 여전히 불안이 있다. 문득, 커리어에 대한 욕망보다 생활의 안정을 더 중요시하게 된 게 결국 퇴보한 삶이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살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나는 사회에서 적당히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으로 살고 싶고, 그것을 잘 해내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가진 능력 이상으로 열심히 살아야 할 것이고, 그러다 간신히 단단하게 만든 생활을 다시 홀대하게 될까 봐 두려운 마음 또한 있다. 어떤 것이 진짜 내 욕망인지 종종 헷갈린다.

 나는 일하는 자아가 다복이 보호자, 비건지향인 정체성을 위협하지 않는 노동을 꿈꾼다. 매일 사람이 밀집된 대중교통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다시 날카로워질까 봐,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들의 눈치를 많이 보게 될까봐, 그렇게 지친 마음으로 너덜너덜 집에 돌아와 정작 나 자신과 가까운 것들은 홀대하게 될까 봐, 내 입에 넣을 끼니를 만들 에너지가 없어 배달음식에 의존하게 될까 봐, 직장인으로서의 자아를 가장 책임감 있게 다루느라 다른 책임들에 무심해질까 봐, 나는 겁먹고 있다. 일과 삶을 분리해 일은 짊어져야 하는 것으로, 삶은 그에 대한 보상으로 보는 게 아니라, 각각의 정체성을 공존시키며 전체적으로 감각할 수는 없을까. 그런 노동이라면 정말로 책임감 있게, 잘 해나갈 자신이 있는데....이런 생각을 품는 나는 아주 먼 이상을 바라보는 사람일까.

 그런데 이런 일상에 대한 욕망은 지극히 사적이기만 할까? 나는 내 생활과 생활이 미칠 영향력 또한 생각하고 돌보는 것이 사회와 연결되는 중요한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 감각을 길러나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 역시 사회가 가져야 할 책임이라고 믿고 있고.

...일을 하기 위해 쏟아야 하는 시간과 에너지를 조금만 유연하게 조절할 수 있다면, 예전보다 훨씬, 일 외의 다른 우선 순위도 존중하는 삶을 병행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중요시하는 다른 것들을 실컷 존중할 수 있는 다음으로 가고 싶다. 그것이 영영 큰 인상이 아니길 바란다.

 p143

...제대로 쉬어주질 않으니 쉴 수 잇을 때 양껏 쉬어둬야 했다. 달리는 법만 알았지, 쉬는 법을 몰랐던 거다. 몸은 편할지언정 마음은 산란한 가짜 쉼이었다. 쉬지 못한 만큼 쉬어야 한다는 보상 심리와 할 일을 미루며 생기는 죄책감이 충돌했기 때문이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여러 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산다. 일할 때 일하고, 놀 때 놀고, 쉴 때 쉬는 여러 명의 '나'와 공존하는 것.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새는 일은 없다. 안에서 새는 자아와 밖에서 새지 않는 자아, 이런 나와 저런 나를 넘나들며 산다. 그 중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나'도 있기 마련.

 쉬는 법을 몰랐던 나는 마땅히 쉬어야 하는 시간에 쉬고 있는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ㅁ소했다. 게으름뱅이 주제에 지나치게 관대하다며, 이 정도면 자기기만 아니냐고 자책했다. 제 집에서 제 맘대로 하는 게 누구한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에게 야박했다. 

 ...상대적 박탈감에서 '상대'는 내가 비교 대상으로 삼는 레퍼런스 그룹을 말한다. 은연중에 나 스스로와 동일시하는 특정 그룹을 정하고, 비교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그들과 비교해 내가 우월할 것 같으면 상대적 만족감을, 내가 열등한 것 같으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집'이라는 공간에 있다는 공통점 때문에 관찰 예능에 나오는 연예인과 나를 비교하며 괴로워한 것도 상대적 박탈감이었다.

 이러한 상대성은 세상 많은 이치에 적용된다. 게으름도 그렇다. '게으르다'와 '게으르지 않다'를 구분할 수 있는 객관적인 기준이 없으니 자기 나름의 상대를 가져와 비교 판단하는 것. 나의 경우 '집 안에서의 나'의 레퍼런스 그룹은 '집 밖에서의 나'였다. 관대한 게으름뱅이의 자아와 엄격한 완벽주의자의 자아를 분리해 싸움 붙인 셈. 체급이 맞지 않는 상대라 애초에 대결이 성사될 수 없는 경기에서 숱하게 백전백패 당했다.

 그런데 이게 나만의 문제는 아닌 듯했다. 주위에서 "저는 진짜 게으른 사람이거든요."라고 말하는 사람을 여럿 본다. 신기하게도 평소에 한 번 쯤 '정말 부지런하다!'고 감탄했던 사람이 그런 말을 한다. 당신처럼 부지런한 사람이 무슨 소리냐고 반문하면 은근히 자신을 낮춘다. 알고 보면 게으른 구석이 있는데 티 나지 않을 뿐이라는 거다. 혹시 '집 안에서의 나'를 게으르다고 말하는 건 아닌지 묻고 싶어졌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고 싶어졌따. 

저도 집에서는 되게 게을러요. 얘도 그렇고, 쟤도 그럴 걸요? 물론 집에서까지 부지런한 사람도 있죠. 그 사람이 대단한 거예요. 안 부지런하면 뭐 어때요. 집이잖아요. 쉬는 곳이잖아요.

p164

...지금 대부분의 재택근무는 위기상황 때문이라는 것을 의식적으로 잊지 않으려 한다. 자기만의 공간이 허락되지 않은 누군가에게는 무척 잔인한 업무 환경이 주어지는 시기일 것이다. 우리 모두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 많은 것을 빠르게 배우는 사이, 빠르게 무언가를 잃기도 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저마다 온 힘을 다해서 내일을 살 용기를 내느라 그것을 알아볼 여유가 없어서인지, 여전히 진행 중이어서 윤곽을 볼 수 없어서인지, 그 둘 다 때문인지 알 수 없다. 모르겠다. 모름을 앎의 언어로 빠르게 단정할 수 없다.

...우리는 자기 공간에서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는 시간을 지나고 있다. 누구나 이 불확실한 시간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낼 용기를 내고 있을 거시다.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 변화시킨 집이라는 공간은 앞으로 조금씩 나아간 증거가 될 것이다.

p182

...아이를 키우는 전업주부든, 야근이 일상인 회사원이든, 질풍노도의 청소년이든, 누구에게나 독립적인 자신만의 공간은 필요하다. 내 취향으로 가능한, 나만의 물건들이 나만의 질서로 자리 잡은 곳.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곳.

 살밍 버거워 잠시 내려놓고 싶을 때 찾을 수 있는 셀터 하나쯤 있어야 옳다. 그래야 지치지 않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이 집을 만나고 나서야 공간이 갖는 힘, 기회, 위안을 알아간다. 집에 대해 새롭게 배워간다.

p188

...실은 내가 매일매일 부지런히 손톱만큼씩 가꿔왔기에 맞이한 오늘이다.

p192

 이런 마음은 문구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었다. 일을 하기에 앞서 주변 환경을 따졌다. 이 일은 아무 곳에서나 아무 날에나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언제나 마음에 단골 손님처럼 찾아왔다. 특별한 이야기를 반듯하게 시작하고 싶었듯이, 내 일상보다 훨씬 정갈한 공간에서 일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여유를 맞이할 수 있게 되자 정말로 여유가 찾아온 것처럼, 어느샌가 마음이 가벼워졌다. 일이 점차 늘고, 그로 인해 하고 싶은 게 생기면서 절로 대범해졌다. 긴 시간을 고심해야만 겨우 시작할 수 있던 일도 빠듯한 마감 앞에서는 무색해졌다. 고민할 시간에 일단 시작하지 않으면 다음의 내가 차려지지 않느다는 걸 실감했을 때, 비로소 어떤 일이든 아무 날에 아무 곳에서 시작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p201

- 근데, 지금 바쁜 거면 다음에 갈게요. 저는 한번 집중했을 때 흐트러지면 안 돼서. 혹시 방해가 된다면......

 오, 자신이 피하고 싶은 일을 타인에게도 하지 않으려는 마음은 때론 사려 깊게 작용하는구나. 하지만 나의 대답은 이러했다.

- 괜찮아요. 저는 한 번에 세 가지 일을 할 수 있거든요.

p204

...하나의 과정은 때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작은 차이를 더하고 뺄 준비를 한다.

.....

......

집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가고 싶다'가 아닌 '머물고 싶다'라고 생각하고 싶다. 나는 집에서만큼은 언제든 나를 멈추게 하고 싶고, 나의 집에서 가장 진하게 표시되고 싶다. 집에 있으면서도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집은 현재의 내가 머물고 있는, 현재의 종착지이다. 

 원하는 삶이란 건 완성되는 게 아니라는 걸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내일과 닮아도 되는 오늘을 보내며, 하루치 여유를 만나는 게 지금 내가 원하는 삶이다. 노을에 딱 맞는 잔을 골라서, 어울리는 자리에 앉아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메일을 그저 반복하면서, 비슷한 다음이 분명 이어질 거라고 믿고 있다. 지금, 그럴 수 있는 집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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